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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147363
    작성자 : 무법천지
    추천 : 96
    조회수 : 1312
    IP : 123.254.***.8
    댓글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6/10/18 03:26:29
    원글작성시간 : 2006/10/18 00:59:05
    http://todayhumor.com/?humorbest_147363 모바일
    한나라당이 뜻을 잇겠다고 한 故 홍남순 변호사
    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1 – 윤동수(1996년)

    5•18민중항쟁 26주년을 맞이하는 광주시내에 선거구호가 요란하다.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는 야당대표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광주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은 '광주학살의 후예는 광주를 모욕 말라'라는 펼침막을 들고 그에 맞선다. 여당대표는 금남로에서 목청을 높인다. 지방선거 유세가 불붙은, 정치 1번지로 둔갑한 광주에 '5•18은 민중혁명이다! 5월 19일 3백여 명의 택시 기사들이 무등 경기장에 모여 시위에 가담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어. 넝마주이들이 총을 들고 싸웠고. 황금동, 대인동에 있는 술집 아가씨들이 시민군들에게 밥과 술을 줬어. 참, 민중의 힘이 대단했어.' 라고 외치는 늙은 목소리가 있다. 항쟁기간 시민군들이 죽어나갔던, 총탄자국이 선명했던 옛 YWCA건물이 사라졌듯 이즈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69세 노인, 광주항쟁 수괴로 몰리다
    보안대 수사관은 "간첩도 내 손에서 5일이면 끝났는데, 네놈은 70일이 걸렸다.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라며 각목을 홍남순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무릎을 꿇린 채 자근자근 짓밟았다. "영감, 민주주의 좋아하네. 이 각목 하나로 민주인사들 다 굴복시켰어. 당신들이 좋아하는 민주주의는 없어!" "할 말 다 했으니 마음대로 해!"

    홍남순은 비명을 질렀고 반백이던 머리칼이 어느새 백발로 변했다. 수사관들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홍남순을 엮으려고 미쳐 날뛰었다. '학생소요를 일으키는 대가로 배후세력인 김대중에게 얼마의 자금을 받았나? 그 돈을 누구에게 전했나? 전남대 학생회장에게 주었나?' 5명이 돌아가면서 잠을 안 재우고 끊임없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6•25때 적 치하에서도 동조하지 않는다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사람이다. 그런 나를 공산당으로 몰려하다니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짜라. 군법무관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나다." 홍남순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각본을 짜놓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검찰관에게 수사를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 69세 홍남순은 팬티만 입고 고문을 받았다. 시멘트 바닥인 지하실에서 모포 한 장 없이 떨면서 잠을 청했다. 밤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헌병대 영창 마당에서는 전봇대처럼 큰 통나무를 젊은이들과 함께 들고 '우로 어깨, 좌로 어깨'라는 구령에 따라 봉체조를 감당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들씌운 죄목인 '무기회수 방해죄' '학생교사죄' '정부전복기도'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린 너희들에게 맞아죽느니 할 말이나 당당히 하고 가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이 나이에 고문을 받고 어찌 살겠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차라리 나를 충장로 네거리에 이대로 끌고 가서 총으로 쏴 죽여라. 그러면 광주시민들이 불쌍하다고 동정이나마 해줄 거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서 맞아죽기는 싫다.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죽여 달라."
    가족들은 홍남순이 감옥에서 생을 마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통을 피눈물로 지켜본 셋째 아들 기섭(52)은 말한다.
    "5•18로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고 강압에 굴복해서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그대로 지장을 찍었지만, 아버지는 버텼다. 모진 협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장을 안 찍었다. 수사관들은 홍남순을 5•18의 수괴로 몰려고 했건만 끝내 실패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맞추려고 몇 달을 시간을 끌었어도 홍남순을 수괴로 만들지 못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어느 날 편지봉투에서 떼어낸 우표를 홍남순은 물에 씻어서 말렸다. 무엇하냐는 아들 기섭의 물음에 그는 다시 쓰려고 그런다고 답했다. 그때까지 홍남순은 헌 우표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알았죠. 집에 죽이 끓는지 쌀이 있는지도 모르셨고 도무지 경제 감각이 없었습니다. 명색이 판사 부인이라는 어머니가 바느질하고 돼지 키워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니까, 사건이 들어올 리 없죠. 안기부, 경찰이 집에서 진을 치니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전기세, 식량까지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아들 기섭의 말대로 홍남순이 쓰러지고 나서 확인한 통장에는 잔고가 100만 원이 안 되었다. 홍남순은 사무실에 걸어놓은 시궁절내현(時窮節乃見,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 이라는 송나라 말 재상이자 문장가인 문천상이 좌우명으로 삼은 글귀를 평생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조선 500년을 통치하고 유지하며 견인차 역할을 하고 그 밑바닥이 되어 소금노릇을 한 것이 이른 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낮이면 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거나 비가 오면 글을 읽고 쓰며 도학을 연구하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주려도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식뿐만이 아니라 후학, 후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봄으로써 사회를 교화시키고 이끌어 나간다."

