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국민정서 자극하는 홍준표식 국적포기법에 맞서는 용기 인정해야
김수민
임종인이 문희상 유시민보다 정확하다
여기 한 국회의원이 있다. 그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했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역설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범죄자로 놔두는 현행법을 손질하고자 했고, 타투(문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일을 도왔다. 그의 사회경제적 문제의식은 민주노동당 의원에 견줘도 쳐지지 않으며, 현 집권개혁세력이 과거에 잘 들먹거리다 이제 내팽개친 ‘재벌개혁’을 아직도 고집한다. 민주노동당의 대변인이 “정계개편이 일어났을 경우 유일하게 당내의 거센 반대를 받지 않고 입당할 수 있는 의원”이라고 호평한 정치인, 군법무관으로 10년을 근무하고 민변 부회장으로 일했던 그는 2004년 총선에서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임종인이다.
당론을 거스른 소신행보로 조금 알려진 그는 이제껏 크게 각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권핵심은 여권핵심대로 그를 냉대했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그에게 무관심했다. 그가 여당의원이라는 것이 그의 의원직 수행에 이로울 수는 있었겠지만, 그는 차라리 민노당에서 활동하는 것이 나아보일 만큼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특정 정파가 국민적 인기를 잃어가는 시점에는 그 내부에서 가장 소외된 개인의 인기가 높아진다는 법칙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손댄 일들은 수고는 크고 보답은 적은 안건들이었다.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지만, 한국 정부의 파병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소수의견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온 국민이 증오하며, 타투는 당연히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당한다. 임 의원은 재선은커녕 공천-중앙당의 결정이든 개방형 경선이든-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그는 네티즌들로부터의 공격에도 노출되어 있다. 그를 모욕하는 것이 수구성향의 네티즌들만은 아니다. 네티즌 사이에서 세력을 넓힌 ‘친노 및 친여세력’에게도 그는 찬밥 신세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가장 많이 반발했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해찬 현 총리를 비판하는가하면, 작년 말에는 ‘이부영 의장 -천정배 대표’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의 개혁후퇴에 완강히 저항했다.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는 바람에 친노네티즌들이 비밀투표가 보장된 원칙에 아랑곳 않고 응징의 칼을 빼들었을 때에도 그는 유시민 의원과 달리 뇌동하지 않았다.
말해 놓고 나니, 유시민과도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 임종인의 발밑을 더욱 흔들어 놓은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한때 정청래 의원과 가깝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정 의원의 원군격인 ‘국참연’과 갈라섬으로써 그가 기댈 언덕도 마땅치 않은 듯하다. 시련은 그가 의원직에 앉아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임 의원은 재외동포법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끝내 그 법안이 부결되었다.
지난 번 스티브 유씨, 일명 유승준의 입국이 거부되면서 우리는 병역기피자에 대한 현행법이 얼마간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추가조치가 더 필요할 수는 있다. 삼성이나 조중동한테는 입도 벙긋 못하지만 병역기피만큼은 잘근잘근 씹어대고 싶은 국민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홍준표법’은 사납기만 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법 같지도 않은 법이었다. 그 법안을 밀어붙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렇다고 해서’를 연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병역기피를 위한 국적포기를 방조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의 반(反)법률적 성향을 요약한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사회수업시간에 맨날 졸지 않았더라면,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금언을 들어봤을 것이다. ‘열사람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말도 생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홍준표법’은 그 원리를 낯설게 만들고 있다.
