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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공황 탈출
[나는 독일의 구세주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이 미국에 닥쳐오고 그 여파가 독일을 습격하자, 독일 경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경제 대공황이 닥친 1929년 이래로 독일의 산업 생산은 42% 줄었고, 주가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공황 이전부터 쇠퇴 기미가 보이던 농업 부문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빚더미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농장을 팔아넘기는 농가가 2배로 늘었다. 또한, 실업자들이 대거 양산되고 있었다. 1932년 말 실업자는 577만여명이었는데, 여기에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실업자들과 임시직을 감안하면 총 875만 4천여명이 직업을 잃거나 간당간당한 상황에 놓였다. 이는 노동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실업자라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이 난국에서 독일을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로 그 '누군가' 로 자처한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독일 수상에 임명한다. 히틀러의 심복들은 대대적인 선전을 벌여 새총리를 환영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지만 사실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 국민의 2/3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에 못마땅해하거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선전만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뭔가 보여줘야 했다.
집권 직후,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나치당을 후원해줬던 지주 세력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그는 나치당의 세력을 불리는 데 공헌한 후겐베르크에게 농업 정책을 일임했다. 후겐베르크는 2월 경에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발표했다.
(1) 부채 농가의 재산을 채권자가 함부로 압류하는 것을 금지함
(2) 수입 관세를 올려 국내 농산물을 보호함
(3) 농업 보조금을 지급함
이에 엘베강 동부의 대농자주들이 주축을 이룬 제국지주연맹은 히틀러에게 감사를 표하며, "영원히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제계는 이런 히틀러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히틀러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던 이들 제조업 기업주들은 히틀러의 친농업 정책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 크루프 제철 기업 대표인 구스타프 크루프는 제계 대표들과 함께 2월 20일에 히틀러를 찾아가서 제계의 입장을 변론하고자 했다.
그러나 크루프는 곧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히틀러가 특유의 독백을 늘어놓은 것이다. 히틀러는 경제 문제는 제대로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사유재산과 기업의 독립성을 존중할 것이며 급진적 경제정책을 시행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대신에, 히틀러는 자신이 줄곡 언급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크루프는 히틀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휙 가버린 것이다. 이후 괴링이 나서서 히틀러의 발언을 요약하고 경제장관인 샤흐트가 헌금을 요청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쩔 수 있겠는가? 제계대표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3백만 마르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3주후에 모두 납부했다.
1933년 3월 23일, 히틀러는 수출 무역을 지원하고 통화 안정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독일기업협회는 새 정부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후 나치당원들의 압력에 굴복한 크루프는 4월 초에 나치에 밀착한 새로운 경제인 단체를 만들고 유대인 종업원을 해고하고 유대인 기업가를 상공업 단체의 요직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에는 유대인 기업들이 배제된 채로 독일기업동지회가 창립되었다. 이제 기업가들은 히틀러에게 복종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해주는 덕분에 이익이 생긴다고 여겼기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 그것보다는 정치가 우선이야!!!]
히틀러는 경제는 부차적이며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일 경제는 다른 나라와의 싸움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봤다. 또한, 경쟁이라는 자유주의 개념은 배제되어야 하며 경제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이지 시장이 아니라고 주장헀다. 히틀러는 계급보다는 인종의 관점에서, 경제 혁신보다는 정복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경제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 새로운 독일 사회는 투쟁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독일 민족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여 노예로 만들어야만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히틀러의 '경제론'이었다.
히틀러는 노동부 공무원들이 짜놓은 고용 창출 계획에 처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경제 장관인 샤흐트가 반신반의하고 제계에서 반감을 보였기 대문이었다. 그러다가 5월 말에 재무부 차관인 프리츠 라인하르트가 이 계획을 밀고 나갔다. 라인하르트는 망설이는 히틀러를 이 사업을 추진하더라도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결국 히틀러는 5월 31일에 총리실로 각료와 경제 전문가를 불러 모아놓고 의견을 들었다. 농업부 장관인 후겐베르크를 제외한 모두가 찬성하자, 그제서야 히틀러는 라인하르트의 손을 들어줬다.
