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적 부터 가난했다. 아니 가난한것 같았다.
아빠는 없었고, 엄마와 나 단 둘이 살았다.
언니가 있긴 했지만 언니는 아빠밑에서 자랐고 나만 엄마랑 살았다.
우리 엄만 한달에 두번 쉬는 식당에서 설것이 해가며 나를 키웠다.
난.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엄마가 항상 자랑스럽다....
내가 시집 가던날.
우리 엄마는 나를 차마 웃으며 보내지 못했다.
결혼식도 못한 결혼. 모은돈 모두 엄마 두손에 쥐어주고.
눈물이 쏟아질것 같은 마음 삼키며 그렇게 이곳으로 시집왔다.
내 나이 그때 22살.
빌어먹을 팔자에. 세상어디 찾아봐도 이런 남자 없을꺼라며 자신있게 시집 왔다.
물론. 지금도 우리 신랑은 나에게 날개 없는 천사다.
혼수 하나 없이 우리 시어머니가 쓰던 20년이 훌쩍 넘은 전기제품 쓰면서도.
신혼의 부푼꿈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몰랐다.
시어머니가 뇌출혈 환자여서 수술할 적에 집안에 십원 한장 없어.
신랑의 적금을 깨고 그것도 모자라 군인 대출 받을 적에.
시아버지가 만성 알콜증후군. 쉽게 말해 알콜 중독으로 나에게 욕을 할적에.
시집보낸 시누이의 혼수 빚이 시어머니 카드빚이라고 할 적에.
갚아야 할 돈이 3천만원이 넘는다고 할적에.
난.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해주는 신랑을 뒤로 하고 옷가지 하나 없이 집을 나왔다.
단돈 7천원 들고 집을 나왔다.
갈곳이 없어.
엄마의 눈물 보고 싶지 않아 역주변을 배회 하고 있을때.
술이 쩔어 나를 알아보고 욕하는 시아버지를 만났을때.
끝이라고 생각했다.
끝이라고 말했다.
당신을 만난게 내 최대 실수라고.
너 같은거 보기도 싫다고.
내 인생 니가 망쳐놨다고 악을 쓸때.
덩치는 곰같은 사람이 내 앞에서 무릅 꿇고 미안하다고 빌던 내 신랑.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작아져.
사랑하지만 보내주겠다고. 자기가 성공하면 다시 시작하자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내 짐을 직접 싸주던 내 신랑.
난. 그날로 나쁜 며느리. 나쁜 마누라가 되었다.
평생을 설것이 통에 손담갔던 우리 엄마 호강도 시켜주고 싶었고.
시어머니의 그 비싼 수술비 내가 다 댔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고.
술에 쩔어 사는 시아버지 알콜중독 내가 완치하였노라고 큰소리도 치고 싶었고.
우리 시누 내손으로 시집 보냈다고 자랑도 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신랑. 제일 불쌍한 우리 신랑 마누라 잘만났다는 소리도 듣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카드를 짤라서 불사질러 버리고.
다달이 얼마씩 카드값 상환하겠다고 은행가서 빌었다.
그리고 술에 쩔어 사시는 시아버지를 정신병원에 입원 시켰다.
신랑 적금 몽땅 깨서 탈탈 털어 대출받았던 금액을 싹 정리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여우같은 년이 시집와서 시어머니 잡는다고..
멀쩡한 시아버지 정신병원에 쳐 넣고 잘 산다고..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싸가지도 없다고..
눈감고 귀닫고 입닫았다.
내 신랑 그때 23살. 육군 하사.
차떼고 포떼고 받는 월급 90여만원.
별다른 재주 없던 나는 조그만 회사의 경리.
세금 떼고 받는 월금 90만원.
둘이 합쳐봐야 180만원.
아버님 병원비 한달에 55만원.
어머님 카드값 상환비 50만원.
적금 30만원.
이렇게 남은돈 45만원으로 생활했다.
45만원. 정말 돈도 아니더라....
둘이 휴대폰비 10만원 나오고.
수도세 전기세 관리비 합치니 또 10만원 나오고.
25만원으로 살았다. 가끔 설, 추석에 나오는 보너스 모아놨다 적자 나는달에 꺼내 쓰고..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거다.
내 생애 가장 비참했다.
쌀이 없어서 염치없이 친구네 가서 쌀 얻어 오고..
반찬 없어서 한달 내내 쉬어빠진 김치에 밥 먹은적도 있었다.
그나마 그건 나은 날이고..
쌀이 아까워 나는 다이어트 한답시고 굶고 신랑은 부대에서 저녁까지 먹고 왔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
내가 가장 힘들었던 날은 우리 신랑 생일이였다.
간만에 사치 하며 미역국에 소고기넣고 끓여줄라고 있는돈 탈탈 털어 시장 봐왔는데.
그날 가스가 똑 떨어졌다. 우리집은 도시가스가 아니라서 가스통을 갈아야 하는데.
정말 통장에도 돈이 없었고 가진돈도 없었다.
그 당시에 세정거장 거리에 회사직원이 자취를 했었는데.
