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1.깨우쳐 보여 줌. 2. <종교> 사람의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神)이 가르쳐 알게 함. 으로 정의되어 있다. 2번 정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 종교관이 깊숙하게 연관된 정의라 보여진다. <신> 중심의 사고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입장에 서 있는 나는 1번 정의로 <계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깨우쳐 보여줌.이라는 의미는 그 주체가 이미 <나> 아닌 것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대체 그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10살 때 실제로 겪은 체험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내가 10살 때 학교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주말에 교회에 나갈 것을 강권하곤 하셨다. 선생님의 뜻에 순응, 호응하던 초반과 달리 나는 어느 시점 부터 선생님의 이러한 지시 및 명령에 반항하거나 저항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나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는 식의 미신적 배타적 신앙관과 독선과 아집의 실체를 체험하게 되어 기독교의 진실에 눈을 뜬 나는 더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특정한 세계관만을 진리로 밀어붙이는 교회의 강압적 전도 및 교육 방식에 더는 물러설 곳 없이 질려버릴 대로 질려버린 까닭에 더는 교회에 다닐 이유가 내게는 단 하나도 없게 되었던 거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 마다 선생님과 이 문제로 얼굴을 붉히게 되었다. 선생님과의 불화와 갈등은 내게 밤마다 끔찍한 악몽을 불러왔고, 나는 거의 매일 밤 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을 꾸거나 밑도 끝도 없이 탈출구 없는 미로 속을 무한히 방황하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선생님은 학급에서 권력자였고 부모님께서는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셨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나는 탈출구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점점 정신이 쇠약해져만 갔기에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몹시도 괴롭게 되었다. 나는 매일 밤 끝없이 펼쳐지는 악몽을 꾸기가 정말 너무나도 끔찍하게 싫었다. 잠을 자는 자체가 너무도 끔찍했기에 나는 늘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자연히 불면에 시달려야만 했고, 이는 몸과 마음에 더 큰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가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과도한 스트레스의 지속은 내가 걸음을 걷는 데 종종 장애를 일으켰고 위장병, 불면증, 식욕 저하 등을 내 삶에 선물했다. 또 몸과 마음의 면역력 저하는 임파선 질환 등도 불러왔다. 심신의 온갖 질환에 시달리게 된 나는 그 당시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설득해 겨우 외숙모님과 함께 인근 내과병원에 갔는데 당시 내과전문의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얘, 꾀병이에요. 아무 이상도 아무 문제도 없어요."라고 말함으로써 내가 기존의 지식, 정보, 권위, 전문가 등에 대한 일체를 의심케 하는데 결정적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원인과 과정을 거쳐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의혹과 혼돈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바로 이 순간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무지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다음과 같은 것을 뼈저리게 자각케 되었다.
"아~ 선생님도 정말 모르시는구나."
"아~ 부모님께서도 정말 모르시는 구나."
"아~ 전문의 선생님도 정말 모르시는구나."
이것을 좀 뭔가 있어보이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흔히 무지를 자각했다. 무지를 알라.고 할 때의 무지란, 절대적 무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무지의 자각이란 인간 앎의 상대적 한계 인정이니 이는 곧 상대적 무지의 받아들임과 같다.>
나와 삶 사이에서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그 무엇이 빚어졌고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에 관한 온갖 의혹, 혼돈, 의문에 휩싸일 수 밖에는 없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세계는 각기 크고 선이 굵은 원을 형성하고 있었고, 나의 세계는 그저 희미하고 작고 연약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부모님 그 어느 쪽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헛되이 외롭고 고독하게 겉돌고 있었다. 선생님과 부모님만 모르는 세계와 나는 이미 조우했고, 나는 선생님으로 부터도 부모님 으로 부터도 이해받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였기에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 나는 생존하기 위해 길을 모색할 수 밖에는 없었다.
즉, 나는 10살에 <기독교인들만 모르는 세계>, <전문가들만 모르는 세계>, <부모님들만 모르는 세계> 등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게 되었던 거다. 그리고 이 일은 나와 우주, 나와 삶, 나와 이 시대 등 그 무엇과 그 무엇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보면 이 <무엇과 무엇 사이>가 바로 <계시>의 진정한 주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진리를 깨닫고 법칙과 원리 등을 발견하는 주체는 <나>이나 깨우쳐 보여주는 주체는 바로 <나와 우주 사이, 나와 삶 사이, 나와 이 시대 사이> 등으로 표현되는 <그 무엇과 무엇 사이>다.
