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수 '당신을 기다립니다'
1997년 5월의 어느 날..비내리던 도쿄 국립 경기장에는 5만 8천여 관중석을 꽉 메웠던 울트라 닛폰의 탄식이 들렸었습니다.당시 일본팀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아시아의 신흥강호. 그리고 한국은 이런 일본에게 추격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형국. 이런 상황이 반영된 듯,일본은 전반 초반부터 거칠게 밀어붙혔고,한국은 볼 점유를 불과 30% 내외로 유지하며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경기의 일본팀 플레이메이커가 나카타 히데토시였습니다. 나카타는 그 날 경기가 바로 A메치 데뷔전이었으며,그 경기를 시작으로 앞으로 일본을 이끌 플레이메이커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이 날 경기에서 나카타는 정말 대단했죠.한국 수비를 마음껏 농락하며 찔러주는 칼날패스,혼자 2,3명씩 제끼며 슛팅까지 날리는 유연함.한 마디로 이렇게 전반 30여분까지 일본은 "나카타 효과"로 인해 한국을 일방적으로 밀어부쳤습니다.그러자 벤치에서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표정을 뒤로한 차범근 감독이 나카타보다 딱 1살이 어린 조그만 선수를 투입할 준비를 합니다.머리에 물을 뿌리며 감독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선수..
바로 한국의 22번 고종수 선수였습니다. 전반 32분께 마침내 고종수가 그라운드에 투입됐으며,한국은 그 때부터야 비로소 일본의 공세를 뒤짚으며 공격다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일본 선수들이 특히 놀랐던건,한국에도 이렇게 기술이 좋고,창의적인 패스를 하는 선수가 있었다는 것.고종수는 이 날 게임에서 상대편 나카타를 완전 압도하며 게임을 지배하는데 성공합니다.당시 게임이 끝나자마자 일본의 가모슈 감독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죠.
"한국의 22번 선수가 고종수냐.대단하다.가장 눈에 뛴다.훌륭한 선수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열린 98년 프랑스 월드컵..월드컵에서 한국의 고종수는 137분간 출장하며,세계를 상대로 유일하게 기술력이 통하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당시 멕시코,네덜란드,벨기에의 오른쪽을 심각하게 괴롭히며 마음껏 플레이하던 한국 22번의 플레이를 보며,당시 프랑스 언론은 이런 기사를 씁니다.
"한국의 22번은 한국팀에서 유일한 브라질식 플레이를 하는 선수다."
상대 선수 하나를 제대로 못뚫어 낑낑대던 다른 21명의 한국 선수들과 대조적으로 1,2명은 가볍게 뚫고,창의적인 패스와 대포알 같은 슛팅을 마구 날리는 20살짜리 동양 선수는 당연히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비록 한국팀은 1무 2패로 대회를 마감했지만,고종수는 이 대회를 통해 일본의 나카타와 함께 앞으로 아시아를 이끌어갈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죠.
하지만 바로 이 순간..즉 1998년 가을부터 고종수와 나카타의 운명은 엇갈리고 맙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축구 관계자들에게 고종수와 나카타 중 누가 낫냐고 하면 99% 고종수가 낫다고 했습니다.왜냐하면 나카타는 자신의 노력으로 "감각"을 만드는 선수인 반면,고종수는 타고난 "감각"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더군다나 이미 20살의 나이로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은 선수는 한국은 물론이고,일본에도 없던 바로 그런 시절에 나타난 선수였지 않습니까.그렇니 사람들이 고종수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근데 나카타가 이탈리아 AC페루지아 구단으로 이적하면서 상황은 급반전 됩니다.나카타는 이탈리아에서 급성장하며 단숨에 고종수를 따라잡았고,그 뒤 AS 로마,파르마와 같은 강팀으로 이적하며 세계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합니다.지금은 유럽에서도 A급 플레이메이커 평가를 받는 나카타는 이제 세계적 선수가 되었습니다.그리고 이 나카타를 통해 일본 축구는 완전 업그레이드 됩니다.2001년 당시 일본 감독이던 트루쉐 감독은 일본팀의 전술 자체를 "나카타 시프트"라고 지칭하며 나카타 일인체제로 정비할 것은 천명하죠.이것은 나카타가 일본은 물론이고,세계 축구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선수로 성장했는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간동안 고종수도 꾸준히 대표팀에 들어갔고,소속팀에서도 좋은 시간을 보냈었습니다.하지만 문제는 고종수는 계속해서 아시아 클럽에 머물러 있었으며,2001년 히딩크 사단의 황태자라 불리며 다시 한 번 부활할 때까지도 고종수는 무릎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는 겁니다.결국 고종수는 2003년 겨울,일본 교토 퍼플상가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무적 선수로 전락한 뒤,한 때는 축구를 그만두기까지 하고 맙니다.
과연 둘의 차이는 어디서 나온걸까요.바로 노는 물이 달랐기 때문아닐까요.이탈리아에서 자신보다 한 단계 더 위의 선수들과 부딪치며 그들을 꺾는 법을 배웠던 나카타,그리고 K리그에서 자기보다 한 수 아래의 선수들과 겨루며 축구에 대한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한 고종수.. 둘의 운명을 가른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여기 고종수가 마지막 순간엔 어떤 심정을 느꼈는지 보여주는 좋은 기사가 있습니다.한 번 읽어보시지요.
고종수는 6월 중순 허리부상 치료 중 갑작스레 “축구를 그만두겠다”는 ‘폭탄 발언’을 남기고 팀을 이탈했다. 차감독에 따르면 고종수는 팀을 떠나기 직전 “죽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고종수가 교체멤버와 2군을 오가는 신세로 전락한 현실에 상당히 비관하고 있었다는 것.
이미 20살 때 세계를 상대했던 선수가 26살이 된 현재 J리그 팀에게 퇴출 통보를 받고,현 소속팀에서는 2군을 왔다갔다하는 선수로 전락한 것이 바로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요.고종수는 매우 괴롭습니다.되려 19살 때보다 실력이 더 퇴보한게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면서요.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서 고종수 선수를 위해 한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아직 나카타와의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고. 고종수의 재능과 실력을 저는 믿습니다.고종수는 반드시 부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에서 처음 태어난 "감각있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수가 얼마 전 팀에 복귀해서 다시 재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비록 스페인 FC바르셀로나와의 게임에서 뛰지 않고 벤치를 지켰지만,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히딩크 사단에서도 초창기에는 고종수 선수가 무릎 부상으로 뛰지도 못할 상황이었죠.하지만 그는 엄청난 노력으로 불과 한 달여만에 몸을 정상으로 만들었으며,바로 히딩크 감독의 데뷔전이던 노르웨이전에서 선취골을 넣으며,히딩크 사단의 "황태자"로 등극하게 됩니다.비록 6개월 뒤에 무릎 부상으로 월드컵을 포기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고종수가 뻔히 부상인줄 알았음에도 끝까지 그의 몸상태를 체크하며 복귀를 종용했습니다.그도 역시 고종수의 감각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이미 자신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선수였기에 충분히 믿을 수 있었던 걸까요.저는 이제 이 히딩크 감독이 갖었던 신뢰를 우리가 갖었으면 좋겠습니다.고종수 선수가 우리의 이 신뢰를 발판으로 다시 한 번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종수 화이팅!
출처 : 네이버 yoblueboy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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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