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게시판에 써야 할까, 고민 고민 하다가 결국 익명 게시판에 쓰게 되는군요.
오늘도 불철주야... 까지는 아니지만 열심히 제 사명감의 주인이신 국민 여러분을 위해 출동을 다녀오다
멘탈이 우스스 깨져버린 일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119 신고 절차에 대해 아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보통의 경우,, 신고자 119로 신고 -> 119 상황실 신고 접수 -> 상황실에서 해당 지역 119안전센터 혹은 119지역대에 출동 명령 통보,,와 같은
경우를 거치게 됩니다. 현재 경북 119상황실은 대구에 위치한 경상북도 도청에 위치하고 있지요.(곧 안동으로 이전 예정입니다.)
즉, 만약 신고자가 경북 구미에서 신고를 하게 되면 대구 경상북도 도청에 위치한 상황실로 신고가 들어가게 되고 상황실은 신고 위치와 가장 근접한
소방서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하나, 신고자가 휴대폰이나 유선전화로 119에 신고한다고 해서 바로 여러분 바로 곁에 있는 소방서나 119안전센터, 119지역대로 신고 접수
가 되지 않습니다. 중간에 119상황실이라는 곳을 거치게 되지요.
여기서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신고하시는 분들은 가장 가까운 소방서에 연결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 위치쯤은 알겠지 하고
상황실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제 할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분도 많고, 상가의 상호 이름만 말씀하시고
지역이나 동네 이름 조차도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운 좋게 상황실에서 신고 전화를 받으셨던 분이 이전에 신고 위치 근방에서 근무를 하거나 고향이라서
빠르게 상황 대처를 하면 모르겠지만 수시로 인사이동으로 지역을 옮겨다니며 근무를 하는 우리 소방관들도 관할 내 모든 지역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넓은 땅덩어리 골목 하나 하나, 논밭 이름 하나 하나를 어찌 다 기억하겠습니까.
오늘 일도 비슷합니다. 보통은 소방서에 보면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지령서가 출력되는 프린트기가 있습니다.
이 지령서라는 종이에 신고자의 연락처부터 신고 상황, 위치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헌데 오늘은 상황실에서 일반 전화로 먼저 전화가 왔습니다. 상황실 근무자께서 말씀하시길,,
"지금 XX동에 평화빌라라는 곳에 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지령 내려주십시요. 출동하겠습니다."
"저기 그게... 신고 이후 전화를 끊고 나서는 재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정보는 XX동에 평화빌라라는 이름 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통화 시도해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재통화화시는데로 저희측으로 무전 부탁드립니다."
대략 이런 상황입니다. XX동은 특히 공단에 출퇴근하는 원룸촌으로 최근엔 정말 자고 일어나면 못보던 원룸 건물이 지어져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원룸이 생긴 상태입니다. 혹자는 출동하지 않으면 안되냐? 저렇게 해놓고 어떻게 찾으라는 말이냐? 라고 속 편한 소리들을 하시는데, 이후 신고자
로부터 인명 피해라도 발생해 민원이라도 걸면, 저희는 정말 아찔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각설하고,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구급차로 출동하면서 저희가 사적으로 파악해둔 원룸 이름과 대략 위치를 찾아봅니다.
네, 없습니다. 이 경우 일이 커집니다.
많은 원룸들이 그 외면에 빌라나 건물 이름을 크게 적어놓기 마련이죠. 헌데 오래된 원룸 같은 경우엔 그런 건물 이름이 없는 곳도 부지기수입니다.
분명 이쪽에 등록 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그 이름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그 편리한 위치 추적 시스템은 어디다 팔어먹고 엄한 데서 땀을 빼고 있느냐... 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만
저희 소방서에서 사용하는 위치추적의 근간은 통신사와 연계한 기지국 위주의 추적 시스템입니다. 즉, 가까운 기지국을 중심으로 오차 범위를 줄여
최소의 범위만 나타날 뿐, 신고자가 위치하는 정확한 핀 포인트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XX동을 1시간 반 동안 헤집고 다닙니다. 거리에서 평화빌라라고 목이 터지라 외치면 사방에서 욕이 날아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1시간 반 직후, 지나가던 치킨 아르바이트생이 우릴 잡습니다.
저기 안쪽 골목에 들어가면 평화빌라가 있다고 합니다.
정말 할 수 있었다면 절이라도 했을 겁니다. 돈이 있었다면 용돈이라도 쥐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암튼 감사를 표하고 뛰어가자 또 머리가 띵해집니다.
평화빌라 1동... 2동... 3동....
그래서 출동한 인원을 나눠 1동에서 3동까지 초인종을 전부 눌러봅니다. 욕을 몇 번 먹다가, 2동쪽에서 연락이 옵니다.
"찾았습니다."
구급대원인 제가 미친듯이 뛰어가 봅니다.
"..........괜찮은 것 같에요. 병원 안 갈래요."
술 먹고 잠든 걸 걱정해 신고했다가 산적같이 생긴 큰 남자들 셋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문 앞에 찾아오자 신고자가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웃으며 좋게 설명하고 환자라도 보게 해달라고 하자 되레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꺼지라며, 경찰을 부르겠다며 개인 권리를 주장하십니다.
"네, 그럼 저희는 이송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혹여 추후 또 문제가 생기시면 언제든 119 신고를...."
쾅!!!
뭐가 그리 겁이 나시는지, 신고자는 복도가 무너져라 문을 닫으시곤 사라집니다. 그래도 업무용 휴대폰으로 상황을 녹취해놔서 차후에 문제가
생겨도 변명할 여지 하나 쯤은 생겼습니다. 서류도 하나 쓸 게 있는데 말도 꺼내기 전에 문을 닫아버리십니다. 휴.
소방서로 돌아가는 차 안, 모두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녀 말 할 기력도 없습니다.
비록 환자를 보진 못하긴 했지만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한창 자랄 나이도 아닌데 그것 좀 뛰었다가 배가 꺼졌네요. 어디 야식이라도 먹을까 하다가 시골 촌구석 치킨집은 저녁 8시면 문을 닫는지라
오늘도 다이어트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제발 119에게도 시간을 좀 주십시요.
저희가 여러분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어디 계신지 알려주지 않으면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저 30초 신고에서 15초만 더 할애해 45초 동안 충분한 정보로 신고해 주시면
저희도, 여러분들도 더 신속하고 안전한 소방+구급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너무 긴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