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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
요약설명
신라시대의 왕릉.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높이 8.7m, 지름 36.3m. 흙을 쌓아 올린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봉분의 아래쪽에 자연석의 둘레돌이 있고 드문드문 돌레돌의 일부가 봉분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영경사 서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왕릉 동쪽에 남아 있는 비석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무덤임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주인이 명확하게 확인된 것으로 정식 묘호가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기도 하다.
무열왕은 진골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후 삼국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별주부전에서 지혜를 얻은 김춘추”김춘추는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러 고구려로 들어갔다.
당시 고구려의 왕은 보장왕이었으며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김춘추를 맞이한 고구려 보장왕은 백제의 간책으로 인해 김춘추를 의심해 옥에 가두고 옛 고구려 땅인 죽령 이북을 주면 지원병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고심하던 차에 김춘추는 보장왕의 측근 중 한명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어 계책을 물으니 선도해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답으로 전해주었다.
“거북이는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꾀어 용궁에 데려갔지만 막상 용궁에 도착하여 간을 꺼내려 하자 토끼는 간을 집에 두고 왔으니 집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속인 후 달아났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신라로 돌아가 왕에게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후 신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상세설명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라무열왕릉 → 경주 무열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요약설명
통일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다.
바닷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수중릉으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아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시신을 육지에서 화장한 후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장례를 치렀으며, 바위 안에는 수로를 만들어 바닷물이 통하게 하였다.
“문무왕이 내린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신문왕(문무왕의 아들)은 동해에 작은 산이 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점을 치도록 하였는데,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풀이가 나왔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바다를 자세히 살피게 하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정오에 행차에 나섰다.
순간,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 이어졌다.
날씨가 가라앉은 후 왕이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내리는 보물입니다”
왕이 대나무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까닭을 묻자 용이 대답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것입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작은 산과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 피리를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며, 병이 낫고, 적병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세상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상세설명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문무대왕릉 →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경상북도 경주시 신평동 보문단지 내에 있는, '신라'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이다2007년 3월 30일에 문을 열었다.
'신라'라는 주제로 꾸민 복합 체험형 역사 테마파크로, 크게 6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상·수상 무대를 갖춘 1,500석 규모의 주공연장과 8세기 4대 도시(콘스탄티노플·바그다드·장안·경주)의 상징물로 꾸민 공간, 장보고공연장·석빙고·비말지·족욕장 등이 있다.
그리고 신라 유물을 모티브로 꾸민 놀이 공간, 신라 건축물을 복원하여 조성한 신라마을, 화랑 무예 훈련을 재현하는 화랑공연장이 있다.
숙박 시설로 전통 양식의 호텔인 라궁(羅宮)이 있는데, '라궁'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궁궐'이라는 뜻이다.
요약설명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신라시대의 절이다.
눌지왕(?~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바람으로 불국사가 창건되었다고도 전한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크게 확장하였으며, 임진왜란때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으나 왜란 직후부터 200여 년에 걸쳐 40여 차례의 공사를 통해 복원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도 수리공사가 있었으나 다보탑의 사리장치가 없어지고 공사기록을 남기지 않는 등, 일제에 의한 불국사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광복 후에 석가탑의 해체, 복원 등 부분적인 보수작업이 이뤄졌고, 그 후 불국사복원위원회가 구성돼 1973년 6월에 보수를 끝낸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가람배치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있는 구역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으로 만들어낸 사찰로서,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불국사의 역사”<삼국유사> 권5 <대성효2세부모> 편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대성은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대성 사후, 공사는 신라 왕실에 의해 계속되었고 착공부터 완공까지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창건 당시 불국사는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 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국사는 고난을 겪게 된다. 승군의 활약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왜군이 이에 대한 복수로 사찰에 대한 파괴와 방화를 자행했는데,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593년 5월, 천년을 지켜온 2000여칸에 이르는 대가람이 전소되고 만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의 지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기 시작했고, 순조 5년(1805)에 이르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상세설명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요약설명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으며, 신라 경덕왕 10년(751)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하면서 왕명에 따라 창건했다고 한다.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으로 만든 석굴로,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천장은 돔 모양의 둥근 양식으로 그 위에 연꽃무늬 원판을 두었다.
전실과 굴 입구 좌우의 벽에는 팔부신장, 인왕, 사천왕 등의 입상을 조각하였다.
굴 가운데에는 높이 3.48m의 본존불을 안치하였고 그 둘레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를 배열하고 본존불 바로 뒤에는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천장 주위에 있는 10개의 감실 안에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우아한 솜씨가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 한국불교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삼국유사>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의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경주의 모량리에 가난한 늙은 아낙이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성과 같다고 해서 ‘대성’이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다. 대성은 ‘복안’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여 밭을 조금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하루는 ‘점개’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청하자 복안은 베 50필을 선뜻 시주했다.
