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단 얘기지"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사토시,이 녀석의 말재간은 인정하기 싫어도 꽤나 훌륭한 편이다. 대화의 주제는 다시 떠올리려고 뇌를 쓰는게
비효율적일 정도로 변변찮았지만 사토시의 말재주가 더해지니 마치 웅장한 연설 하나가 된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근본적으로 가벼운 어투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냐"
건성으로 대답하고선 계단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이제 한층계만 더 올라가면 고전부 부실이 있는 층이였다. 오늘도 치탄다 에루,그 호기심으로
무장한 검사와 대치해야 될 것이다. 그 검사 뒤에는 이바라라는 궁수가 있지만 치탄다가 나를 베어내기 전에는 그저 견제의 화살만 날릴 뿐,
그렇게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주의는 오로지 치탄다에게만 쓰면 되지만 치탄다의 공격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들어오기 때문에 피해 볼 겨를도
없이 베이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날라오는 이바라의 화살들은 나의 에너지 절약주의를 완벽히 사살해 버린다.
"표정이 왜 그래. 호타로?"
..물론 이 녀석도 포함시켜야 하겠지만 오늘은 다른 부활동 때문에 빠진다고 하니 특별히 제외시켜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끝나고 서로 다른 부실로 향하려는 순간, 사토시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저런 제스쳐를 보여줬다는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테니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맞다 호타로. 그거 알아?"
"네가 물어봤을 정도의 일이면 나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
"미안, 아무튼 주의깊게 들어줘. 중요한 얘기니까"
사토시가 말의 과장을 좀 심하게 하는 편이기에 얼마나 중요한 얘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로 사토시가 한 말은 중요한 얘기였다.
"치탄다가 지금 양호실에 있어"
"..뭐?"
"감기가 독하게 걸렸나 봐. 마야카 말로는 이마가 불덩이 같다고 하던데.."
사토시가 이 말을 했을 때 치탄다의 안위보다 나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 내었다. 내 인간성에 대해 약간의 회의가 들었다.
난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 대답했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는?"
"같은 고전부원으로서 걱정도 하지 않는거야? 냉정한걸. 호타로는. 그나저나 아직도 감기 안 나은거야?"
"사례다 사례. 그리고 걱정이야 당연한 거다. 난 지금 이유를 묻고 있는 거야"
방금 내뱉은 말의 앞부분 때문인지 사토시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이 사토시, 대체 뭐냐. 그 표정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이유는 간단해. 나 대신 치탄다의 병문안을 가줘"
평소의 나였다면 단칼에 거절하거나 합당한 이유를 물어봤을 테지만 오늘은 치탄다가 아프다 하므로 간단하게 승낙했다. 같은 부원의 병문안을 가는게
당연한 도리기도 할 뿐더러 양호실에 가서 치탄다에게 걱정한다는 말(걱정한다는 말은 진심이다) 을 전하고 나오면 내가 할 일은 고전부 부실로
가서 남은 시간 동안 간만에 생긴 여유로음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이바라의 독설은 조금 귀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겠어"
"오~ 별일인걸. 천하의 호타로가 이렇게 간단히 승낙해주다니 말이야"
..언제까지 날 붙잡고 있을 생각이냐 사토시.
"나라고 그 정도의 인정은 없는게 아냐, 얼른 네 갈 곳이나 찾아서 가라"
"그럼 부탁할게~"
사토시를 보내고 나서 난 양호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몇번 해봤지만 별다른 대답이 없었기에 몇초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양호실 안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양호선생님의 탁자 위에 있는 부재중이라는 팻말과 커튼이 쳐져 있는 침대들이 전부였다. 난 커튼이 닫힌 침대쪽으로
가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치탄다가 침대에 누워 색색거리고 있었다. 내가 옆으로 다가가자 치탄다는 인기척을 느낀 듯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레키씨"
"어,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치탄다는 내 말에 힘겹게 웃어보였다. 자신은 괜찮다는걸 표현하고 싶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미소는 되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본래 비효율의 극치를 달릴 정도로 활기 찬 모습만을 보여줬던 치탄다였기에 꽤나 아프다는걸 알 수 있었다.
