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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게가이드의 내용 추가를 위해서 만드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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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이병도가 단군조선을 부인했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
이병도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했다?
이병도가 말하는 한사군재한반도설은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이완용의 친척이다?
나가는말
머리말
다들 이병도에 관해서는 많이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두계 이병도는 현 서울대학교의 역사 교수들의 한다리 건너서의 스승이며, 서울대가 아닌 강단의 교수들 또한 그 연구의 경향은 이병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현 학계의 원조라고 세자들이 칭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들었던 이병도의 이름은 그 높은 학계의 스승으로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식민사관에 점철된 왜곡된 역사를 만든 곡학아세의 전형으로 유명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일제시기 식민사관의 총아와도 같았던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과 수사관보를 맞아 활동했던 인물이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식민사관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사편수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또한 식민사관학자이며 역사 왜곡을 자행한 인물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부정확한 의혹에 사실상 기름을 퍼부은 것이 유사사학자들이다. 이들은 이병도에 대해서 “단군조선을 부인한 식민사관학자”에서부터 “민족 정기 환단고기를 부정한 쓰레기” 등등으로 거짓말을 퍼부었고 결국 이러한 말들은 인터넷 상에서 확대생산된 나머지 두계 이병도의 별명은 “두계마왕”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한국 고대사의 왜곡의 원점이며 모든 흑막의 아버지와 같다는 의미에서 ‘마왕’의 칭호를 붙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고 공격의 화살을 현재 이병도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학계로 돌리곤 한다. 당연한 수순인 것이 이병도의 연구가 한국고대사를 왜곡했다면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던 혹은 연장선상에서 계승하던 모두 왜곡된 고대사를 계승하여 한국사는 이루어 졌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결국 이런 주장의 귀결은 언제나 한국사를 부정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서인 ‘환단고기’를 주장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작태를 보이는 유사사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고 그것을 반박해 보고 친일파임이 분명하지만 특이하게도 식민사학자는 아니었던 이병도를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논해볼 생각이다.
1. 이병도가 단군조선을 부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병도는 일제에 의해서 신화속으로 몰렸던 ‘단군조선’을 신화 밖 역사로 끌어낸 인물 중 한명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신채호... 입니다만.. 그의 연구는 상당히 실증성이 약한 관계로 별로 학계에서 논해지지 않는다.. 차라리 허접하지만 신화를 해석한 이병도의 연구가 의미가 있다고나 할까?)
사실 이 주제는 유사사학자들이 이병도를 비판할 때 가장 전면에 앞세워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주장이 학교 교과서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에 대한 것과는 다르며 오히려 학교 교과서에서 말하는 고조선의 대부분이 이병도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임은 의도적으로 숨기곤 한다. 즉,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말하는 고조선에 대한 몇가지를 직접 살펴 보자.
첫 번째로 기자조선에 대한 부정이 있다. 이병도가 저술한 『한국상고사입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근래 사료에 의하면 중국의 기자가 조선에 망명해 와서 조선의 국왕이 된 사실은 없으며, 기자는 중국에 그대로 살면서 주(周)의 왕과 왕래하다가 중국이 통일되어 그대로 살기가 어렵게 되자 그 후손 기비(箕丕)는 고조선 말기에 조선으로 피해 와서 간청하여 변방 작은 지역의 제후(지방관)가 되었다.”
또한 『조선사개강』에서는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평양 일대에 건국한 소국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두 번째로 단군조선에 대한 긍정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이병도가 단군신화를 해석하면서 내리는 결론이기도 한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곰부족 호랑이부족 하는 해석도 모두 이병도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저서 『국사대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웅녀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실상은 아래에 말한 바와 같이 지상족 - 즉 국신족國神族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즉 천신족인 환웅과 지신족(국신족)인 [고마]족의 여성과 결혼하여 단군을 생生하였다는 것이다. (p24)”
(출처 : http://orumi.egloos.com/3356771)
또한 이병도는 저서 『한국고대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국사 첫머리에 봉착되는 중요한 문제가 단군에 관한 문제라 하겠다. 단군에 관한 고기록이 너무나도 단편적인 데다가 설화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또 그것이 비교적 후세의 서書 수록된 까닭에 혹은 황탄시荒誕視, 혹은 후인의 날조捏造라 하여 이를 말살, 부인하려는 무리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솔하고 무모하고 또 비과학적인 태도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는 거기에 약간 후인의 윤필이 가해진 곳도 있지만, 대체로 볼 때 이를 후인後人의 조작으로 단정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고, 도리어 음미 검토할수록 이것이고인古人의 오랜 설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고전임을 인식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래도 이병도가 단군조선을 부정했는가?
