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난의 죽음이 슬퍼?’
‘……. 아니면 너도…사실은 안 슬퍼?’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하듯 태연한 표정, 흔들림 없이 평온한 신록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런 걸 묻는 너의 의중은 무엇일까, 일종의 정신병처럼 의심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양옆 두 사람에게는 당혹으로 비친 것인지 두 비난이 허공을 갈랐다. 아니면 이들이 ‘다난’이기에 그런 것일까. 몇 번의 의미 없는 질문과 답이 오가고 시선을 뒤쪽 하늘로 돌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배가 뜨기엔 아주 좋고, 대답을 듣기엔 나쁜.
불쑥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이 편치만은 않다. 저들끼리 몇 마디를 주고받다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동행인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시역인지 조력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오래 있다 보니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어색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말은 취소해야 한다. 항상 ‘그’의 시선과 함께니까. 그렇지 않아? 여전히 바람은 답을 가져오지 않는다.
“―곧 배가 출발한대요!”
“네, 갈게요.”
순간 휘도는 바람에 코트에 붙은 자잘한 먼지가 허공에 흩어졌다.
재차, 독백
w. 969
마스트에 기대어 앉아 벨바스트가 보이기를 기다리며 새까만 바다를 들여다본다. 그 눈 색은 이렇지 않았는데 그때는 왜 이런 색도 띠고 있었다고 생각을 한 건지.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렸나, 나도 당신에게 동조했나. 그만큼 우리가 동요했었나. 한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 중 하나라는 위치에 올라서까지? 이제는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그 말들은 몇몇 단어들만이 남아 내 마음대로 새로운 문장을 이룬다. 그러니까……. 네가 완성되려면 나라는 존재가 필요불가결하다는 거였나. 그렇다면 그렇다 호응을 하던지, 아니라면 부정을 하던지. 내 앞에 떨어진 동전 한 닢을 움직여서라도. 여전히 너는 날 외롭지 않게 하고 있다고 표현을 해 줘야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뱃멀미에 고통스러워하는 승객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크게 출렁이는 파도에 동전은 미끄러지다 거칠게 튕겨 나가 저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다.
‘춥지 않아?’ ‘자네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고?’ ‘날이 흐린 것도 같은데?’ ‘바닷바람이 거칠긴 하지 않나. 춥다면 술로 몸을 덥히는 건 어떤가?’ ‘…….’
“어이, 영웅님. 얼마 남진 않았다만 저 치들이 거슬리면 안에 들어가서 쉬는 건 어떠신가? 아늑하진 않아도 쉴만한 곳은 되네만.”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그저 소란이었다. 예전이라면 저 사이에 껴서 농담 따먹기도 했을 텐데. ……아니, 그랬었나. 내가 어떤 사람이었지. 기억이 안 난다. 너무 예전 일이라?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서?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
다시 마주한 사람과 짧은 대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한 사람과 짧은 대화, 싫은 일을 떠넘겨지는 불쾌한 대화가 이어지고 다시 찾아온 달갑지 않은 혼자만의 시간. 두 사람 없어졌다고 이렇게 숨통이 트일 일인지. 나도 어지간히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네. 실실 웃다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지만 성실하게 대화에 응해야 영웅이 아니겠나. 제대로 피할 수도 없었겠지만.
베임네크의 시선은 질척하고, 끈적거린다. 음성도, 아니 그 존재 자체가. 밑바닥에 구르는 인간의 희망을 한데 모아 사람처럼 만들면 저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순간 휘청이면 나 또한 진창에 굴러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라리 눈을 감고, 저 말들에 감화되어 아무것도 생각 않고, 한없이 휘둘리다 그가 열망하는 「 」을 선사해줌으로 내 할 일을 다 하는 것으로, 내 마지막을 그렇게 정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답해. 내가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게. 내가 배제당하고, 배신당하는 존재가 아님을 부정해.
바람이 불었을까, 아니었을까. 공격을 되받아친 것이 내 의지였을까, 네 의지였을까.
“모르겠으니까, 대답하라고!”
거센 바닷바람이 네 대답을 가져온 바람을 삼켰을까. 이 바람 자체가 너의 대답일까. 그게 아니면 너는 또 침묵하는가.
어둠은 짙은 밤으로 사라지고 사방의 흥건한 검붉은 액체가 지금 있었던 일을 보여주듯 남아있다. 흙이 아닌 돌바닥은 감출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물들 뿐. 날이 밝으면 이 길을 밟는 이들이 보겠지. 모로 보나 혈흔이 분명한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생선의 것이라 인지할까. 아무 죄 없는 짐승의 것이라 간주할까. 아니, 아니. 분명 폭풍을 몰고 다니는 저 ‘영웅 놈’의 수상한 짓거리의 결과로 보겠지. 분명히. 피에 젖은 칼날을 횡으로 휘두르자 처덕이는 소리를 내며 나무줄기가 발갛게 물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파도의 움직임만이 저 검은 것이 하늘이요, 다른 검은 것은 바다임을 보이는 시간. 매섭게 벽을 쳐대는 소리에 앞선 모든 혼란을 떠넘긴다. 이 또한 떠밀려진 영웅의 일대기에 한 자리를 잡을 것이며 나는 기억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니 신경을 거두기로 하고.
