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 style="color:#111111;font-size:16px;font-family:Batang;"><span style="font-size:12pt;"><br></span></span> <div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702/1486318206f4a7682782604175ba18d38a4bad38a4__mn740247__w460__h774__f86257__Ym201702.jpg" width="460" height="774" alt="심학도.jpg" style="border:none;" filesize="86257"></div><br><br><font face="바탕" size="3">마음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있으므로 공부도 두 갈래다. 한편으로 ‘위태로운 인심’을 제어하고, 또 한편 ‘은미한 도심’을 키워 나간다. 전자를 ‘인욕을 막는 (人欲)’, 후자를 ‘천리를 보존하는 길(存天理)’이라고 부른다. <br style="color:#111111;"><br><br style="color:#111111;"><b style="color:#111111;">1. 제어의 길</b><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심학도’의 아래 그림에서 오른쪽 라인이 ‘제어’의 길이다. 그 길에 놓인 디딤돌을 보자.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를 경계하고, 극복(克復)-사적 충동을 억제하며, 심재(心在)-마음을 굳건히 지키고, 구방심(求放心)-집 나간 마음을 찾아오며, 정심(正心)-정동의 편견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훈련을 거쳐 도착하는 종착지에는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맹자가 마흔에 도달했다는 그 경지, 외적 유혹과 강제에 흔들리지 않고, 내적 수동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이 영혼의 아파테이아(apatheia)는 스토아의 황제와 노예 철학자가 꿈꾼 곳이기도 하다.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맹자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칼끝을 피하지 않는 어느 무사의 용기를 적어 두었다. 노예 철학자는 다리를 비트는 주인에게 “그러시면 제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릅니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고, 결국 다리는 부러졌다. “거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더 비틀면 부러질 거라고 했잖아요.”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b style="color:#111111;">2. 함양(涵養)의 길 </b><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그럼에도 이 지독한 평정은 다만 길의 절반일 뿐이다. 공자는 억압과 차단이 ‘휴매니티(仁)’의 끈을 놓칠 때 인간을 목 조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유학은 스파르타를 기리지 않고 묵자에 편입되지 않았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심학도’의 왼쪽 라인을 보자. 그것은 인심의 발호에 눌리고 가려진 본심[道心]을 발양하는 훈련이다. 그 길에 놓인 돌다리들은 다음과 같다. 계구(戒懼)-두려운 마음으로 자기 속을 살피고, 조존(操存)-미약한 내면의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보존하며, 심사(心思)-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며, 양심(養心)-그 마음을 키워 대지를 적시고 들판을 태우도록 하며, 진심(盡心)-마음의 본래 지식과 힘을 충분히 발휘한다. </span><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이 훈련들이 유학이 목표하는 지점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공자가 나이 일흔에 얻었다는 대자유의 경지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과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여기 자유란 말은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는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내 안의 빛과 힘을 의도나 계산 없이 최고도로 발현하는 것, 『중용』이 ‘생각하지 않아도 길이 보이고(不思而得), 애쓰지 않아도 몸이 길을 따르는(不勉而中)’ 이곳이 유학의 이상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말하는 노자처럼 주자학도 인간의 길의 최종 목적지가 내 몸의 자연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b style="color:#111111;">3. 측은지심, 공감과 소통의 힘 </b><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자기 안의 ‘자연’이 궁금한 사람이 많겠다. 여러 갈래인데, 핵심은 ‘공감’과 ‘소통’이다. 맹자가 예시한 사단(四端) 가운데 맨 처음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그것이다. 남의 고통에 아프고, 기쁠 때 웃어주는 공감(sympathy)의 능력은 냉담과 이기에 마비되고, 단편화와 물신주의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유학의 프로젝트는 이 ‘소외’의 극복, 그것 하나를 겨냥한 설계와 전략 매뉴얼이다.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없으면 가까이는 가정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회적 공간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없다. 역시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연속되어 있다. 현대 리더십의 요체 또한 이 근처에 있으니 유학은 현대의 경영에도 근본적이고 풍부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b style="color:#111111;">4. 논리와 실효 사이 </b><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이 그림은 주자 심학(心學)의 기본 설계를 축약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부 구성은 논란거리였다. 퇴계가 이 그림을 ‘성학십도’ 안에 채택하자 젊은 율곡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퇴계 68세, 율곡 33세였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율곡은 항목들의 배치를 하나하나 문제 삼았다. 예를 들면 1)위 그림의 대인심(大人心)은 성숙의 최고봉인 점에서 기본 조건을 말하는 본심이나 양심·적자심과 한자리에 놓일 수 없고 2)또 아래 구방심은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데, 그림에는 중간쯤, 그것도 극복의 아래에 배치된 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복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줄임말로 공자가 안연에게 전한 공부의 요체이니 단계나 비중으로 보아 ‘집 나간 마음을 챙기라’는 구방심 앞에 놓일 군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퇴계는 그림의 항목들이 인과적 연관이나 단계적 진전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뗐다. 그것들은 바둑판처럼 그저 ‘나열되고’ 배치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체계와 연관은 부실해도 각각의 항목은 실제 ‘공부’를 통해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걸로 족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퇴계는 논리적 연관이나 이론적 정합성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양명학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심경』을 채택했고, 아무리 번잡해도 제자들이 함부로 편집에 손대지 말게 했다. ‘심학도’의 항목들 또한 좀 느슨해도 그대로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span><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엉성한 ‘심학도’를 내버리자는 율곡을 향해 퇴계는 따끔한 충고를 던졌다. </span><br style="color:#111111;"><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늘 보니 선배들의 글에서 틀린 곳을 붙들고 비난과 배척을 일삼더라. 상대방이 도무지 입도 다시 떼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는데, 그 병폐를 고쳐야 공부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span><br style="color:#111111;"><span style="color:#111111;">어떨까. 논리적 일관성과 잘 짜인 체계가 철학의 중심인가. 아니면 공부에 굳이 논리와 체계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가.</span></font>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갚게나, 소홀히 말고.(Phaedo, 1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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