"잠깐 실례"
치탄다의 이마에 올려져 있던 수건을 치우고 손을 올려보았다. 이바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닐 정도로 뜨거웠다. 수건은 이미 치탄다의 열에 동화되어
차가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었다. 난 침대 옆의 선반 위에 있는 플라스틱 대야에 수건을 적시고 짜내었다. 효과는 얼마 안가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테니 난 치탄다의 이마에 차가워진 수건을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오레키씨.."
치탄다는 다시 한번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여전히 입꼬리가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방금 전에 보여 준 미소보다는 한층 더 자연스러웠다.
"난 이만 가볼게. 아,그리고 사토시도 걱정하고 있어"
"자,잠깐만요 오레키씨"
이 정도면 할 일은 다했다고 일어설려던 차, 치탄다가 나를 붙잡았다.
"왜?"
"양호선생님.. 아직까지 안 돌아오셨죠?"
"어, 그렇긴 한데"
그리고 난 여느때처럼 에루에게 베이고 말았다.
"저, 오레키씨. 양호선생님이 오실때까지 옆에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뭐?"
"양호선생님이 중요한 일 때문에 늦는다고 하셨어요. 제 부모님을 부르긴 했지만 아마 30분 뒤에 오실거에요"
"..알겠어"
예상치 못한 일격에 정확히 베인 나는 아무 저항도 못 했다. 몸이 아픈 환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간다면 그 환자에게 미움받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 됨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두루두루 퍼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더 큰 비효율적인 일을 하게 될 지
모르므로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레키씨는.. 상냥하시네요"
아까만해도 사토시에게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었건만, 순간적으로 내가 상당히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아니, 이중적이지는 않다.
모든 것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것일 뿐.
........
"그나저나 치탄다"
"네..?"
"어쩌다 이런 독한 감기에 걸린 거야?"
몇분간 서로 아무런 얘기도 없던 와중에 형식적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치탄다는 이유를 잘 모르거나 창피한 이유인지 말하기를 망설이다
간신히 대답했다.
"오레키씨가 일주일 전에 걸린 감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내가 일주일 전에 감기에 걸린 건 맞지만 그 때 걸렸던 감기는 약한 수준이였고 남한테 피해가 안가게 관리 또한 철저히 했다.
당연히 난 반발했다.
"분명 관리를 철저히 했을텐데.."
"그렇죠"
"내가 철저히 관리를 했는데 우연찮게 당했다, 그말이야?"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야 대체?"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말 투성이였다. 혹 치탄다가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정신이 나간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일주일 전에 오레키씨께서 음악 수행 평가를 하시고 나서 부실에 오셨을 때.."
치탄다가 말하는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음악 수행 평가란 자유 악기 연주였다. 그때 난 나이에 비하면 유치하겠지만 누구나 무난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리코더를 들고 갔다. 분명 사토시가 옆에 있었다면 "역시 호타로 다운 선택이었는걸" 이라고 말해줬겠지.
"그게 왜?"
"그 때 오레키씨가 리코더를 실수로 부실에 두고 가셨잖아요"
치탄다의 말은 사실이다. 그날 난 실수로 고전부의 부실에 리코더를 두고 갔기 때문에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써가며 부실로 되돌아가 리코더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 때 부실에는 치탄다만이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난 아무 말없이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치탄다도 내 행동의 뜻을 눈치챘는지 가뜩이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어쩌면 내 볼도 치탄다와
비슷할 정도로 붉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양호 선생님이 오시기까지 나와 치탄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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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올리려니 잊어먹을 것 같아서 오늘 올려봐요. 최대한 원작과 가깝게 써보려 했는데 소재가 소재인만큼 끝에선 좀 요상해지긴 하네요.
아무튼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