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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이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
이런 미덕을 쌓았다는 통신사의 실체를 한국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300년 넘는 세월 동안 모두 열두 차례, 3천 명 넘게 파견된 조선의 외교사절들은 에도(도쿄)까지 이어진 여행로 곳곳에서 글과 그림 등 문화 산물을 무지한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 그 은혜를 받으려고 인파가 줄을 이었다는 것 등을 사람들은 되풀이해 기억하려 한다.
일본 우익들은 거꾸로 통신사를 일본 무신정권(막부)에 대한 조공사절 정도로 폄하하곤 한다.
임진왜란 뒤 재개된 통신사 외교의 이면에 기억들과 다른 ‘미묘한’ 역사적 사실들이 훨씬 많이 숨어 있다는 점은 종종 잊혀졌다.
한국 18세기학회에서 최근 펴낸 논문집 <18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태학사)은 18세기 통신사 문화 교류의 이면에 숨은 복잡 미묘한 진실을 담은 책이다. 책이 주목한 18세기는 조선-일본 간 교류가 가장 활성화한 때다.
통신사는 네 차례 파견됐고, 사절단 수(300~500명)나 일본 쪽 접대 규모 또한 최대였다.
학회 연구자들의 논문 10편은 이 시기 통신사 문화 교류의 양상들을 색다른 각도에서 뜯어보았다.
물론 분석한 결론들은 일반인들의 선입관과는 달랐다.
상당수 논문들이 18세기 일본 지식인 문화가 양과 질에서 조선을 능가할 정도로 급성장했고 내실도 탄탄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는 ‘동아시아 문학의 자국주의와 중화주의의 위기’라는 권두 논문에서
18세기 일본에 막대한 서양과 중국 문물이 들어오고,
신지식 경영으로 조선의 우월주의, 중화주의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음을 사례로 보여준다.
그 무대에 17~18세기 일본 막부의 외교 거물이자 최고 유학자라는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가 등장한다.
1711년 파견된 통신사 정사 조태억(1675~1728) 일행이 아라이와 붓글씨로 대화한 기록을 담은 <강관필담>을 보면,
아라이는 동서양에 걸친 사유와 지식으로 논의의 주도권을 잡는다.
자국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양의 여러 산물과 다양한 외국인들을 직접 다 보았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외국 사정에 어둡던 조선 사절들을 압도했다.
사신 일행이 구라파, 이탈리아, 화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라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를 신문한 내용을 책으로 내고, 서양 세계지도도 수벌을 갖춘 그에게
조선 사신들은 문학적 우월주의만 믿고 대적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라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사신단은 청나라도 중화문명의 정통인 조선을 존중한다고 애써 자랑했지만, 아라이는
“천하는 청나라 세상인데, 명나라 복색을 겨우 흉내내는 조선이 옛 속국처럼 엉거주춤하고 있지 않느냐”고 쏘아버린다.
2) 일본 예 들며 국제교역 주장한 박제가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가 쓴 논문 ‘계미통신사와 실학자들의 일본관’은 또 다른 이색 사료들을 보여준다.
통신사의 젊은 수행원들이 전한 당대 일본 지성계 흐름에 대한 정보묶음이다.
이들을 엮은 기행기가 18세기 실학자들의 일본관을 재정립하게 했고, 실학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다.
한 예로 1763~64년 500여 명이 다녀온 통신사 여행(‘계미년 사행’이라고 한다) 당시 수행한 서기 원중거가 기행기 <화국지>를 통해 언급한 구절이 인용된다.
“대저 이 나라 사람들은 총명하고 일되어서 4, 5살이면 능히 붓을 잡고, 10여 살이면 시를 지을 줄 안다. 여자들 중에도 시 짓고 글씨 쓰고 할 줄 아는 사람이 허다하다. 해중지향(바다 가운데 문명의 땅)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나카사키로 중국 책들이 통하게 된 뒤로 집집마다 글을 읽고 사람마다 붓을 잡고 있으니….”