냄비를 들고 가서 미역국을 회사직원집에서 끓이고 다시 세정거장을 그 뜨거운 냄비를 들고.
행여 식을까봐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집에 온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난 미역국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1년정도를 살다가 운 좋게 시집 식구들이 도와줘서 카드빛과 대출금을 갚았다.
결혼생활 1년이 조금 넘어 신랑이 중사로 진급하고 나도 회사를 옴겨 생활이 좋아졌다.
결혼생활 1년동안 누가 쓴지도 모르는.. 부대에서 쓰던 싱글침대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침대를 샀다.
침대 가격에 5만원을 더 주고 뺏다시피 가져온 화장대도 있었다.
내가 제일 행복했던 날이다.
처음 그 침대에 누워 잠을 잘때 혹시나 침대가 다칠까봐-_- 조심 조심 자고 했던 기억..
혹시나 화장대가 다칠까봐-_- 서랍 조차 잘 열지도 못했다.
몰랐다. 남자 지갑에 단돈 1천원이 없으면 안된다는거.
나 만큼 우리 신랑도 엄청 힘들다는거..
결혼 생활 3년동안 회식 한번 가지 않고 사는거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나도 쓰고 싶은거 못쓰니까.
옷 한벌 살수 없으니까.
친구 한번 맘 편히 만날수 없고. 생일 조차 챙길수 없다는거.
나도 그러니까. 우리 신랑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6개월 전쯤인가.
오빠 군복이 더러워 빨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동전이 떨어졌다.
동전을 받아 들고 신랑을 한번 쳐다보는데 내 손에 있는 동전을 가져가며 저금통에 넣는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부대에 있는데 행보관님이 나보고 커피 한잔 뽑아오라고 하는거야.
돈이 백원도 없는데.
근데 차마 돈 없다는 말이 안나와서 지폐밖에 없다고 하니까.
동전으로 바꿔준대잖아.. 돈 없는데.
그래서 지갑을 깜박 하고 안가져왔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오늘 증명 사진 낼대 지갑에서 꺼냈지 않냐고.
자기한테 커피사주는게 그렇게 아깝냐고 하데.
그래서 솔직히 말했어. 사실은 돈이 없다고.
행보관님이 잘 알잖아. 우리 사정.
암말 안하시다 천원 주시면서 그러더라.
천원 줄테니까 일주일동안 커피 원없이 뽑아 먹으라고...
우리 부대 커피가 150원이잖아. 그래서 남은돈 저금통에 넣을려고 가져왔어.
나 커피 별로 안좋아하잖아....'
주저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냥 막 눈물이 나왔다.
너무 속이 상해서 엉엉 울었다.
20만원씩 부었던 적금을 만기 3달 남기고 깨버렸다.
그리고 그 주에 그렇게 갖고 싶어 마트만 가면 눈을 떼지 못하던 플스도 사줬다.
게임시디도 무려 5장이나 같이 사줬다.
겨울 파카 하나 없는 신랑의 6만 9천원짜리 오리털 잠바도 하나 사줬다.
거지같은 컴퓨터도 버리고 할부 6개월 끊어서 100만원짜리 컴퓨터도 새로 사줬다.
20만원씩 부었던 적금도 만기 3달 남기고 깨버렸다.
그리고 그날밤 처음으로 소갈비를 먹었다. 1인분에 3만 2천원이나 하는 소갈비를.
그리고 용돈도 5만원 줬다.
신용카드도 건내주면서 쓰고싶은거 쓰라고.
우리 이제 돈 많다고.. 우리 더이상 가난하지 않다고....
우리 신랑이 2월 20날 두달짜리 파견을 나갔다.
어제 퇴근하고 집에 오니 상자 하나가 있었다.
페이스샾이라고 적혀있던 화장품 상자..
스킨.로션.콤팩트.립글로즈.립스틱.마스카라.메이컵베이스.화운데이션....
기초화장부터 색조화장품까지 하나 빠지지 않고....
눈물이 나서 멈추질 않았다.
한참을 울고 전화 하니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결혼하고 나서 화장한번 안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매일 자기네집 때문에 고생해서 늙으면 쭈굴탱이 될까봐.
화장 안하면 이제 안이뻐할꺼라고 하면서...
괜히 심통부리면서 이거 내 피부에 안맞는거라고 짜증을 냈다.
신랑이 그런다.
페이스샾에 젤로 비싼데 아니냐고..
다른곳은 화장품 집에 종합으로 파는데. 거기는 따로 매장이 있다고.
옷집 처럼. 신발 가게처럼. 보세 화장품이 아니라 메이커 화장품 아니냐고..
세상에 이런 천치 바보가 또 있을까....
세상에 이런 바보 천치가 있을까...
어젠 너무 울어 화장을 할수가 없어.
오늘 이 늦은밤에 화장을 했다.
이 글을 마치고 화장한 내 모습을 찍어 신랑에게 보낼것이다...
오늘.
난 내 생에 가장 이쁜 얼굴로 사진을 찍어서 내 사람에게 보낼것이다...
오빠.. 너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너무 고마워...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