“누구든지 정성껏 보시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를 얻고 안락장수할 것입니다”라는 점개스님의 말을 들은 대성은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이렇게 말하며 졸랐다.
“제가 스님의 축원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생에 닦은 선이 없어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니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 더욱 고통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품을 팔아서 얻은 밭을 시주하여 뒷날의 과보를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맞는 말이라며 밭을 점개스님에게 보시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대성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은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깜짝 놀란 김문량이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과연 대성이라는 아이가 죽었으며, 하늘에서 말소리가 들리던 그날 김문량의 아내는 아기를 잉태하였고 열 달 후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더니 7일이 지난 후에야 손을 폈는데 ‘대성’이라고 새긴 금패가 나왔다.
이 아이가 모량리 대성의 환생이라고 확신한 김문량은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고 짓고 모량리의 대성의 어머니를 맞아들여 함께 살았다. 훗날 김대성은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상세설명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요약설명
신라 왕궁의 별궁터로, 안압지의 서쪽에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은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섬과 산을 만들어 아름답고 진귀한 화초와 짐승들을 길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 임해전과 부속건물 등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경순왕 5년(931)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1974년부터 3년에 걸쳐 임해전과 안압지의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연못바닥에서는 신라왕족과 귀족이 사용했던 유물과 불교미술품 1만5천여 점이 발견되어 신라상류층의 문화와 불교문화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안압지의 다른 이름”안압지의 신라시대 이름은 ‘월지’였다.
임해전의 이름도 ‘월지궁’으로 신라왕궁인 반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월지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안압지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폐허가 된 왕궁터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드는 모습을 본 묵객(墨客)들이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상세설명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요약설명
조선시대 반촌(유교중심마을)이다.
월성 손씨, 여강 이씨 양대 가문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훌륭한 재상들과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 아래 오백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대규모 고택과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있다.
양동마을 내에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은 모두 15가옥인데 가장 오랜 집은 서백당(書百堂)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반가의 배열 법도가 지켜져 있다.
전통 마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2010년에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외손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는 양동마을”경북지방 고문서집성에 의하면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가 된 풍덕 류씨 류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이어서 양민공 손소공이 540여 년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실제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상세설명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에는 '월성양동마을(月城良洞마을)'이었으나, "경주(慶州)"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명칭임에 반해 "월성(月城)"은 한 때의 행정편의에 따라 한시적으로 쓰였던 행정구역 명칭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명칭을 변경(2009. 2.16)하였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요약설명
신라시대의 고분. 황남동 대릉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의 능이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6대손이며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
높이 12.4m, 지름 56.7m. 돌을 먼저 쌓은 후 그 위를 흙으로 덮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을 제외하고 둘레돌이나 기타 석물 장식이 없는 소박한 무덤으로 현재는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미추왕과 대나무군사”<삼국사기> 유례이사금 조에 미추왕릉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유례 이사금 14년에 이웃의 이서고국이 신라를 쳐들어 왔는데 당시 신라는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홀연히 어디에선가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원정군이 이서고국의 병사들을 모두 물리치고는 싸움이 끝나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갑작스런 등장과 사라짐에 놀란 신라군이 그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는데, 미추왕릉에 이르러 그 주변에 대나무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죽은 미추왕이 신라를 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신라사람들은 미추왕릉을 ‘죽현릉’이라도 부르게 되었다.
상세설명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신라미추왕릉 → 경주 미추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요약설명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이다.
정확한 건립년도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30㎝ 두께의 돌 362개를 27단으로 쌓아 올린 술병 모양의 형태이며, 한가운데에는 네모난 창이 뚫려 있고, 맨 위에는 2단의 정자석을 올려놓았다.
이 정자석 위에 혼천의와 같은 관측기구를 설치하고 별을 통해 동지·하지·춘분·추분 등의 24절기를 측정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첨성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까?”첨성대는 천문현상을 관측하던 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첨성대에는 문이 없고 맨 위의 관측 장소가 비좁기 때문에 천문대로는 유용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제천의식을 하기 위한 제단이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 천문현상이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기록의 양도 그 이전의 같은 기간보다 5배 가까이 많아진 점, 첨성대의 모습이 조선의 천문대였던 관천대와 흡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천문 관측대로 추정하고 있다.
상세설명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요약설명
통일신라시대에 역대 왕들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경애왕이 이곳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벌이다가 기습해온 견훤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돌로 된 수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원래는 남산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돌거북이 있었고, 그 입으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인공의 기술이 조화롭게 합쳐진 곳으로, 신라의 궁원기술과 당시 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포석정에서 어무상심무를 춘 헌강왕”<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해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기 때문에, 왕은 그 모습을 따라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산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고 하여 ‘어무산신(御舞山神)’ 또는 ‘어무상심(御舞祥審)’, ‘상심무(祥審舞)’라 불렀으며, 이후 신라의 춤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상세설명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다음문화유산, 브래태니커 백과사전, 두산백과
BGM출처
www.narciss.co.kr
곡명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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