같은 서기였던 성대중도 <일본록>에서 “에도(도쿄)의 인사들 사이에 시문이 매우 성해서 옛날에 비할 바 아니다”라며 “앞으로 통신사절들은 (상대를 만만히 여기면) 반드시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임 교수는 박제가가 유명한 저술 <북학의>에서 국제 교역이 나라를 부강시키는 데 유익하다는 주장의 논거로 일본을 들었으며,
중국과 상선이 직통하고 30여 나라와 교역해 물화의 풍성, 문명의 변화가 놀라울 지경이라고 찬사를 보낸 구절도 소개했다.
필자는 일본의 국제 교역이 가져온 기술문명을 중시했던 연암 박지원 학파의 경우 일본을 하나의 발전 모델로 염두에 두었다고 단언한다.
연암 박지원17세기 이래 일본에 퍼진 신유학의 한 갈래인 ‘고학’(古學)이 이덕무, 정약용 등
18세기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하우봉 전북대 교수의 논문도 색다르다.
고학은 통치 이념이던 주자학을 벗어나 옛 고대 유교 경전들을 당대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유파다.
특히 다산은 일본 고학파들의 성과를 유난히 높이 평가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대표 저술인 <여유당전서>의 곳곳에서 일본의 문화·학술을 언급하고 있으며, 논어를 주해한 <논어고금주>를 지을 당시엔
오규 소라이 등 당대 일본 고학자들의 저술을 100여 군데 이상 인용했다고 글은 밝혀놓았다.
하 교수는 실학자들이 일본 고학에 동조한 배경으로 주자학을 극복하고,
조선·일본에 일어난 초기 자본주의적 변화를 사상적으로 대변한 점 등을 꼽았다.
실제로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일본은 본래 백제를 통해 서적을 얻어 몽매했는데, 중국 강남과 직교역하면서 좋은 책을 사가지 않은 것이 없다. 과거제의 폐단도 없어 지금은 그들 학문이 우리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하 교수는 소개하고 있다.
당대 조선 일본 지식인들의 한문문체를 비교분석한 김성진 부산대 교수도 논문에서
에도 막부가 18세기 중국 강남 무역선을 통해 엄청난 양의 장서를 사들였다는 당대 기록을 언급한다.
정조 때 대장서가로 이름높았던 서유구의 할아버지 서호수의 망신담을 소개한 내용은 뜻밖이다.
1776년 중국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금도서집성>을 사려했는데, 중국 상인이 “간행 50년이 지났는데 당신 나라는 이제야 사는가. 일본은 나카사키, 에도에서 3부를 구해갔다”고 웃어 창피함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3) 쓰시마섬의 조선어학교 ‘한어사’
<18세기…>에는 당대 교류의 직접 수단인 조선어, 일본어 어학 교육체계를 두 나라가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설명도 나온다.
18세기 왜어와 조선어 강습 체계를 살펴본 이상규 동의대 강사와 정승혜 수원여대 교수의 글이다.
조선에선 17세기 말 정부 지정 일본어 학습서 격인 <첩해신어>가 간행됐으나, 이후 2세기 동안 일본어 변화를 수용하는 정부 교재가 편찬되지 않아 통역 수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됐다.
반면 일본은 외교관 아메노모리의 노력으로 1727년 쓰시마섬에 ‘한어사’라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고, 9~17살 청소년 30여 명에게 하루 6시간씩 3년 과정의 맹훈련을 시켰다.
문법, 발음부터 어휘력, 전문용어, 문화사 지식 습득까지 오늘날 외국어 공부와 비슷한 과정을 초·중급 단계로 가르쳤다.
<십팔사략> 등을 읽어 발음을 익힌 뒤 <소학> <사서> 등을 배우고, 단어장 격인 <물명책>과 고전소설 <숙향전>을 강독하고 토론했다.
8가지 기준에 따라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고, 학생 중 10명을 뽑아 부산 초량 왜관에 요리사 딸린 정기 어학연수단을 보냈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 용의주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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