누가 바보이며 누가 바보가 아닌가? 우리사회에서 '똑똑한 사람' 이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 남의 등을 밟고 올라가는 사람, 남의 피땀의 성과를 가로채는 사람, 남을 속이며 남으로부터 절대로 속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남으로부터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돈을 벌든지 권력을 잡든지 하여간에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찬탄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명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른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다.
이런 '똑똑한 사람' 말고 또 한 부류의 '약은 사람',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있다. 그들은 '현실과 타협'할 줄 알고 '현실에 적응'할 줄 아는, 이른바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아니하고, 어떤 부당한 취급을 당하더라도 고분고분 고개 숙이고 받아들이며, 반대로 약자 앞에서는 허리를 뻣뻣이 펴고 헛기침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처세철학 제1조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말이 없다. 일제 36년의 억압과 지배의 현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동, 그리고 6·25의 혼란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남았던 기성세대는 이러한 비굴한 처세철학을 뼛속까지 익힌 '현명한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뿐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要訣),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부모, 선배, 교사, 라디오, TV, 영화, 고명한 학자, 승려, 정치인 등등의 모든 권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 들어온, 이 그럴 듯한 추상적 명제를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그것은 곧 어떠한 현실에건 저항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쓸개를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거세된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실로 무서운 주문(呪文)인 것이다.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오더니 '사람 다 되어서 왔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깠지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식의 어떠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져야만 하는 숨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깨달아 겸손(?)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달걀로 바윗덩어리를 치는' 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지각 있는(?)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인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 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된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회사원의 경우는 사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그것이다. 노동자의 경우는 기업주가 필요로 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사람이 바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지배하고 명령하는 강자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강자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모든 내면적 욕구와 의지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기능·노동력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상이며, 또 그 참혹한 전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상인 것이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유보다는 책임을" 숭상하라고 하는 요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그들의 비장의 주문(呪文)인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은 '똑똑한 인간', '약은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바보'라고 선언하였다. 무엇인가 마음을 치는 대의(大義)의 부름이 있어 고난의 가시밭길을 스스로 나서는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보이다. 열심히 기술이나 배워 일류 재단사가 되고, 그래서 돈을 모으고, 잘 되면 한 밑천 장만하여 장사를 하든지 평화시장쯤에 공장을 하나 차리든지 하면 빠를 텐데, 부질없이 되지도 않을 근로조건 개선이나 부르짖고 다니다가 업주들의 미움을 사서 해고나 당하고 혹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하는 그런 아무 이득 없고 손해만 어리석은 길을 택하다니. 그것은 바보이다. "남들은 다 밸이 없어서 가만히 죽어지내고 있는 줄 아나. 즈이들이 무슨 통뼈라고 중뿔나게 나서서 노동운동이니 뭐니 하고 설쳐? 그런다고 뭐가 될 줄 아나. 결국 신세 조지고 피 보는 건 즈이들뿐이라고, 어리석은 것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찍는다. 노예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취급된다. 세상 사람들은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을 '바보'라고 한다. 왜 바보인가? 고난의 길을 자초하니 바보이다. 세태와 타협할 줄 모르고 순응할 줄 모르니 바보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부르짖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나서자고 호소하는 전태일을 보고 나이든 선배 재단사들이 '바보'라고 불렀을 때 그는 단연코 '좋다, 나는 바보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비웃는 자조(自嘲)의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세상의 거꾸로 된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절대로 그릇된 길이 아니라고 하는 강렬한 자기 확신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똑똑한' 자들에 대한 불을 토하는 매도였고 세상의 '약삭빠른' 자들에게 되돌려주는 동정어린 비웃음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 바보인가?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보인가?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 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체념하고 굴종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삭막한 겨울 벌판의 나무둥치 속에서 내일 화사하게 피어날 꽃잎을 바라보고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택한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그것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의 힘을 확신하는, 진리가 반드시 드러날 것을 의심치 않는 억압과 착취의 저 깊은 고통의 밑바닥에서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솟아오르는 새시대의 목소리였다. 그들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선구자였고 죽음과 같은 체념과 침묵의 벽을 깨는 시대의 참된 영웅들이었다. 오늘 그들은 약할지라도 내일은 반드시 강성(强盛)해질 것이다. 오늘 그들의 외로운 목소리는 언젠가는 거대한 함성으로 메아리칠 것이다.
오늘 그들이 치켜든 한 개의 작은 촛불은, 내일 수천만의 횃불로 타올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전태일 평전 중...
오늘 그들이 치켜든 한 개의 작은 촛불은, 내일 수천만의 횃불로 타올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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