히틀러가 시행하기로 결정한 고용 창출 계획은 이미 이전의 바이마르 정부에서 짜놓은 것을 확대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그 계획의 목적은 경제 부흥에 있지 않았다. 히틀러는 고용 창출 계획을 어디까지나 재무장 정책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으며 정부의 정책 홍보에도 이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래도 히틀러는 간접적이나마 경제 회복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정치 구조의 틀을 바꾸어서 기업 활동을 보장하고 나라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심어준 것이다.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를 박살냈고, 노사 관계의 틀을 주도적으로 바꾸었으며, 고용 창출 사업을 뒷바침했고, 처음부터 재무장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할 때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던 경기가 더욱 빠른 속도로 살아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이러한 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로 자동차 산업의 부흥과 관련한 히틀러의 역할을 들 수 있다. 2월 11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 대신에 베를린의 카이저담에서 열린 국제자동차오토바이전시회 개막 연설을 가졌다. 히틀러는 자동차 산업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산업이 될 것이라면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면세 범위를 넓힐 것이며 도로 건설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히틀러는 종래에는 철도 길이의 총량으로 생활 수준을 쟀지만 앞으로는 도로의 총거리가 기준이 될 것이라며 도로 건설 산업은 독일 경제를 건설하는 중차대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자동차 산업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자동차 산업의 앞날이 밝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지원책을 내놓지 않았다. 1933년 봄에 세금 감면이 이뤄줬지만 이는 자동차 산업만이 아니라 경기 부양을 위해 산업 전반에 도입된 정책이었다. 도로를 어떻게 짓겠다는 계획도 히틀러에겐 없었다. 뮌헨의 도로 전문가 프리츠 토트가 5~6천km에 달하는 자동차 도로를 건설하는 안을 제시하자, 히틀러는 이를 수락했다. 또한 토트는 남북을 관통하는 991km 길이의 도로를 뚫자는 안을 제시했고, 히틀러는 이 또한 수락했다. 이것을 나치 선전가들이 "지도자의 선견지명" 이라고 미화한 것이다.
그래도 자동차 업주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을 후원해준다고 믿고 활기를 되찾았다. 그 효과로, 히틀러가 연설을 하고 몇주도 지나지 않아 자동차 산업이 살아나는 조짐이 뚜렷이 보였다. 1933년 2/4분기의 자동차 생산량이 전년도 같은 분기보다 2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자동차 산업의 부흥에 부품 산업과 철강산업이 덩달아 살아났다. 자동차 업주들은 신이 나서 히틀러에게 계속 고속도로 건설안들을 제시했고 히틀러는 흔쾌히 이를 승낙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결코 체계적인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일 경제를 살린 것이 아니다. 그저 공산주의를 짓눌르고 기업가들을 독려해서 활기를 얻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통한 경제 부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2. 경제 위기
히틀러의 독려로 기세가 등등해진 기업가들은 왕성한 투자를 벌이며 실업자들을 대거 고용했고, 덕분에 독일의 실업률은 뚝 떨어졌다. 하지만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1935년 9월 4일 히틀러에게 올라간 물가와 임금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일주일에 18제국마르크도 못벌었다.(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미치는 금액이다!) 또한, 1935년경 통계에 따르면 학령기 자녀가 있는 5인 가족들은 가장이 벌어오는 25제국 마르크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생계가 고달팠다던 바르마르 공화국 시절의 노동자들은 이보다는 더 많이 벌었다. 이에 비해, 식료품비는 8%가까이 증가했고 생활비는 5.4% 증가했다. 일부 식품은 대개 33%~50% 정도로 올랐는데, 심지어는 150%까지 뛰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히틀러의 지나친 재무장 정책 추진과 대규모 토목공사 강행으로, 독일 정부는 만성적인 외환 부족에 시달렸다. 이에 경제부 장관 샤흐트는 1934년 9월 부터 <신계획>을 실행했는데, 그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수입 품목별로 할당을 하여 외환을 엄격하게 관리할 것
(2) 남유럽 동유럽 국가들과 쌍무 조약을 맺어 수출을 늘릴 것
(3) 외상으로 원자재를 들여온 다음 완제품을 만들어 갚아나갈 것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너무 재무장에만 몰두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는 마르크화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거부하고 무기 증강과 고가 수입품에 많은 돈을 썻다. 이렇게 정부 수반이 돈을 펑펑 써대니 외화가 남아돌리 있겠나? 얼마 뒤에는 무기 산업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원료나 소비자 물가 억제를 위해 필요한 외국 농산물들을 돈이 없어서 수입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계다가 1934년에 흉년이 닥쳐요는 바람에 사료가 크게 부족해서 사육 가축 숫자가 떨어졌고 식량이 모자라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그런데다 비효율, 관료주의 폐해가 겹치면서 경제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4년 11월에 제국농업동지회의 지도자인 발터 다레는 <생산투쟁>을 기획했다.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자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기획은 관료들의 잘못된 개입과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35년 가을에는 굳기름도 달걀도 모두 바닥이 났다. 그런데도 히틀러는 산업 설비, 특히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사들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가게에서는 식품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대도시에서는 식품을 사려고 줄을 서는 것이 고달픈 일상사가 되었다. 굳기름, 버터, 달걀, 고기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국민들은 이를 구입하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뤄야 했다. 농민들은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바람에 생필품 값은 더더욱 뛰었고, 노동자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실업률은 다시 증가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버터 판매를 지켜 서서 감시해야 할 정도였다.