기존수구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정형근’이라면, 홍준표는 뉴라이트를 포괄한 신수구세력의 한 이름이다. 악명 높은 공안기술자에서 극우정객을 거쳐 ‘여관 사건’과 그답지 않은 대북지원발언을 통해 정형근이 몰락하고, 공세적으로 대북포용정책을 채택하고 군부독재의 잔악함에 얽힌 원죄도 없으며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진 홍준표가 뜨는 만큼 수구세력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착각하지 말라. 수구세력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홍준표는 거짓말을 유포하고도 특권 뒤에 숨는 데 성공하고, 그도 모자라 선거에서 살아 돌아온 자다. 정계에 입문할 때도 ‘3김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호언을 뒤집고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병역문제와 뒤엉킨 채 정치적 목숨을 부지했던 기존의 한나라당과 달리 홍준표씨는 순항하고 있지만, ‘홍준표법’에 담긴 사고방식은 옛 한나라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얍삽한 국가주의와 정직한 국가주의의 차이? 국가주의는 국가주의다.
홍준표법의 정직한 국가주의는 어느새 홍준표의 손을 떠나 얍삽한 정치를 낳고 있다. 홍준표법에 반대한 의원들은 “취지는 공감하나 허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찬성한 의원들 중 일부도 그렇게 생각하는 기미가 있다. “허점이 있지만 취지가 옳다”는 표현이 그들에게 걸맞을 정도다. 결국 의원들은 가부와 무관하게 ‘동전 던지기’를 한 셈이다. 며칠 전 TV 프로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굴리면, 주화의 모양 때문에, 앞면이 나올 확률이 더 높다’는 내용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찬성이 반대보다 더 많이 나온 이유도 변수, 즉 여론의 향방이 ‘주화의 모양’ 같은 구실을 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반대표를 던질 법한 유시민이 찬성 버튼을 눌렀던 까닭도 짐작할 만하다. 또한, 노회찬과 홍준표가 한편이 되고 임종인과 정형근이 한편이 되는, 이념적 지형과 관계없이 전선이 형성되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진 것도 그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다. 결론적으로, ‘홍준표법’은 선악구도를 형성해 마녀사냥을 벌일 차원의 사건이 절대 아니다.
공공이익에 관해서, ‘가능한 소수가 최대한 작은 손실을 입어야 한다’는 명제가 논리적으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압도하나, ‘홍준표법’은 결코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설명한다. 첫째, 피해자가 생길 가망이 무시되었다, 둘째, 법안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하는 태도가 글렀다. 아무리 선의에 가득차 있고 실질적인 해결책까지 산출할 수 있더라도, 내용이 부실하면 일단 반대부터 하는 것이 옳다.
나는 홍준표법에 반대한 의원들이 다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임종인 의원이 사리사욕으로 반대했다는 억지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 문제는 요컨대 현실적으로는 병역문제다. 임종인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돌보면서도, 예비역 장교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가고 싶은 군대’를 지향해 왔다. 그가 국적포기자들과 관련되었을 리도 없고, 국군 중령으로서 국가에 봉사한 그에게 “너네 아들 군대 빼려고 그러지?”라는 원색적 음해도 뜬금없다.
임종인이 평화와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꿈쩍하지 않던 인간들이 꼬투리를 제대로 잡아 그를 사냥하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그는 역시 ‘탄핵의 역풍’이라는 반사이익을 입어 국회의원이 되었나 보다. 그가 출마한 지역구에 유별나게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유권자가 많지 않은 이상, 그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결격사유가 좋다. 여론의 질타에도 숨지 않고 ‘애국자 홍준표’에게 TV 토론을 제안하는 ‘매국노 임종인’을 존경한다.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드레퓌스가 무죄로 판명날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이 일본사회에 많았다면 한일관계가 이렇게 경색되지도 않고 동북아 정세도 좀 더 나았을 것이다.
지난 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수지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이뤄지지도 않은 오늘에, 나는 ‘다수지배’의 야만과 무지를 실감한다. 그것에 봉사하는 포퓰리스트는 필요 없다. 낙선을 각오하는 당당한 정치인, 여론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식인 하나가 절실하다.
덧글) 제발 '임종인'을 '임종석'으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글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 주제에 목소리만 높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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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도는 별로 없지만, 개인적으로 임종인 의원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무리 國K-1 들이 많다고 해도 그래도 국회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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