    광주민주화유공자 보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의 선비 정신은 한결같았다. 홍남순은 자신이 말한 대로 '시민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 보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5•18 때 수사관들이 궁동 집에서 수첩을 찾아냈다. 변호사 사무실의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였다. 수사관들은 탈세나 비리 사실을 캐내려고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장인 정광진(65)을 두들겨 팼다. "변호사님 댁을 여러 차례 수색한 것으로 안다. 그 낡은 집에 텔레비전 한 대가 있던가? 양심수 변론하는 분이 무슨 비리가 있겠나?" 사무장 정광진은 엉덩이 살이 뭉개지도록 68일이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홍남순이 비리가 없음을 주장했다. 결국 270건을 뒤지고도 비리를 못 찾아낸 수사관들은 홍남순의 깨끗함에 탄복하고 말았다.

    젊은 날에는 광주 시내 사진관에 홍남순의 잘 생긴 얼굴사진이 안 걸린 데가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목숨을 걸고 싸운 그이지만 선비답게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젊은이들과 술도 마시고 시조도 부르고 서화와 고서를 사랑했다. 5•18 때 수감되자 가장 걱정 된 것이 자식들의 학비였다. 헌데도 홍남순은 그림을 파는 대신 집을 처분해서 학비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홍남순은 태권도 유단자이기도 하다. 막내아들 영욱(46)은 어린 날을 떠올린다.
    "3선개헌 반대로 나라가 떠들썩할 무렵인데, 아버지가 경찰 곤봉에 맞으면서도 데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세 많으신 아버지는 '경찰이 곤봉으로 배때기를 쑤시면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고 그 아픔을 표현했죠. 회갑 때부터 아버지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셨습니다."
    내란죄로 몰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군대 영창에서도 홍남순은 선비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찍어주고 불안에 떠는 송기숙을 부른 그는 느닷없이 주간지 『선데이서울』을 펼쳐 보였다. 여자들 사진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 예쁜 여자를 한 명 고르라고 했다. 송기숙은 속으로 홍남순이 실성했나 의심을 했다.

    정신이 나가기는커녕 홍남순은 자기는 한 명 골라놨다고 어린 애처럼 좋아했다. 송기숙은 기가 막혔지만 어른이 시키는 대로 아무 여자나 짚었다. 그러자 홍남순은 기겁하며 그건 자기 것이라고 송기숙의 손을 내쳤다. 그 와중에도 송기숙은 한 여자를 두고 홍남순과 실갱이를 벌이며 군대 영창에서의 지옥 같은 나날을 견뎌낼 수 있었다. 지금도 박석무(64)는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북돋워주던 그를 잊지 못한다.

    "5•18 이후, 어느 초봄이었다. 행사를 하려고 궁동 집에 찾아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대문까지 나와서 작별인사를 하던 어른께서 손바닥만한 화단에 앉았다. 거기에는 얼음이 얼었는데도 작약 싹이 나와 있었다. '야, 이것 보라. 추위가 덜 가셨는데도 싹이 나와부렀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와부러. 민주주의는 온다 이거여. 긍께, 우리 걱정 말로 열심히 하세.' 그 목소리가 청년 저리가라였다."