·
‘무슨 빗발이 이렇게 세? 얼굴 거죽이 다 찢어지겠어!’ ‘하늘이 미쳤나?’ ‘마나난님께서 노하신 게야!’ ‘왜 갑자기 이러는…’ ‘…밀레시안이…’ ‘…….’
성소의 수원지에 가야겠다. 제멋대로 뿌리내리고 알아서 자란 열매 아래 잠겨, 목욕재계해야 땅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가더라, 배를 타고? 배가 땅에서도 움직이던가. 노를 억지로 저으면 어떻게든 갈 수 있으려나. 말을 타고? 아니면 걸어서? 이 비를 뚫고 움직일 수 있는 마차가 있던가. 나는 거기에 어떻게 갔었지. 언제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나? 어디에 있었지, 벨바스트가 아닌 곳이었나?
“…마나난을 만나주십시오.”
“그래, 갈게요.”
그칠 생각을 않던 비는 굵은 눈과 같이 땅을 뒤덮는다. 소복이 쌓이려는 눈 위에 빗방울이 겹쳐 그저 질척이는 것으로 바뀐다. 손끝이 벌게져선 따끔거리는 통증이 찾아온다. 정신 차리라는 듯,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다는 걸 일깨우듯.
관사에서 벗어나 항구로 가까워지면 신벌이라는 한파에 문을 거세게 닫아 단단히 잠그고 살을 에는 폭풍우와 눈보라를 피해 천막 아래로 뛰쳐들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중간에 서서 사람들에 치이며 그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멀뚱히 있고, 누군가의 배려를 기다림에도 찢어지는 비명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뭔가 목에 걸린 양 거슬리다 콜록, 하는 소리와 함께 잔기침이 튀어나온다. 유례없는 날씨에 이례적인 감기도 찾아왔다.
‘어떻게든 해 봐!’ ‘영웅이잖아!’
흠뻑 젖어 무겁고 눅눅한 옷자락과 환청을 같이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가야지, 네가 그랬듯 나도 내 일을 하며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지. 지켜야지. 너는 나를, 나는 이 망할 세계를.
“―출항하겠습니다! 여건이 이렇다 보니 만에 하나라도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줄을 단단히 동여매세요!”
짙은 안개 속으로 발을 뻗는다. 언제나 그랬다. 미지의 공간에 망설임 없이 들어가 많게는 십수 번을 죽음 언저리에 다다르거나, 혹은 정말 죽었거나. 고통이 무뎌진 것이 아닌데도 그걸 당연히 여기며 행동했다. 그걸 후회한 적은 있었던가. 영웅이란 말에 기뻐한 적은 있었던가. 아무런 감정 없이 희생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은?
“암초입니다!” “강행돌파 하세요.” “믿겠습니다!”
아니, 믿지 마세요. 나는 이도 저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려다 막을 새도 없이 잇새를 비집고 나온 기침에 얼굴이 굳는다. 이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걸 몸이 거부하는 양.
·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가 짐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나? 죄를 지은 사람의 얼굴을 한 채 자신들의 무력함을 탓하는 이들에겐 유감스럽지만, 그들이 내 어깨를 견주는 대단한 이들이었어도 짐이라고 느꼈을 텐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끝까지 남는 것을 선택하고 죽어버려도……그래, 죽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을 텐데. ‘……안 슬퍼?’ 왜 하필 지금 그 목소리가 등을 타고 기어올랐을까.
심장이 터질 듯 움직이며 목숨을 노리는 이들에게 날을 세운다. 나무로 된 무대는 범람하는 파도에 흠뻑 젖어 썩어들어가며 제 기능을 곧 상실할 것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누군가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나는 위기상황에서만 제 기능을 하는 모든 감각에 이를 악물고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눈을 감았다 뜨면 바뀌는 나무판자 배경은 이제 휘황찬란한 푸르름의 신전. 각본을 썼다 주장하는 이는 완벽하게 막을 내리리란 기대감에 춤을 추지만 그녀가 가져다 쓴 인물은 다른 각본가의 주연이기에 그 뜻대로 행동하지 않고, 연극은 망가지고 무대 속 작은 무대는 힘없이 부서진다. 폐부를 찌르는 찬 기운들에 참았던 기침을 뱉자 가슴에 끓던 응어리가, 울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바닥을 적시는 게 보인다.
대체 그 죽음이 왜 슬퍼야 하는 거지? 대답해, 잘난 주신의 검. 여긴 붉은 빛이 보이지 않는 푸르른 공간이니, 이제는 그 대답이 잘 보이지 않겠어?
