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역사적사실을 올바르게알아야 올바른 평가를 내릴수있겠지요...
[한겨레] 긴급조치를 위반해 처벌받은 사람들은 절반 가량이 자영업자, 회사원, 농부 등 ‘평범한’ 국민이었다. 이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려다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폭압적 유신헌법의 ‘아들’로 태어난 긴급조치는 결국 박정희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장치였음을 수많은 재판 사례들이 보여준다.
말 한마디 했다가 10년 징역=직업이 없던 정아무개씨는 1974년 1월 동네 이웃들에게 “삼선개헌과 긴급조치 등은 다 새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현 정권이 무너지는 징조로 보인다”며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 군대 가면 중동전쟁에 나가서 죽는다”고 말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붙잡혀간 정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7년형이 확정됐다. ‘유언비어 날조’ 혐의였다.
긴급조치 항의 ‘모의’ 10년형
이아무개씨 등 한양대생 3명은 74년 4월 긴급조치에 항의해 중간시험 거부를 ‘모의’하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체포됐는데, 이들도 징역 10년 등을 선고받았다. 농민 박아무개씨도 그해 5월 이웃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으로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됐다”고 말했다가 끌려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모두 요즘 같으면 죄도 되지 않을 사건들이다.
믿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탤런트 신아무개씨는 국방부 제작영화 <새마을 새물결>에 육군 사병으로 출연하던 중 동료들과 잡담하다 “(박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이 영화배우와 ‘썸씽’이 있다”고 말했다가 유언비어 날조·유포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충남대생 이아무개씨는 “서울·대전 등 대학가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있고, 학생에 대한 감시가 시작됐고, 긴급조치 때문에 말도 못하고 산다”는 사실을 애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가 당국의 검열에 걸려 처벌받았다.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당시엔 빈번했다.
막힌 언로, 넘치는 유언비어=언론은 물론 사회적 언로가 워낙 통제되다 보니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이를 입으로 옮기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처벌받는 사태도 빚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 등을 지낸 실세 김종필씨 등이 김아무개, 윤아무개, 정아무개씨 등 당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나 탤런트와 성적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애인한테 쓴 편지까지 검열
한 고등학교 윤리교사는 79년 3월 수업 중에 “박 대통령과 각부 장관들이 연예인들과 스캔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기소됐으나, 그해 12월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면소 처분을 받았다.
‘바른말’ 교사들도 잇단 감옥행=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던 최아무개 교사는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은 장기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제도로 간접선거를 하는 것은 나쁜 제도”라고 말했다가 징역 8개월을 살았다.
또다른 최아무개 교사는 “박 정권은 독재다. 기업주들이 노무자들을 혹사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을 때 전태일이 분신 자살한 후 대우 개선을 해주었다. 정부에서 비료값을 60%나 올려 농민들은 살기가 더 힘들다”고 학생들에게 말했다는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스캔들·바른말도 쇠고랑
‘막걸리 보안법’ 사건이 주류=74~75년 긴급조치 초반에는 학생과 재야운동가들이 연루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대형 조작사건들이 중심을 이뤘으나, 그 뒤에는 일반인들이 박 전 대통령이나 체제를 비판하다 걸려드는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 부류의 사건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 1978년부터 다시 학생운동권이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각종 학내집회를 열고 모임을 결성하다 긴급조치 적용을 받는 경향성이 강해졌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에 피의자로 등장하는 이는 모두 1140명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윤보선 전 대통령, 김지하 시인 등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이들 말고는 대부분이 이름없는 ‘민초’들이다. 전종휘 기자
[email protected] 긴급조치란=긴급조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을 영구화하는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근거로 내려진 초법적 규제장치이다. 집회·결사·언론·출판 등 국민의 기본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했고, 국회 등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등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1974년 1월 내려진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고, 같은해 4월 내려진 4호는 주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75년 5월 발령된 9호 역시 유신헌법의 개·폐 논의와 관련한 어떠한 자유도 허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