이것을 보편적으로 표현하면 <나와 우주 사이>, <나와 삼라만상 사이> 등 <그 무엇>과 <나> 사이에서 <계시>가 발생하고, 그 깨닫는 주체는 <나>이며 그 내용은 주체인 <나>가 쌓아온 지식, 정보, 지혜, 경험 등의 축적물의 총합과 <우주 내지 삼라만상, 그 시대 및 그 역사와 문명>이 만나 빚어지는 그 무엇이 된다. 그 무엇인 알멩이는 그때 그때 달라질 수 있고, 동일한 내용이더라도 해석자인 <나> 내지 사람에 따라서 그 얼마든지 해석이나 평가 등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도올 선생이 숭산 선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선교 개척의 초창기는 이미 지난 시점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융성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한 것이었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들은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들의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내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어느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내 기억으로 그 여학생의 이름은 베키라 했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통틀어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가히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면서 베키는 나보고 자기가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싼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한국의 학인이 쑹싼스님을 안 뵙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베키가 아무리 나에게 쑹싼스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어도 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어느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깐 그때 꼭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쑹싼쓰님’의 달마 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의 학·박사들이 수백명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내가 사실 불교계의 인맥을 파악한 것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때만 해도 누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인즉슨 나에겐 다음의 명료한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邪敎)적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달마 토크'의 사기성에 있었다.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엘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도대체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딜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무적인 도사 김용옥도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정도(正道)는 언어(言語) 속에 내재할 뿐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 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 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어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쉬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쉬는 어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달마 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큰스님은 내처 그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왓 이즈 라부(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디스 이즈 라부(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부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이 이상의 언어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 사랑 철학의 도사인 예수도 이 짧은 시간에 이 짧은 몇 마디 속에 이렇게 많은 말을 담기에는 재치가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숭산 큰스님의 비범함을 직감했다. 그의 달마 토크는 이미 언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국경도 초월하고 있었다. 오로지 인간, 그것뿐이었다. -
- 미스코리아를 아내로 둔 괴짜 소설가
쇠젓가락을 던져 나무탁자에 꽂는 기인
꾀죄죄한 인상의 소유자, 상 거렁뱅이의 외모
그에겐
도인이라는 칭호가
스스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언제부터인가 부터 부여되어 그만의 독특함을
형용하는, 진실의 차디찬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을
자신의 방식대로 담아두려는 유일무이의 언어가 되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분야에서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
이 '도인' 또한 문학과 예술을 통해 그 도와 늘 순간 순간 싸워나가고 있다.
일찌기 헤르만 헤세는 '고뇌하는 자'라는 표현에 이 진실에 도전하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고 또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하였거니와, 이 '고뇌하는 자'에 걸맞는 이름 이!외!수! 만약 '도인'이 실재한다면 바로 그와 같지 않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가짜 도인말고 진짜 도인이 존재한다면 - 난 여지껏 진짜 도인을 만난 적이 단 한번도 없음을 솔직히 말하고자 한다.
이곳에 가면 그의 후배들이, 친구들이, 어버이가 남긴 그의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애써 회원가입을 하지 않더라도 그가 걸어온 길을 슬며시 엿볼 수 있는 기회쯤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까닭에 적지 않은 풍파가 있었고 그 시게에 난 엿보는 자로서 관찰하는 자로서 늘 이곳을 기웃거렸다. 그 여파로 회원가입을 통해야 자유게시판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 사이 그 어디를 가나 진실과 소문은 늘 한 몸이 되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도인'이 남긴 글 하나
-진실한 자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고,
눈물이 남아 있는 자에게는 고통을 굳게 껴안을
순수가 남아 있다.
가을.-
대학 진학 후 인근 도서관에서 만난 아직 10대 후반이던 친구는 스스럼없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이외수 씨를 꼽았다. 언젠가 TV에서 나타난 이외수 씨의 모습, 주병진 쇼에 나와서 나무식탁에 쇠젓가락을 던져서 꽂는 모습, 파르르 쇠젓가락의 끝은 무엇이 무서운지 무엇이 그리도 놀라운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몇 년 후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젊은이들의 한바탕 신나는 춤 경연을 바라보며 특유의 꾀죄죄한 모습으로 90년대 후반의 한국을 관통하였던 그.
얼마전 나는 이외수 씨 메일로 내가 쓴 글에 대해 감상평을 부탁드린 일이 있고(그리고 일년 전 한 인터넷 신문 기사 관련해서 취재협조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는 이외수 씨가 장외 인간 출간으로 잠시의 짬 조차도 없던 때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던 내게 상주문하생 이슬이라는 분의 정성스런 답글이 보내졌다.
본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동시 이외수 선생께선 장외인간 출간으로 바빠 좀처럼 여가가 나시지 못하는 형편이라 다른 분께 부탁드림이 좋겠다는 취지의 글이 전부였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는 것이 보통이고 보면 기대한 정확한 답변은 아니였지만 참 따스한 답글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다.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것은 솔직한 표현은 아니지만, 적잖이 위로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