1936년 1월경,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식품비는 계속 폭등했다. (냉동육의 경우 가격이 70% 증가했다.) 그나마도 물건이 없어서 못 살 지경이었다. 이때문에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베를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정부와 당에 악감정을 품은 시민의 비율이 절반을 훨씬 넘은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일부 국민들은 군부에서 들고 일어나 정부를 싹 쓸어버리고 힘 있는 지도자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히틀러에게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젠 히틀러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로워진 것이다. 여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이 여론이 심상치 않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하자, 히틀러는 분노를 터트렸다.
그래도 히틀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1934년 11월 경에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르델러를 물가통제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봉책일 뿐,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재무장 정책을 미루고 생필품 구입에 중점을 두며 시장 경제로 돌아가 수출에 역점을 두는 것이었다. 괴르델러 등이 이를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못마땅하게 여기며 재무장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국 주위의 압력에 굴복하여 샤흐트에게 1240만 제국 마르크를 주며 마가린 원료를 사는 데 쓰라고 당부했다.
히틀러는 국민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성을 느꼇다. 그는 국제 상황을 살펴보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가 되어버린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히틀러는 1936년 3월 2일에 소규모 부대를 라인란트에 파견하고, 같은 날 의회에서 라인란트에 주권을 행사할 것을 선언했다. 국민들은 히틀러의 결단에 찬사를 보냈고, 경제 위기 문제는 묻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프랑스가 라인란트에 주둔하는 독일군을 격퇴하려고 병력을 파견했다면, 히틀러는 어떻게 했을까? 히틀러는 이렇게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벤트에 넘어간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다시 신뢰한다. 그리고 히틀러에겐 다행히도 1936년 경 무렵 풍년이 들어 식료품 위기 사태가 잠잠해졌다. 히틀러는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다시 재무장 정책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는 독일 경제에 파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3. 재무장 우선주의
1936년 9월,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개년 계획을 공표한다. 이로써 재무장 정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동안 생필품 수입과 군사비 지출을 양립하는 정책을 폈던 나치 정권이지만, 이러한 정책은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는 짧은시간 동안에 국내 자원을 최대한 빨리 긁어모아서 정면 승부에 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이유로, 4개년 계획은 팽창과 전쟁대비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이무렵, 히틀러는 비망록을 써서 괴링과 블롬베르크에게 전달했다. 비망록은 2부로 되어 있었다. 1부는 당대의 정세를 다루었는데, 그 내용은 이념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2부는 독일의 경제상황을 다루었다. 우선 1부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또한, 히틀러는 독일 군대를 모든 방면에서 최강의 군대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이를 행하지 못하면 독일은 진다는 것이다. 한편, 비망록 2부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이러한 경제 계획으로 경제 문제는 당분간 해소되겠지만 결국은 생존 공간을 확대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논조로 볼 때, 히틀러는 어느 시점에 가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와같이, 히틀러의 경제개념은 언제나 이념이라는 당위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 히틀러는 군수산업에 대폭적인 지원을 해주자는 괴링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시장경제 복귀론을 주장하는 경제부장관 샤흐트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물가통제부장관 괴르델러는 자급 경제 계획을 부정하고 군비 예산을 깎아 국세 시장으로 다시 가자고 했다가 괴링의 호된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제는 누구도 히틀러의 재무장 우선론에 반대하지 못했다. 괴링은 히틀러의 재무장 우선론을 적극 지지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이를 틈타 특별감독관이라는 직책을 각 부처 곳곳에 만들었다. 특별감독관은 괴링의 관료 조직과 손발을 맞추면서 4개년 계획을 감독했는데, 지휘체계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경제부와 업무 영역에서 여러번 충돌하곤 했다. 이때문에 경제부처와 행정 부처의 지휘체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문제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관료체계를 깊이 혐오하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던 히틀러는 관료제가 왜 필요한지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각 부처의 모든 결정권은 자신이 가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니 정부조직이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다. 관리들은 어떤 사안이 있으면 상급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바로 히틀러에게 보고했으며, 히틀러가 없으면 그의 최측근들에게 매달렸다. 또한, 히틀러는 군사, 외교 문제에만 깊숙히 관여했고 나머지 일들은 그저 추인하기만 할 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직도 생필품이 모자란다고 보고할 때마다 히틀러는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하라며 제껴버리곤 했다.
