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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12에서의 조조)
조조는 건원 원년(196),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자기 정권 수립에 명분을 얻고 통일과 집권적 통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조조는 이와 함께 인재 등용에 있어서 현실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력주의를 기본 방침으로 내세웠습니다.
삼국지 위본기 무제기
건안 15년 봄 (210) - '현재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어진 인재를 급히 구할시기이다. (중략) 만약에 청렴한 선비를 기다렸다가 등용한다면, 제(濟)의 환공(桓公)이 어떻게 천하를 제패했겠는가? (중략) 너희들은 낮은 신분을 밝게 드러낼 수 있도록 나를 보좌하고, 재주있는 인물을 천거하면 내가 등용할 것이다.'
건안 19년(214) - '무릇 재주있는 선비가 꼭 등용되는 것은 아니고, 등용된 선비라고 꼭 재주있는 것은 아니다. 진평(陳平)이 왜 독실한 행동을 하고 소진(蘇秦)이 왜 신용을 지켰겠는가? (중략) 해당 관청에서는 이 뜻을 잘 생각하여, 재주있는 선비들은 지체함이 없게 하고 관리들은 본래의 직무에 소홀함이 없게하라.'
건안 22년(217) - '(중략) 한신(韓信)과 진평(陳平)이 더럽고 욕되게 된 나쁜 평판과 비웃음 사는 부끄러움을 가지고도, 마침내 국가 대업을 이룩하여 명성이 천년을 이어졌다. 오기(吳起)는 탐욕스런 장군으로써 부인을 죽이고도 스스로의 행동이 옳다고 믿었고, 사방에 뇌물을 주어 관직을 구하였으며 어머니가 사망했어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위(魏)에 있으면 진(秦)의 사람들은 감히 동쪽에 있는 위(魏)를 침범하지 못했고, 그가 초(楚)에 있으면 한(韓), 위(魏), 조(趙) 삼진(三晋이 남쪽의 초(楚)를 침략하지 못했다. (중략) 빠짐없이 그 각기 아는 바를 천거하여라.
이렇듯 조조는 인재등용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실력 있는 인재를 등용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조의 인재 등용 정책은 단기적으로 본다면 현실적인 면에서 이점이 있지만 조조 자신의 정권 강화와 유지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방에 강한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지방의 호족과 명문, 지식인들을 정권 안으로 흡수해야 할 필요성에서는 현명한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삼국지12에서의 조비)
이런 모순을 해결하고 관료 등용에 일정한 원칙을 세우기 위해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魏)를 이어받은 연강(延康) 원년(220)에 당시 이부상서 진군(陳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명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라는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훗날 남조의 양(梁)에서는 9품을 이분하여 18반(班)으로 수정하기도 하고, 북위 이후부터는 하나의 품을 정과 종으로 이분하는 등의 수정은 있었지만 모든 관직을 품계와 위계로 구분한다는 원칙은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습니다.
이 제도는 후한 말 황건의 난이라는 대 병란 이후 사족들이 고향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향촌에서 관리 후보자를 평가하여 천거하는 기존의 한(漢)나라의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1]의 시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실시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 군국(郡國)에 중정(中正)이라는 이름의 관직을 1명씩 임명하였습니다. 이 중정은 중앙 여러 관서의 관리들 중 덕이 있고 재능있는 자를 그 본적지의 군국의 중정에 임명하여 소관 지역 안의 인물들과 군국의 향론을 듣고 다른 지방으로 흘러간 사람까지 포함하여 현존하는 그 지역 인물에 대해 품등(品等)을 매겼습니다. 품등은 1품에서 9품까지 총 9단계로 나뉘었습니다. 이렇게 중정이 평정한 품등을 상신서(上申書)를 붙여 중앙 정부에 제출하면 중앙정부에서는 관리 임명시 이 품등에 상응하는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이 때 중정이 평정한 품등을 향품(鄕品)이라하고 중정이 중앙정부에 제출할 때 붙이는 상신서를 '장(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에는 '충, 효,제(孝悌), 겸양, 신의 등 유교적 실천 덕목과 학문과 재능을 기준으로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 관직의 품등을 관품(官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정이 평정하는 향품과 중앙정부에서 내려지는 관품에는 차이가 있어 가령 향품에서 2품을 받은 인물이 관리가 되면 관품 계열에서는 6품 관리로 채용되고 이후 진급시 2품까지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향품관 관품은 4등급의 차이를 두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중정은 중앙정부의 사도부(司徒府)에 소속되어 사도부와 중정이 관리 자격을 심사하였고, 관리 임명권은 이부상서가 관장하였습니다. 