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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1920~194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낸다. 아래 큰 따옴표에 인용한 말은 키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간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이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다.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어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인 절제미를 보여준다.”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이곳은 모란봉ㆍ을밀대ㆍ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하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다.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인 동묘를 말하는데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색깔이 더 다양하다.”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당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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