기대 이상이라 판단했는지 아까와는 달라진 눈빛을 오롯이 받고 있으면 뒤에선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밟는 게 취미인가. 내 뒤를 밟는다고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인가. 조금 그래도 되지 않나, 입술을 짓씹다 뭐가 그리 재미있고 흥미로운지 마음대로 기대를 하는 것은 한낱 미물이나 저것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보낸다. 그새 버젓이 제 눈앞에 있는 날 배제하며 막힘없이 이야기를 진행하다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내 등을 떠민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온 것 같군.”
“……가기 전에 하나만 물을게요.”
아까는 물을 게 없다면서? 못마땅한 시선으로 입매를 굳히다가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마나난은 웃었다. 인간은 변덕스러우니까. 커다란 아량을 베푼다는 듯 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슬쩍 기울이는 것으로 끄덕임을 대신하며.
“재미있었나요?”
정해진 운명에 구르는 내가?
마나난도, 베임네크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기운과 함께 눈꺼풀로 시야는 까맣게 차단된다.
최대한 느리게 눈을 뜨자 어둠을 메우는 빛이 시야에 가득하다. 한적한 해변에, 모래에 파묻힌 구두 굽과 앞코에 부딪힌 힘을 잃은 파도가 하얀 포말을 내며 부스러진다. 끝까지 감은 태엽이 풀리며 기민한 감각이 짙은 색으로 물든 모래알갱이와 함께 멀어진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시선을 빼앗는, 몸에 익은 기운을 담은 깃털을 줍자 힘이 빠져나간 신체가 부유하듯 움직인다. 준비할 시간도 없는 강제적인 일이었지만 불쾌함은 찾아오지 않았다.
날 보고 있었겠지.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모든 것을 지켜보는 역할을 맡았다 해도 개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고, 너에게 그건 나임을 우리 둘 다 분명 알고 있잖아.
다난의 죽음이 슬프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는 내가 무슨 답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 대답을 가리려 했어? 아니면 정말 몰라서 주변의 작은 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답을 기다렸어? 너의 물음이라면 기꺼이 답했을 텐데.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그러나 그 죽음이 슬플 리가 없다. 사람 형태를 한 포워르를 죽이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과 그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과 말이 통하는 생명체를 죽임에도 거리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말을 섞지 않고 시선을 얽지 않았던 이들에게 짧은 묵념을 하는 것과 곧 스러질 고깃덩이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그 숨을 거둠이 타인을 위한 희생 때문이었는지 간악한 죄로 인함인지도 관심이 가지 않는데. 전자는 반드시 슬퍼하고 후자는 반드시 혀를 차야 하는가?
나는 당장 며칠을 같이 다닌 사람이 죽어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데? 물살이 크게 출렁였다.
“앗, 저기…!”
·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입술이며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있겠지.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지며 심호흡을 하려는 시도는 콜록거리는 소리에서 점차 컥, 케엑 하는 뒤틀린 소리로 번번이 막혔다. 숨통을 틔게 해주려 등을 강하게 두드리는 손길과 그걸 막는 손길. 당사자보다 동요하는 주홍빛이 바쁘게 움직인다. 발작같은 기침들이 이내 잦아들고 쉬익, 히익, 하는 숨소리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몸을 연보랏빛의 존재가 양어깨를 단단하게 붙드는 것이 보인다. “자,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아벨린의 손에 강하게 붙들린 알터의 양팔이 눈에 들어왔다. 또 너구나.
“그러니까……톨비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안전하게 돌아가실 수 있게 도우라고. 덧붙이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안전을 말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안전을 빌기엔 나는 초월한 존재가 아닌가. 왜 갑자기 눈물이 흐르는지, 왜 그게 그렇게 화가 나는지 알 수 없다.
그게 걱정이라면 직접 나섰어야지, 그분의 뜻이며 정해진 이야기며 하는 걸 제쳐두고 날 매서운 공격들에서 직접 보호하러 왔어야지. 내가 또 날 탓하며 스스로 절벽 끝에 내몰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지, 그랬어야지! 다른 이의 손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를 수렁에서 끌어올리며 답을 바랄 때 작은 바람이라도, 미미한 숨결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응?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할 말들은 목구멍 끝에서 맴돌다 아픈 멍울이 되어 다시 명치에 쌓인다. 기가 차 온몸에 힘이 빠져 무릎이 꺾이고 고개가 넘어간다.
“민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아벨린, 르웰린. 그리고……알터.”
한참을 쏟아낼 것 같은 눈물은 고작 한두 줄기만 흘렀다. 감정을 토하는 것을 잊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뒤이어 찾아오는 발소리가 들리지만, 아직 못 한 말들이 많은 이들조차 내버려 둔 채 발길을 뗐다.
성소로 가자. 그곳으로 가서 잠겨야지. 그렇게 하면 이 정신병도 고쳐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