이렇게 정부체계가 엉망이 되니, 자연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정부의 간섭이 줄어들자 각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나치 관구장들은 제세상을 만난듯 재물에 눈독을 들였다. 이젠 부패가 만연했고, 국민들은 나치당원들과 관구장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겐 비판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동안 히틀러가 이룩한 업적이 워낙 강렬했기에, '사소한 불만' 가지고 그를 비판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이 워낙 많았던 것이다. 한 예로,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구장들의 만행은 지도자꼐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도자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당장에 해결하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히틀러 자신이 측근들의 재산 축적을 방관했으니까 말이다. 히틀러는 독일 곳곳에 만연한 부패를 관망하기만 할 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관구장들이 유태인들로부터 재산을 수탈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4개년 계획은 괴링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 계획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데 초점을 둔다.
(2) 농업을 조정하고 물가를 통제한다.
(3) 외환 관리에 신중을 기한다.
(4)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며, 가능한 모든 재원을 절약한다.
이러한 4개년 계획은 겉으로 보면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아 보인다. 실업률은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하락했고, 철강 생산량은 167% 증가했다. 또한 독일군 규모는 이제 프랑스에 비견될 정도였고 무기 생산량도 급증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은 나치정권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4. 붕괴 직전에 몰린 경제
4개년 계획은 독일의 팽창을 필요로 했다. 독일의 모든 권력 조직은 전쟁에 기대더라도 자꾸만 팽창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팽창의 논리는 사회 전반에 만연했고, 독일 경제에 엄청난 압박이 이어졌다. 그결과, 1938년 말부터 독일 경제는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영토 확장!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히틀러 자신도 재무장 우선정책으로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타국의 노동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 슬로바키아를 강점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풍부한 자원과 체코의 공업지대를 확보하였기에, 독일 경제는 어느정도 숨통이 트였다. 일자리가 많이 생겼고, 숙련공도 늘어났다. 기존의 공장을 무기 공장으로 증축하는 사업도 활기를 띄였다. 오스트리아의 철광석과 주데텐란트의 고품질 갈탄은 합성연료를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확실히 1938~1939년초 경의 영토 확장은 독일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과열된 무기 주도 경제에 쌓인 긴장이 폭발점에 이르지 않게 하려면 더욱 팽창할 수 밖에 없었다. 4개년 계획은 전쟁에서 이겨서 유럽을 부려먹는다는 암묵적 전제 아래 굴러갔다. 계다가 1938년 말에 불경기가 닥쳐오면서 영토의 팽창은 필수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괴벨스는 1938년 12월 경에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규모 재무장 사업을 펼친 덕분에 독일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소비재 생산이 이를 뒷받침해주질 못했고 물가는 상승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히틀러는 가격 통제령을 내리고 이를 어길 경우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억누를 수는 없었다. 1939년 1월 초, 독일 중앙은행 이사회는 8명이 서명한 의견서를 히틀러 앞으로 보냈다. 인플레이션 위험을 피해기 위해 재정 억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분노를 터트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만 문제인 것도 아니었다. 군수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수많은 무기들이 양성되자, 이를 소비하려는 욕구가 늘어났다. 더군다나 무기 공장에 들어가는 원자재 수요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이를 뒷받침하다보니 종국엔 국가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다. 1939년경 당시 국가 부채는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인 1933년에 비해 무려 3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히틀러 자신도 이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 1939년 1분기의 국반군 예산을 줄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군은 이를 유야무야했고, 히틀러 자신도 그일에 대해 더 거론하지 않았다.
