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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 아이의 이야기의 끝은 그렇지 못했다.
다분히 그 아이가 동화속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라는 핑계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그 아이의 운명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닐까라고 위안을 해보지만 그것도 위안이 되지는 못한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이의 마지막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처럼.
어느덧 석달이 지났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는 그 아이가 차지하던 공간 따위는 이미 다른 것들로 메워진지 오래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일듯 말듯 차츰 사라져가는 그 아이의 흔적.
그 흔적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2012년 3월 3일 모두가 깊은 잠에든 이 밤. 자그마한 랜턴에 의지해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용서로 펜을 든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그 아이가 다른 동기들과 야전으로 전입을 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선임들과의 축구를 끝마치고 계단을 오르는 길이었다. 그 아이의 이상행동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단순히 수비수로 한시강 가량 서있었을 뿐인데 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에 알수 있었다.
그 아이의 표정과 행동, 말투 그리고 심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살위험예측군, 천둥에 대한 트라우마,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 수차례의 자살시도 경험.
그 아이의 신인성검사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아니, 심각한 최악의 수준이었다.
지금 당장 조치가 필요한 사항이었지만 중대의 간부들은 대수롭지 않은 부적응자 정도로 생각했는지 그저 야전교범대로
소위 말하는 FM대로 일처리를 진행하였다.
사단의 상담사를 부르고, 중대간부와 상담을 하고, 멘토를 지정해 같이 동행하게끔 하는 이 조치는 어찌보면 상당히 노련한 대처였을지 모른다.
간부들과 사람들은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그 아이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이 아니었다.
관심병사라는 오명과 멘토라는 명분으로 지나치다 싶은 간섭을 벗어던지고 그저 한 명의 병사로 보아주는 것. 그것을 원했다.
나는 이따금씩 그 아이와 경계근무를 서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도 그 아이와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K 일병님"
"왜"
"전 K 일병님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도 평범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 생각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었기에 그저 관심과 사랑으로 그 아이를 돌보아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배워온 그 아이에 대한 책무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이는 점점 혼자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두 달 가까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온 그 아이는 누가보아도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였고 단지 약간 소극적인 아이로만 보일 뿐이었다. 아, 그것이 가장 큰 착각이 아니었을까.
2011년 12월 03일. 나는 의정부 신흥대학에서 부사관필기시험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 아이가 다니던 대학교였다. 나는 오랜만에 느껴본 캠퍼스의 향기를 이리저리 자랑하고 다녔지만 차마 그 아이의 앞에서는 말하지 못했다.
혹여 대학교때 받은 상처중 하나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종일 뭘 했냐는 물음에 그 아이는 내게
충성클럽(PX)에 가자며 다가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나 귀찮았다. 통합막사와 비교적 거리가 있는 충성클럽까지 간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 아이가 내게 하던 마지막 부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의 구조요청이었음을.
"야! K 그 자식 사라졌어."
다음날이었다. 정오를 약간 넘긴 12시 40분경. 그 아이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별 대수롭게 생각치 않았지만 오분이 지나고 십분이 지나자
알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뒤늦은 불안감에 그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화장실 문 아래로 이상한 것이 보인다는 L상병의 말을 들었다.
신발? 아니, 틀림없이 발이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었고 옆칸의 변기를 밟고 굳게 잠긴 그 칸을 넘겨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었다. 그 아이의 목에는 녹색빛의 로프가 감기어 있었다. 부랴부랴 의무대로 후송이 되었고 잠시후 연락이 왔다. 혹여 하는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비보였다.
그날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아무도 이 현실을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그 아이가
죽었던 살았던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날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존재라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자살로. 게다가 그 사람은 불과 한 두시간 전만 해도 자신과 동거동락하던 전우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자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소대가 다르지 않냐면서 TV를 보며 과자를 먹으며 웃고 떠들기도 하고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으로 모든 자율활동이 통제가 되자 씻지못하고 쉬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며 그 아이의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무서운 존재구나. 어찌 이리도 매정할 수 있을까.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느끼게 되었다.
중대간부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 아이가 복용하던 약에 대한 관리 미흡, 무관심. 그것을 알고 있는 몇몇 병사들에게
서로 피해볼 것 없지 않냐며 입단속을 당부했고 진실을 왜곡할 것을 압박을 주었다. 아니 협박에 가까웠다.
나는 헌병대 조사에서 수많은 사실들을 왜곡했다. 군인이었기 때문이고 당시에는 내 나라를 지키고자 부사관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남은 군생활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두렵다. 그저 노트에 이렇게 펜으로 적어내려갈뿐이다.
언젠간 이 글을 널리 알리리라. 그리고 언젠간 그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가 무릎꿇고 사죄하리라. 그렇게 다짐한다.
난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 아이의 자살을 방관하였고, 지키지 못했다.. 나는 살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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