세 번째로 위만의 출자에 대한 해석이 있다. 이병도는 일제시기에 『진단학보』에 실렸던 그의 논문 「삼한문제의 신고찰」에서 처음 “燕人이라고 하나 요동의 土人 인 듯?” 이라고 처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병도의 주장은 사기에서 위만을 소개할 때 魋結蠻夷服 이라 하여 오랑캐의 복식과 조선인의 상투를 틀었다는 이유를 근거로 들고 있으며 이 외에도 준왕이 위만을 신뢰했다는 것은 그가 본래 조선인이라는 이유, 연이 지배하던 요동은 본래 조선의 영토였는데 이를 상실하면서 본래 조선인출신이 연나라에 거주하게 되었기에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 위만조선은 중국의 것과는 다르게 원시부족장제의 유풍이 반영된 相이라는 일관된 관직명을 갖추었다라는 이유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2.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미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말송보화의 인터뷰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즉, 이병도는 이름만 올린 사람이었다고 말송보화는 밝히고 있다.
더구나 이병도가 활동했던 ‘촉탁’직은 조선사편수회가 외부업체에 외주를 맞기기 위해 임명하던 직책이다. 즉, 이병도의 촉탁직은 엄밀히 말해 그가 조선사편수회의 외부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소리다. 또한 그가 참여해 편찬했다고 알려진 『조선사』는 ‘역사책’이 아니다. 이 책은 ‘사료모음집’이다.
사실상 저자에도 이병도 개인의 이름을 쓰여있지 않은데다 이 책은 특정한 사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그냥 사료모음집이다. 그런 관계로 종종 유사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병도가 저술한 『조선사』는 식민사관의 총아이다.’ 라는 말은 틀린 문장이 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에는 저자의 의견이라고는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을 식민사관의 책으로 주장하고 싶었다면 책에서 사료를 특정 목적에 의해서 ‘취사선택’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유사사학자는 없다. (사실 오래전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거짓임이 들통난 뒤에는 잠잠하다.)
그렇다면 조금 의아스러울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어찌되었든 일을 했던 이병도의 진짜 역사관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병도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역사가의 遺香』에 실린「실증사학과 민족사학 – 두계선생과 정홍준씨의 대담」에서 스스로를 자그마치 “민족사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자서전인 『풀뭇간의 쇠망치』에는 민족에 대해서 한국인의 나쁜 습관을 “후천적인 생활환경에서 자라난 습성이므로 크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 라고 규정하고는 “위대하고 영광된 민족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 것” 이라며 희망에 가득찬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즉, 단순히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를 식민사학자라고 부를만한 마땅한 근거가 없는 것이 사실이며 오히려 그의 저술활동이나 발언에서는 스스로를 민족사관에 근거한 학자로 평가할 여지를 더 많이 주고 있는 것이다.
3. 이병도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했다?.
이것도 결론부터 말하겠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그대로 믿는게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병도는 삼국사기에서 신뢰가능한 시기를 상향조절했다.’
사실 이 주제만큼 유사사학을 신봉하는 이들의 모순이 돋는 주제도 없다. 사실 삼국사기는 유사사학자들에게 비판의 모든 화살을 받는 책이다. 실제로 김부식은 단군에 대해서 정황상 알고 있었으나 그 기록이 허황하다 하여 기록하지 않았고 이는 유사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한계점으로 지적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이들은 삼국사기야 말로 한국 역사왜곡의 시발점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일본인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처음 접함에 초기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불신론’이 대두 되었다. 이러자 유사사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구조가 생겨 버린다.
‘일본인 학자 = 식민사관’ -> ‘일본인 학자가 주장하는 초기불신론 = 식민사관’
결국 유사사학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초기불신론은 식민사관을 상징하는 표어처럼 굳어져 버렸고 실제로 다수의 유사사학자들이 이를 비판해 마지 않는다. 매식자(매국노식민사학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이런 논지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신채호 선생까지 매식자로 몰아가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고구려 백제사는 감소되고 신라는 가탁되어 믿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삼국시기의 초기기록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삼국사기 초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이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상당부분 ‘가탁’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사례가 석탈해의 이야기 인데, 탈해는 혁거세 39년에 아진포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이를 서기로 계산하면 기원전 19년인데, 이후에 그가 6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는 기원후 57년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를 한국식으로 역술하면 탈해가 아진포에 도착했을때는 그의 나이 –15세가 된다..;;
또 다른 사례는 얼마안가 탈해의 손자 벌휴이사금에서 나타난다. 벌휴는 184~196년까지 총 12년간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문제는 탈해가 죽은 해가 80년이라는 소리다.. 탈해는 9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당시의 손자와 할아버지의 나이 차이를 진짜 많이 봐줘서 30세라고 하더라도 벌휴는 130세 까지 살았다는 소리가 된다.;;
이런 식이니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다. 이런 신라 초기의 생몰연대에 대해서 재해석한 연구도 있으나 이것 까지 소개하면 불신론에 대한 설명으로 변질될까봐 일단은 여기까지만 소개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결국에는 일본인 학자들에게 삼국사기는 ‘법흥왕 내지는 진흥왕’대 까지가 실제이고 그 이전의 시기는 가탁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헌데 이에 반박하고 나선이가 바로 이병도이다. 그는 저서 『국사대관』에서 “신라의 국가정치의 태세가 내물왕 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 기록에서 신뢰가능한 상한을 ‘내물왕’으로 상향시킨 것이다.
