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택시 故 전응재 조합원 분신, 왜?
초등학생 아들 둘을 둔 아버지이자 택시 노동자들의 꿈인 개인택시 발급을 일년 앞두고 있는 한 노동자가 추운 겨울 밤, 아무도 없는 회사 마당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유서도 남기지 못한 한 택시 노동자의 분신
그의 이름은 전응재다.
2002년 전국을 달구었던 65일간의 택시 파업 당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열정의 소유자였고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월급제를 사수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택시 노동자요, 천성이 착해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의 몸은 이제 동지들 곁이 아닌 차가운 영안실에 놓여있다.
23일 밤 10시경 인천 석남동에 위치한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김씨는 가게 앞에 있는 우창택시 차고지 안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뛰어나갔다.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입구에 있는 배차실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잠이 들었는지 답이 없었다. 다급하게 경찰과 119를 불렀지만 생명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그의 가족들이 연락을 받은 것은 밤 12시가 넘어서였다.
그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에 타버린 건물 차양막 언저리와 아스팔트에 남겨진 흔적만이 그의 심정을 전해줄 뿐이다. 뒤늦게 발견된 그의 흔적은 부인에게 쓰다만 편지였다. 그 쓰다만 편지조차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지워져있다.
어렵게 읽은 편지 구절에서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잘 살지 못한 것 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말조차도 남기지 못한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회사 동료 3명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해고된 동지에게 김밥과 오뎅을 사주며 “해고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임금 삭감은 절대 안된다“며 비분을 토하기도 했다. 동지들과 술을 마실 때도, 동지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왔을 때도 그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영안실 고인의 영정앞에 앉은 부인의 통곡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는다. 유족의 울음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침통한 동지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투쟁으로 쟁취했던 13조 2항은 사라지고...
故 전응재씨가 비장한 결심을 하던 23일 오후 4시. 민주택시연맹 인천본부 우창기업분회에서는 조합원 총회가 있었다. 작년 12월 1일 체결된 임금협약에 대한 설명회가 열리는 자리였다. 몇몇 조합원들이 임금협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려 했지만 발언은 제지되었고 결국 위원장의 견해만을 듣게 되었다.
2002년 전국민주택시연맹(이하 민택)은 월급제 쟁취를 위한 총파업을 벌였고 민택 인천본부는 65일간의 파업 끝에 전국 유일하게 가감누진형 성과급식 월급제를 쟁취했다. 당시 협약의 최대 골자는 ‘정상근무를 한 경우 월평균 운송 수익금을 산정하여 이를 총 운송수익금에 합하여 성과수당을 산정한다’는 13조 2항이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연,월차를 유급화한다는 것이다. 2002년 교섭이후 사업주들은 끊임없이 13조 2항의 수정을 요구해왔으며 인천본부는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번 임금교섭에서 이 조항을 삭제하기로 교섭위원들이 합의했다. 이 조항이 삭제되면서 조합원들은 실질적으로 적게는 월 10만원에서 많게는 월 60만원의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2월 5일 결과가 알려지자 인천본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2002년 투쟁의 성과물을 내줬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단위 노조 대표자들 사이에서도 총회를 열고 조합원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결국 사업장에서 임금협약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택시월급제 사수를 위한 비상모임’(이하 비대위)이 꾸려졌다. 故 전응재 조합원 역시 비대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우창분회내 비대위원들은 총회 소집을 요구하는 조합원 서명을 받아 김익환 노조위원장에게 총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위원장은 번번이 조합원 총회를 연기했다. 故 전응재 조합원은 2002년 당시 함께 투쟁을 하고 2003년도 선거에서 런닝메이트로 입후보하기도 했던 김익환 위원장을 상대로 대립해야만 했던 상황에 처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23일 오후 4시 총회가 아닌 설명회가 열렸다.
하지만 설명회도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못했다. 임금 협약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 위해 일어서려는 순간 완력으로 저지당해야 했다. 우창기업 상조회에 있다 최근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이 발언자의 어깨를 누르면 ‘앉아서 이야기하라’고 제지한 것이다. 격양된 조합원들의 감정과 달리 설명회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해고를 막지 못해서 미안해”
2005년 김익환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소위 ‘떳다방’으로 불리는 지역에 ‘줄서기’를 시켰다. 故 전응재 조합원은 ‘민주노조 정신에 맞지 않는다’며 차고지 사거리에 누워버릴 정도로 거세게 항의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재발되었고 조합원 불신임 투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4표 차이로 불신임은 통과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해인 2006년, 갈수록 심해지던 사측의 노조 탄압은 조합원들을 상대로 회사 공금을 착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택시 문을 열고 닫는 횟수와 입금액이 맞지 않는다는 것과 차량에 장착된 GPS이동거리와 요금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익금을 착복했다는 덜미를 씌웠다. 사측은 의심되는 조합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개별 면담을 통해 압박을 가했다. 이 대상자중 2005년 불신임을 주도했던 대의원 세 명만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결국 해고되었다.
현 위원장과 함께 부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던 故 전응재 조합원은 해고된 대의원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두고 마음 고생을 많이 한 듯하다. 자신이 부위원장직을 사임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해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책한 탓인지 분신을 하기 4시간 전에도 해고된 조합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남기지 못한 유서에 담긴 의미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해서일까.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표정은 멍한 표정이다. 어색한 검정색 양복을 걸친 채 쉴 새 없이 통곡하는 어머니는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는 느낌외에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얼굴에는 어둠이 가득하다.
불을 붙이기 전 고인은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단 한 통화도 연결되지 못했다고 한다. 주야 맞교대를 하는 택시 노동자의 일상에서 밤 10시란 한창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안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이 먹먹할테지만 전화를 받지 못했던 동료들의 가슴은 더욱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회사의 탄압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들을 탓하고 13조 2항을 지키자는 요구를 외면한 교섭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 영안실에 있는 동지들은 하나같이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월급제를 사수하고 민주노조의 정신을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기 불과 4시간 전만 해도 해고된 동지에게 김밥과 오뎅을 사주고 언제나처럼 조용히 집에 돌아왔던 그날 밤,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늦은 밤 10시, 불 꺼진 조합 사무실까지 혼자 걸어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그 순간까지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지의 해고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2002년 긴 투쟁으로 쟁취한 ‘월급제’가 흔들리는 것이 분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전의 동지가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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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글이 아니라서 죄송...하지만 널리 알리고 생각해 볼 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