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당사자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거나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자기를 부정하거나 현실을 은폐하기 쉬운 게임>에 참여하는 당사자는 대체 어떤 전략을 수립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나는 독재 왕국의 독재자다. 나에게는 몇몇 형제와 자매가 있다. 나는 그 누구도 전적으로는 신뢰하지 않는다. 또, 그러해서도 아니된다.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내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제거해야만 할까? 아니면 나의 관대함을 대중에게 당당히 내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살려두고 충성 서약을 받고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볼모로 삼아 보이지 않게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만약, 그들이 내란, 쿠테타 등에 성공했을 때에도 과연 나를 살려두는 선택을 할까? 나는 대체 어디까지 그들을 믿어야만 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나는 내 의지와 명령으로 통제 되지 않는 것들이 끔찍하게 싫다. 모든 것들은 내 통제하에서 존재해야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내 친 혈육이 내 두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나는 이 현실이 짜증이 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 선택이 내 삶과 운명을 결정짓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무인도에 표류한 자들이 더는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서로를 잡아먹었고 그 중 소수만 살아남아 구조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들의 귀환은 신문 방송 등에 의해 시민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이는 큰 논란을 불러왔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했어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느냐?에 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법적인 처벌은 면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어떤 선택이 최적의 전략이 되겠는가?>
<한 신문에서 특종을 보도했다. 금수만도 못한 한 아버지에 의해 어린 딸이 수년에 걸쳐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기사를 보고 거의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 자식을 세 명이나 낳아 기르게 강요한 것으로 후속 기사 등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때, 여러분이 그 어린 딸이라면 제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어린 딸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정신의학의 태동기에 의사들은 곧잘 엉터리와 같은 일들을 저지르곤 했다. 뇌과학이나 관련 수술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정신병동에 수용된 환자들 중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통제에 따르지 않는 자, 원장, 의사 등 감독자, 관리자 들을 험담하거나 환자들을 선동해 탈출을 시도했거나 시도하려는 자 등)를 골라 뇌수술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보면 이와 비슷한 예가 등장한다. 여러분이 그 당시 그 정신 병원에 수용된 환자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과연, 여러분에게 최선은 무엇인가?>
<한 사진작가가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한 아이를 발견했는데, 마침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진작가는 얼른 사진을 찍고 아이를 구조하였다. 그리고 이 사진으로 사진작가는 퓰리처 상을 타는 명예를 거머쥐었고 당연히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문제는 이 사연이 언론 및 방송 등을 타고 널리 전해지자 사진 촬영을 포기하더라도 먼저 그 아이를 구조했어야 한다며 그 사진 작가를 향한 비난, 인신공격, 모욕, 욕설 등이 들끓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여러분이 그 사진작가라면 최선은 무엇이겠는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고, 눈 앞에서 고문기술자에 의해 동료들의 팔다리가 잘려져 나가고 눈, 코, 귀, 입을 도려내는 가혹한 고문이 이루어졌다. 결국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물 한 모금, 담배 한개비, 달달한 사탕 한 알에 조국에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기밀 사항을 기어코 적에게 건네고야 만 것이다. 살기 위해 국가 일급 정보를 적에게 실토하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조국을 배신했다는 자괴감,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정체성과 자존감이 거대하고도 거대한 혼돈과 혼란에 직면해 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조국을 배신했고 동료들을 구해내지 못하였고 오직 내 이익만 추구했을 뿐이다. 나라는 신화는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내가 나에게 덧씌운 온갖 이미지들은 끔찍하게도 박살이 나버렸다. 나는 이미 파괴되고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기자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권력자의 거대한 비리와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 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공공연하게 밝힌다면 권력자와 권력자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성난 군중에 의해 되려 내 목숨 뿐만 아니라 가족의 안위 조차 위태로울 수 있고, 그렇다고 이 비리를 밝히지 않자니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대체 어쩌면 좋겠는가? 비겁하지만 현실이라는 실존하는 거대한 벽을 인정하고 나와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위해 내 양심이 진실로 바라는 바를 위해 성난 대중 앞에 나서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을 침묵하는 대신 권력자 및 권력자를 옹호하는 이들에게서 막대한 금전과 특권을 보장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나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다. 나는 한 나라의 전략무기 개발에 일조하였으나, 그 나라의 최고 통치자와 정보 당국은 내게 정식으로 허락할 때 까지 침묵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브레인 워싱을 당했고, 이전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나는 행방불명 처리 되었다. 조국에 남겨진 부모형제, 아내와 자식들은 이 사실을 죽는 날까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할 것이다. 나는 정보당국의 감시 속에서 새 신분과 새 증명서를 발급 받았고 정보 당국이 소개한 한 여인과 결혼해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나는 새 직장을 얻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과의 사이에 아이를 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헌데, 어느 날 발생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의 여파로 뇌에 큰 충격을 당한 후 부터 차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고통과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지독한 두려움, 불안, 호흡곤란 속에서도 나는 한걸음 한걸음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실의 조각을 하나, 하나 모은 끝에 결국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모종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 브레인이이자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자연히 이해가 된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전략무기 개발 및 제조 등에 관한 핵심 원리 및 비밀을 아는 나는 이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닥쳐올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살아있음을 조국과 부모형제, 아내와 아이들에게 알려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대체 어쩌면 좋을까?>
<나는 한 남자의 아내요, 아이들의 어머니다. 결혼 전 촬영 된 성관계 동영상과 사진을 통해 아는 지인이 나를 지속적으로 협박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그 지인에게 입막음을 위해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몇 차례 건넸으나, 그 지인의 요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나는 한계점에 다다랐다.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가정은 파괴될 것이며 나는 버림받게 될 것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며 손가락질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금전 요구를 무한히 들어줄 수만은 없다. 이 또한 가정을 파멸로 내몰게 될 것임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 모르게 가정에 금전적인 손실을 가져오는 것에도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경찰서에 가서 피해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정식으로 요청할 것이냐? 아니면 여전히 막연한 기대에 의지한 채 하루 하루 초조하고 불안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것이냐? 전화벨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벌컥벌컥 미쳐 날뛴다. 낯 선 사람이 집 근처에만 어슬렁거려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이렇게 사는 삶은 정말 사는 게 아니다. 남편에게 알릴까? 남편에게 알린다면 과연, 남편이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줄까? 내가 남편의 입장이라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확실치 않다. 그 지인의 입을 영원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청부살인?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하고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 뿐이다. 나는 대체 어쩌면 좋을까?>
일정한 균형과 질서 안에서 건강하고도 합리적으로 공평하고 정의롭게 만인에게 적용될 때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는 도덕과 윤리이지만, 이를 맹목적으로 맹신하거나 절대화 하면 풀어내지 못하는 인류의 난제들이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사실, 도덕과 윤리는 도덕과 윤리 그 자체일 뿐 그 누구나가 언제 어느 때 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상식이 그저 상식일 뿐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열거된 사례들과 같이 극단적 결과가 예견되는 게임에서는 도덕과 윤리는 일단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최적의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진실을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된 것도, 인생이 자기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진실과 조우한것도,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자기 외 그 누구도 없구나. 하는 자각에 이른 것도,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그 자체가 유일한 성과가 된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친 것 자체가 난제의 해법이 될 수 있는 게 인생일 겁니다.
이것이 내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발가벗은 인간>에 주목하고 이를 기초로 생존 철학을 정립해 나가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복잡한 게임을 <선택>과 <책임>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저 선택하고 책임지면 족할 뿐이겠지요. 물론 말만 쉬운 뿐 실제 현실에서는 지혜, 용기, 결단력, 책임성 등이 두루두루 요구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