4. 이병도가 주장한 한사군재한반도설은 식민사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사군재한반도설은 식민사관이 아닌 우리 고유의 학설이다.’
사실 한사군의 위치 비정문제는 조선의 위치 비정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고조선의 멸망지에 한사군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선의 위치를 비정할 때 가장 논의되는 사안이 바로 浿水라는 강의 위치 비정이다. 패수가 가장 처음 언급된 사기에는 3세기경 위나라의 장안이 주석으로 ‘조선에는 濕水, 洌水, 汕水라는 3개의 강이 있으며, 합해져 열수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사마천 또한 사기에서 패수를 위만조선과 요동의 경계가 되는 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패수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위만조선의 서쪽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이후의 한사군의 설치 영역을 짐작할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패수의 위치에 대한 문제는 비단 일제시기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가장 처음 한사군의 위치‘만’을 비정한 것은 『고려사』에서 이다. 여기서는 평양을 낙랑군의 치소로, 강릉을 임둔군의 치소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후에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마찬가지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문적으로 그 위치를 연구한 저술은 아니었기에 이후에 등장하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를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동국지리지에서는 패수를 청천강으로 규정하고 낙랑을 평양으로 규정하면서 그간 규정하지 못했던 진번군의 위치를 황해도 일대로 규정하고 있다. 즉, 패수 = 청천강 이라는 공식이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이병도는 「浿水考」에서 한백겸의 주장을 재확인하였을 뿐이다. 특히나 일제시기에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수많은 낙랑의 封泥들과 결정적인 유물인 점제현신사비의 발굴은 이병도의 패수 = 청천강 설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고 현 학계에서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나 재한반도설이 중론으로 모아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사사학의 신봉자들은 이병도가 식민사관에 경도되어 한사군의 위치를 맘대로 한반도로 가져왔다고 주장하니 이건 한백겸을 비롯해서 세종대왕님까지도 식민사관에 경도된 인물이라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PS: 근래에 일부 유사사학자들이 한사군이 본래 중원에 있었던 조선5군이라는 설을 퍼트리는거 같던데..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073&s_no=11073&kind=search&page=3&keyfield=name&keyword=%B6%FB%B6%F6%B6%F3 이미 반박해 놨다..
5. 이병도는 이완용의 친척이다?
사실 이런 거짓말 까지 이병도를 위해 변을 써줘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긴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유사사학의 신봉자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는 이병도가 이완용의 친척이라는 사실은 거짓인데 말이다..
http://www.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29156§ion=section3§ion2= 해당 링크는 이완용의 손자가 이병도가 이완용의 가까운 친척관계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이다.
또한 이병도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역사가의 遺香』에 실린「실증사학과 민족사학 – 두계선생과 정홍준씨의 대담」에서 이완용을 30촌에 달하는 먼 친척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정도면 그냥 남이다.;;;
참고로 이 대담에서 이병도는 이완용을 ‘망국의 군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나가는 말
지금 까지 이병도를 악의적으로 음해하는 몇몇 주장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거짓을 반박해 보았다. 혹자들은 유사사학자들의 거짓말에 혀를 내두를 것이며 어쩌면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자들은 이 글을 보고서 굉장히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본문의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병도는 친일파이건만 실제로 살펴보니 그의 연구는 다분히도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를 대함에 우리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말이다. 단순히 생각하자, 학자 개인으로서의 활동을 비판함에 우리는 동참해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친일파이다. 그를 옹호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상 용납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연구를 바라봄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활동과 구분해서 볼 필요성이 있다.
독일의 화학비료 창시자 ‘프리츠 하버’의 사례를 생각해보라. 그는 현 농업계의 일획을 그은 화학비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지만 1차대전 당시에 독일을 위해 독가스를 만드는데 협력한 ‘전범’이었다. 우리는 그의 비인도적인 전범행위에 분노하지만 그가 창안한 화학비료의 혜택을 누리고 살며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을 생각해 보라. 그는 철저한 반전주의자였으며 평화를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연구는 핵물리학의 신호탄이 되었고 핵무기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무서운 무기를 만드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누구도 핵을 만드는 기초를 제공한 학자란 이유로 비판하지 않는다.
결국 학자로서의 개인적인 삶과 그 뛰어난 연구성과는 분리되어져 사고되어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이미 우리가 그 혜택을 보고 있는 연구의 성과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문명 발전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우리가 연구했던 한국사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병도를 대할 때 그를 일방적으로 추켜세울 필요는 없다. 그는 친일파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연구를 대함에 그 개인적인 처신을 이유로 부정하고 거짓을 담아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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