차라리 재무장을 미루고 재정을 복구하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수출에 중점을 둬서 국제 경제로 복귀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군부 등은 그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봤다.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노동력 부족도 발목을 잡았다. 1937년 이후로 농업과 제조업에서 노동력 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1933~1938년 사이에 벌이가 좋은 제조업에서 일하려고 농촌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농업 노동자의 수가 16% 감소했다. 당국에서 아무리 이를 억눌러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를 기계화로 대체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얼마 안되는 외화를 가지고 대포, 전차, 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물자를 사들이는 바람에 정작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것을 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량은 떨어질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쏟아졌고, 이로인해 국내 식량이 부족해지자 해외에서 식량을 사들여야 했다. 농촌의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주부들, 히틀러 유겐트, 어린 소녀들까지 끌여들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제조업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이 아니었다. 1938년 즈음이면 모든 분야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왔고 자연히 중요한 무기 공장에서도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빛어졌다. 또한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길이 막혀버리게 되자, 재벌들은 이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혹독한 삶에 쌓인 불만을 토로했고, 개중에는 생명을 잃는 이들이 늘어났다. 1939년 1월경, 루르 탄광지대에서 3만명의 광부들이 모자라 석탄 채굴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무렵 독일에서 부족한 노동력은 어림잡아 백만명에 달한다.
이렇게, 4개년 계획을 통한 무리한 재무장 정책은 독일 경제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실업자가 자취를 감추고 철강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기 생산이 급증하는 것까진 좋은데, 노동력 부족, 외화 부족, 그리고 물가 상승 조짐 등의 악순환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히틀러는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무리한 재무장 정책을 중단하고 독일 경제를 정상 상태로 되돌릴 것인가, 아니면 팽창을 지속하여 해외의 노동력과 자원 확보에 힘을 기울일 것인가?
[나는 포기를 모른다. 끊임없는 전진만이 있을 뿐!!!]
히틀러는 후자를 택했고, 이는 비극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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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개루 역사짱님의 글, 독일경제를 살린 히틀러? 5부작중 1, 2편을 퍼왔습니다.
요약
군수산업에 돈을 펑펑 쓰니까 일자리가 늘어남
근데 군수산업은 돈이 되는 산업이 아니라 국가 부채가 3배로 늘어버림.
돈이 없으니 원자재도, 식량도 수입할수 없어 물가가 천양지차로 뛰어버림.
거기다 군수산업에만 투자하다 보니 다른 산업에서 노동력 부족으로 생산량 감소
결국 히틀러는 정권을 내려놓고 물러나느냐, 아니면 전쟁이라는 도박에 명운을 거느냐,
이 2가지 선택지밖에 없었고, 후자를 선택함.
간혹 보다보면 어째서인지 히틀러가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시켰다... 라는 말들이 많아서 역사짱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히틀러는 쓸데없는 군수산업에 돈을 몰아넣어 생산량은 증가하지 않는데, 실업률을 줄이고 화폐를 유통시켜 잠깐동안 경제개발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이딴 돈지랄로 나라를 부흥시킬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나, 넓게 봐줘야 당시 대영제국 정도밖에 없었죠.
(근데 요새는 뉴딜정책도 비판받는 추세라면서요?)
돈이 없던 독일은 이런식으로 나가다간, 부채로 파산할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고, 히틀러가 가장 먼저 한 짓이 다른나라들의 연방은행에서 금괴들을 가져다가 독일로 옮긴 일이었죠.
[출처] 독일경제를 살린 히틀러? (2) (『역개루』대한민국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역사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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