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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readers_15224
    작성자 : 니트로
    추천 : 2
    조회수 : 547
    IP : 192.12.***.208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4/08/28 13:01:11
    http://todayhumor.com/?readers_15224 모바일
    정진행 - 어느 견습 요리사의 모험담 (프롤로그)
    애들러는 토끼 한마리를 앞에 두고 고심중이었다.

    아직 햇살이 좀 남아있기는 하지만, 한적한 숲길인지라 조금만 지나면 어두워질 것은 뻔한 일.

    산에서 밤을 새기 전에 불을 피워야 했고, 불을 피우자니 지금 앞에 놓인 토끼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를 먼저 결정해야 했다.

    '역시 맛이 있기로는 양념을 발라 진흙에 싸서 통구이를 하는 것이 낫겠지만... 이른 봄의 싸늘한 밤바람을 이기기엔 토끼탕을 끓여 국물을 마시며 속을 덥히는 것도 좋은데...'

    훤칠한 청년이 금발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것이 고작 조그만 토끼 한마리의 조리법이라는 사실은 웃음을 자아낼 만도 하건만, 당사자는 인생 최대의 기로에 놓인 것 마냥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짧지 않은 망설임을 끝내게 만든 것은 애들러의 결단이 아니라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사람 그림자였다. 먹을 입이 늘어나면 아무래도 물을 부어 양을 늘린 요리가 좋은 법. 부싯돌을 이용해서 불을 피우고, 삼각대를 세워 솥을 걸고 물을 붓자 희미하게 보이던 사람 그림자는 어느 새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와 이제 대여섯 살 쯤 되었을까 싶은 사내아이 하나.

    인상 좋은 중년 사내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산 속에서 밤을 맞아야 할 것 같구려. 불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마침 요깃거리를 준비중이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한술 뜨시지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잘 되었군요.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김가 성을 쓰는 홍천이라 합니다. 아들놈과 함께 건넛마을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지요."

    "저는 애들러 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가는 길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애들러라고 하면 이쪽 이름은 아닌 듯 한데..."

    "예, 원래 출신은 밀로아 왕국입니다. 지금은 부족한 재주를 갈고 닦기 위해 정진행 중이지요."

    "허! 대산맥 너머에서 이곳까지 정진행을? 자질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애들러가 토끼 고기에 칼집을 넣고, 된장과 양념을 풀고 무를 썰어 넣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있던 꼬마가 어른들의 대화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정진행이 뭔가요?"

    "윤아, 대륙 곳곳에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식당들이 많단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진정 뛰어난 음식점들은 요리사의 역량을 길러주기 위해 108 정진행이라고 불리는 여행을 떠나보내지. 넓은 지역을 여행하며 여러가지 경험을 쌓아서 더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이웃 식당에 보내 형식적으로 요리를 하고 돌아오는 요식행위로 변질되었다고 들었건만... 저 먼 밀로아 왕국에서 여기까지 정진행을 올 정도라면 그 솜씨가 범상치 않을 것은 분명한 일. 오늘 우리 부자의 입이 호강을 하게 생겼구나."

    "초면에 너무 금칠을 해주시니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미숙한지라 정진행을 시작한지 벌써 삼 년이 흘렀건만 이제야 겨우 삼분지 이를 마쳤을 뿐인걸요."

    애들러는 겸역쩍게 웃으며 슬슬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토끼탕에 미나리를 올리고 뚜껑을 덮었다.

    "원래대로라면 고기를 미리 양념에 재워둬야 하고, 채소도 여러가지를 넣어야 하는데 여행중인지라 준비가 부족한 탓에 괜히 입맛만 버리시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나마 토끼가 육질이 괜찮은 것이 고기 맛은 있을 터이니 혹여 성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너무 타박은 마시길."

    "삼년 간 육,칠십회의 정진행이라면 그 배움이 깊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참 기대가 되는군요."

    삶은 무, 미나리, 잘 익은 토끼 고기와 된장 국물이 가득 담긴 나무 주발이 건네졌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답게 정신없이 한 그릇을 해치운 윤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거 정말 맛있어요!"

    "어허, 윤아. 사내가 어째서 그리 경거망동이냐? 물론 이 청년이 만든 요리는 흔히 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만... 원래 산에서 잡은 토끼고기는 풀냄새가 심하게 나서 요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토끼탕은 잡내 대신 향긋한 나물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쫄깃하고 담백한 고기 본연의 맛을 살렸으니 참으로 훌륭하다. 이 정도라면 성도의 큰 식당을 책임지는 숙수라 할지라도 만들기 쉽지 않겠구나."

    애들러는 쏟아지는 칭찬에 멋쩍은 미소를 띄며 부자의 빈 그릇에 토끼탕을 계속 채워주었다.

    "미나리와 토끼가 맛이 좋은 덕분이지요. 산의 정기가 맑은 덕에 좋은 재료의 맛이 잘 우러난 듯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재료가 좋다 한들, 그 도리를 깨우치지 않으면 이런 맛은 나오기 힘들지요. 따로 겉돌기 쉬운 고기와 나물의 맛을 약간의 양념만으로 한데 어우러지게 만든 솜씨는 가히 일품입니다. 이거, 이렇게 좋은 음식을 보니 반주가 따르지 않을 수 없군요."