중정에는 전관(專官)과 영관(領官)이 있으며 후자인 영관은 중앙정부의 내관(內官)이 본직 이외에 중정을 겸임하는 것이고 전자인 전관은 중정만을 전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정은 그 밑에 청정(淸正), 방문(訪門)을 두고 소관 군국 안의 인물을 재관자, 미관자(未官者) 가릴 것 없이 향촌의 평판을 살펴서 향품을 정하고 또 수시로 개정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지12에서의 사마의)
하지만 중정제는 나중에 또 한번 크게 변하게 됩니다. 가평(嘉平) 원년(249)에 태부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족을 제거하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 뒤에 주대중정(州大中正. 혹은 주도州都)을 설치합니다. 사마의가 설치한 이 주대중정은 자기 일파를 지방의 대중정에 임명하고 관계에 자기 세력을 부식하고 또 지방호족을 포섭하려는 계략이 있었습니다. 이 주대중정의 설치로 기존의 군국 중정의 상위 기구가 생겨 이제까지의 군국 중정의 독립적인 품정권이 상위 기구인 주대중정의 규제를 받게 되고 이것은 군내의 명족보다 주내의 명족 내지 중앙 관서의 고위에 있는 자가 선거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향품은 9품으로 분류되지만 1품은 허명에 지나지 않아 사실상 2품이 최고품에 해당하였습니다. 3품은 서진 초까지만 하더라도 상품에 위치하나 존중을 받지 못했고 3품 이하의 품은 비품(卑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주대중정의 설치 이후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은 귀족주의적 운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고관의 후손과 자제는 높은 향품을 받아 이에 상응하는 고위관직에 임명되어 결과적으로 출신가문에 따라서 향품이 고정화되고 향품의 고정화로 가문 사이의 상하의 격차 즉 가격(家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상품무한문 하품무세족(上品無寒門 下品無世族. 상품에는 한문이 없고 하품에는 세도가 집안이 없다.)'라는 말이 생기는 것처럼 일부 귀족들의 고위 관직 독점 형태가 이뤄졌습니다.
동진 이후에는 명문 출신은 향품 2품으로 고정되었습니다. 특히 낭야의 왕씨나 진군의 사씨는 '문지이품(門地二品)'이라 불리면서 이 집안 출신자는 입법, 행정에 관한 최고 요직(2품 관직과 3품 가운데 필두)을 점했습니다. 또 초임관인 6~7품일 경우라도 최고 관직으로 승진하는 출세 코스가 결정되고 그 코스에 해당하는 관직은 '청관(淸官)'으로 간주되어 문지이품 가문 등 명문 귀족 가문들에게 독점되었습니다. 가령 6품인 비서랑(秘書郞)과 저작랑(著作郞) 등의 관직은 명문 귀족 자제들이 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듯 초기에 중정제를 도입한 의도한 것과는 달리 후기의 중정제는 주대중정제의 생긴 이후 가격(가문의 격차)이 고정되고 향품이 고정화되면서 중정의 품정은 외형만 남아 단순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높은 향품을 받는 귀족(고문, 갑족)들은 국가의 고위 관직 특히 청요직(淸要職)을 독점 세습하여 문벌귀족사회를 형성했고 남조시대에는 이것이 더욱 고정화되었습니다.
[1] 향거리선(鄕擧理選) : 향거리선(鄕擧理選)은 중국의 한(漢)에서 나타난 관리 선발 제도로서 찰거(察擧), 선거(選擧)라고도 합니다. ‘효(孝)’와 ‘렴(廉)’의 유교적 덕목에 기초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대신이나 지방 장관의 추천을 받아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선발 과정에서 향리(鄕里)에서의 평판과 세론(世論), 곧 향론(鄕論)이 중시되었기에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주(州) 자사 등이 추천하는 ‘수재(秀才)’와 군(郡)·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효렴(孝廉)’ 등으로 나뉘는데, 효렴 출신자의 비중이 높았다고 합니다. ‘수재(秀才)’는 후한에서는 ‘무재(茂才)’라고 불렀다. 향거리선은 한(漢)이 향촌 공동체의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노간),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키백과,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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