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인디언 연설문 중 가장 유명한
시애틀 추장의 이 연설은
1854년 수콰미쉬족과 두와미쉬족 원주민들을 강요된 보호구역 안으로 밀어넣기 위해
백인 관리 아이삭 스티븐스가 시애틀의 퓨젓사운드에 도착했을 때 행해진 것이다.
시애틀 추장의 원래 이름은 시앨트이며 두와미쉬 족 어머니와 수콰미쉬 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콜럼버스이후 3백년이 지나
유럽인들이 미국 서부의 퓨젓 사운드에 도착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 후 70년이라는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그가 태어난 풍요로운 문화가 꽃피어나던 장소가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한
눈물어린 호소이자 자신이 살던 땅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한 진심어린 태도가 보이는 연설문입니다 ]
<아메리카 인디언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저 하늘은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에 자비의 눈물을 뿌려 왔다
우리에게 영원하리라 여겨지던 것들도 이제는 변하려 하고 있다.
오늘은 맑은 하늘이지만, 내일은 구름으로 뒤덮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별들과 같으리라.
나 추장 시애틀이 하는 말은 믿어도 좋다.
우리의 얼굴 흰 형제(백인:그들의 관습에 따라 타 부족도 형제라 불렀다)들이 계절의 돌아옴을 의심하지 않듯이.
워싱턴의 얼굴 흰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정의 인사와 안부를 전해 왔다.
무척 친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은 아울러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아무 불편없이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덧 붙였다.
실로 자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서 존경받을 아무런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제안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이제 넓은 땅이 필요없을 테니까.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가 조개들 널린 바닥을 뒤덮듯 우리 부족이 모든 대지를 뒤덮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전에 떠나갔고, 우리의 위대했던 부족들도 잊혀져 갔다.
우리가 다 사라진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라.
얼굴 흰 형제들이 이 대지를 다 차지한다 해도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우리 희망을 갖자.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과 얼굴 흰 형제들 사이의 적대감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기를.
서로를 적대시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만 할 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젊은 전사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복수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미 자식들을 잃은 우리 늙은이들은 잘 알고 있다.
싸움을 통해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듯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액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핀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우리는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땅을 손에 넣기 위해 한 밤중에 찿아온 낯선 자다.
대지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는 대지를 정복한 다음 그곳으로 이주한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그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것임을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공기이며,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도 그 공기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그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다 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은 조상들의 육신과 같은 것이라고.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당신들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지에게 가해지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가해진다.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당신들의 신은 우리의 신이 아니다.
당신들의 신은 당신들만을 사랑하고 우리는 미워한다.
정말로 우리가 그의 자식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 위대한 정령(인디언들이 믿고자 하는 대지와 하늘 우주의 영혼을 일컫는 말)
조차도 우리를 버리고 떠난 듯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신은 그의 얼굴 붉은 자식들을 사랑하지도 보호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고아나 다를 바 없으며, 어디를 둘러봐도 도움받을 곳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옛 시절의 번영과 위대함을 가져다 줄 것인가?
밤과 낮은 한 집에 살 수 없다.
얼굴 붉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아침 태양에 새벽 안개가 달아나듯
얼굴 흰 사람들이 다가오면 뒤로 달아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제안이 공정한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나의 부족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당신들이 제공하는 인디언 보호구역 안으로 물러날 것이다.
그곳에서 얼굴 흰 대추장의 명령을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자연의 목소리라 여기며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 어둠은 한 밤중에 바다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처럼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남아있는 날들을 어디서 보내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도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단 한 개의 밝은 별도 지평선에 걸려 있지 않다.
슬픈 목소리를 한 바람만이 멀리서 울부짖고 있다.
냉정한 복수의 여신이 얼굴 붉은 사람들의 오솔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든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파괴자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상처 입은 사슴이 사냥꾼의 발자국 소리로 듣는 것 처럼.
몇번의 달이 더 기울고 몇 차례의 겨울을 더 넘기고 나면,
한 때 이 드넓은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살던
힘 센 부족의 아들들은 모두 무덤 속으로 걸어들어갈 것이다.
한때는 당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희망이 넘쳐있던 부족의 아들들이.
하지만 우리가 왜 불평할 것인가?
내가 왜 내 부족의 운명에 대해 슬퍼 할 것인가?
사람은 왔다가 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한 차례의 눈물, 한 번의 타마나무스, 한 번의 이별 노래와 더불어
그들은 그리워하는 우리의 눈에서 영원히 떠나간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다.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들의 부족이 쓰러질 날이 지금으로선 아득히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 질 지 모르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얼굴 흰 사람들이라 해도 인간의 공통된 운명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곧 알게 되리라.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이며 결정이 나는 대로 알려주겠다
하지만, 우리의 땅을 당신들에게 팔더라도
우리가 언제나 자유롭게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즐거운 삶을 누렸던,
지금은 이름조차 잊혀진 흩어진 전사들과 그리운 어머니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은 아직도 이곳의 장엄한 침묵을 사랑한다.
설령 최후의 얼굴 붉은 사람이 사라져
우리 부족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하나의 전설로 남을지라도
이 해안은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대지 위에 자기 혼자라고 할 만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과 도시의 거리들이 밤이 되어 고요해지면 당신들은 황량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사랑하는 우리 부족의 숨결이 모든 곳에 가득하다.
얼굴 흰 사람들은 결코 고독하지 않으리라.
죽는 자라고 해서 아무런 힘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사라져 가는 우리 부족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내가 죽는자' 라고 말했던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뿐이다.
“신은 진정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황금은 여기 우리의 발치에 널려 있어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미군 소령의 말이 당시 백인들의 신념을 대변한다.
땅을 빼앗기 위해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명백한 운명/명백한 사명/팽창의 천명)이란,
제임스 매디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민주공화당, 특히 매파(주전파, Warhawks)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즉,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의 미국 팽창기에 유행한 이론으로,
미합중국은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이는 팽창주의와 영토 약탈을 합리화하였다.-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신의(기독교신) 뜻에 따라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도 서류에 백인 식으로 서명을 했다.
백인들이 땅 값으로 건넨 것은 인디언들이 신기해하는 ‘구슬 몇 개’가 전부였다.
그 후 30년간 인디언들의 씨를 말릴 때까지, 백인들은 계속 거짓말로 땅을 차지했고,
꾸준히 백인의 말을 믿었던 인디언들은 결국 멸족당한다.
1970년대 초에 디 브라운은 한 신문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인디언들이 얼마나 많은 백인들을 거듭 되풀이해 믿었던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신뢰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라도 인간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