    홍천이 봇짐에서 호리병과 술잔을 꺼내자 윤이 볼을 부풀리며 불평을 했다.

    "안그래도 아버지께서 주막에 들르시는 바람에 이렇게 산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또 약주를 하십니까."

    "그래도 그 덕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대접받지 않았느냐? 자, 한잔 받으시지요."

    권커니잣거니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한담을 나누는 사이, 꼬마는 배가 부른지 어느 새 식식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그러면 앞으로의 정진행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일단은 이 산길을 따라 주욱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듣기로는 산 아래 마을에 귀족이 한 명 살고 있다던데,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니 뭔가 배울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산 아래에 남작이 다스리는 조그만 도시가 하나 있긴 합니다. 그런데... 남작은 워낙 미식가로 소문 난 분이긴 합니다만, 요즘 그 집안에 흉한 일이 있어서 외인의 출입이 가능할런지는 모르겠군요."

    "흉한 일이라니요?"

    "그 집 영애가 얼마 전 나들이를 나갔다가 호환을 당했지 뭡니까. 가마꾼 둘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딸만 겨우 돌아왔는데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있다더군요."

    "..."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애들러가 홍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이렇게 말씀드려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산군께서 하신 일입니까?"

    김홍천은 잠시 놀라는 듯 하다가 미소를 띄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나? 요리사가 알아차릴 정도로 내 공부가 얕지 않을텐데..."

    "산군의 둔갑술이야 제가 알아 낼 도리가 없지요. 다만 정진행을 하며 몇가지 잡기를 배운 적이 있는데, 산군께서 오시니 저 나무 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귀신이 날아와 앉더군요. 창귀라고 하던가요? 미루어 짐작했을 뿐입니다."

    "허. 이 친구, 담력 하나는 알아줘야 겠군. 창귀를 봤다면 내가 사람 잡아먹은 호랑이라는 것도 알텐데 어찌 그리 태연한가?"

    "산의 정기가 맑으니 산군께서 함부로 인명을 해치지 않을 것이고, 어린 범을 인솔하고 계시니 무도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거라 짐작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홍천이 재주를 넘자, 토끼탕의 구수한 냄새가 남아있던 자리에 난데없이 노린내가 훅 하고 풍기며 사방이 밝아졌다.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털을 가진 집채만한 백호 한마리가 애들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네 요리를 맛보며 느낀 거네만, 담대하면서도 성정이 곧은 인물이니 믿어도 좋겠지. 자네 말대로 그 일은 내가 저질렀네."

    보통 사람이라면 화등잔만한 눈에서 노란 빛을 내뿜으며 '내가 사람을 잡아 먹었노라'라고 말하는 호랑이를 본다면 그대로 기절이라도 하려건만, 애들러는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재차 물을 뿐이었다.

    "나름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남작가의 처자가 나들이를 나가기 전에 가마꾼 두 놈이 작당하는 것이 들리더군. 주인을 간살하고 패물과 비단옷을 훔쳐서 달아나자고 말일세. 내 아무리 도를 닦으며 인세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해도, 산중에서 그런 무도한 일이 벌어지려는데 참을 수야 없지 않겠나. 저 창귀 놈들이 바로 그 가마꾼들일세. 다만 문제는, 그 처자가 나를 보고 너무 놀라는 바람에 혼이 달아났다는 거지만. 목숨을 구해주려다 해를 끼친 셈이 되어버렸으니 이를 어찌할까 고민 중이었다네."

    "그러셨군요. 비록 인명을 해하였지만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신 일이니 하늘도 너그러이 용서하실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하지만 업보는 업보. 특히 그 처녀를 그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혼자서는 둔갑술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식놈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말인데..."

    백호는 자신의 몸을 핥더니 빛나는 털뭉치를 한 웅큼 뱉으며 말을 이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내 대신 심부름을 좀 해주어야 겠네. 이 털과 내가 일러주는 약재를 조합해서 약을 만들어 먹이면 정신이 다시 돌아올게야."

    "예, 꼭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생색내는 것 같기는 하네만, 남작의 씀씀이가 좀스럽지는 않으니 딸이 정신을 차리면 섭섭치 않게 보상을 할걸세. 오래간만에 맛있는 요리를 맛보게 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하게."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산군께서 관리하시는 산이니 응당 집 주인께 대접해 드려야지요."

    "허허. 그런가? 그럼 슬슬 잠을 자 두도록 하게. 내가 있으니 불침번을 설 필요는 없네."

    호랑이의 기운이 추위를 막아 준 덕인지 애들러는 얇은 침구 한 장으로 만든 잠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햇살에 눈을 뜨자 백호와 남자아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혹여 꿈은 아닌가 싶었으나 애들러의 품 속에 든 하얀 털뭉치와, 나무 밑둥에 호랑이가 발톱으로 긁어 남긴 약재 이름은 어제 있었던 일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호랑이에게 대접한 토끼탕이라... 예순 여덟번째 정진행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애들러는 품 속에서 책자를 꺼내 자신이 겪은 일을 적어넣고 다시 행장을 꾸렸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보이는 남작의 성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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