    민주주의 사랑방, 궁동 15번지
    광주시 궁동 15번지 은행나무집, 민주주의의 대법정
    굳게 잠궈진 철문이 싫어서
    항상 대문을 열어놓은
    여기는, 광주시 궁동 십오번지
    한국의 민주주의가 숨쉬는 곳이다
    근대화된 집들이 좌우로 키가 커가도
    납작하게 엎드린 한옥 한 채……
    <문병란의 시, 취영송(翠英頌)중에서>

    홍남순의 집은 5•18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지낸 안성례(66) 씨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나면 정보과 형사들이나 안기부원들이 구속자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 하지만 홍 변호사님의 사무실이자 집인 궁동 15번지에 모이면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가족들 석방 문제, 유가족 문제, 부상자 문제를 마음 놓고 의논할 수 있었다."고 신세를 졌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낡은 한옥은 광주시민들에게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사랑방이었다.

    1981년 9월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했을 때 시위를 했던 구속자 가족을 폭행했던 형사는 날마다 궁동 집에 와서 빌어야했다. 사무장 정광진이 고소장을 쓰자 형사는 소를 취하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홍남순이 홍성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집주인이 집을 비웠음에도 광주시민들은 궁동 15번지를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50년도 더 된 궁동 집이 팔릴 뻔 했던 적이 있었다. 병원을 짓겠다는 건설회사가 비싼 값에 사들이겠다는 거였다. 아내 윤이정과 자식들은 팔아버리고 편안한 집에서 살자고 했지만 홍남순은 여기서 살다가 죽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궁동 15번지의 주인을 광주시민들은 사랑했다.

    홍남순이 복권되기 전이었다. 화순에서 온 친지 한 사람이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택시를 탔다. 궁동 15번지 은행나무집으로 가자고 하자 어떻게 그걸 혼자 들고 가냐고 택시 기사가 물었다. 그가 '홍남순 변호사한테 가져간다. 변호사 일도 못해 밥벌이를 못하고 있으니 두고 볼 수 없지 않나'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쌀을 내려주고 차비를 안 받고 그냥 떠났다. 비록 어렵게 살았어도 홍남순의 궁동 집은 평생 사람과 인정만큼은 넘쳐났다. 그리고 셋째아들 기섭은 궁동 15번지가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전남도청이나 남동성당처럼 말이다.

    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2 - 윤동수

    변호사 홍남순은 『함성』지 사건을 각별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박석무와 김남주를 비롯한 전남대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비난하며 유인물을 뿌린 사건이었다. 학생들을 변호한 홍남순은 무죄판결을 끌어낸다. 하지만 변호사인 그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홍남순은 그 뒤로 시국사건에서 단 한 건도 무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한다.
    "1970년대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만 해놓으면 끝난다는 식이었다. 검사가 유죄를 입증하기보다는 변호인이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유죄판결이 떨어지고 마는 엉터리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형량 역시 턱없이 인플레 현상을 보인, 양형감각마저 희미해져버린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고인의 양형에 매달리기보다 오히려 정부의 법률 운용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려고 애썼다."

    법조문이 아니라 몸으로 변론하다

    홍남순은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늙으나 젊으나 맞절을 한다. 그리고 집 밖에까지 배웅을 한다. 사무장하고도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맞절을 하는 그답게 시국사건으로 만난 이들도 아꼈다. 단순한 민주화운동 동지로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가 양심수들의 경조사를 챙겼다. 그랬으니 그가 법정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양심수들은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법정에서의 변론 못지않게 감옥에서 신음하는 양심수를 찾아 위로하는 '법정 밖의 애정'이 더욱 절절했고, 구차한 법조문으로 따지기보다는 정의와 양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변론을 대신하였다. 말로 변론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으로 변론하였으며,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만났다. 정광진 사무장이 작성한 변론사건 목록은 곧 홍남순이 발로 달려가 만난 '동지적 사랑의 목록'이나 마찬가지다.(김정남의 회고)

    이돈명 변호사는 말한다.

    "그 분은 법조문으로 변론하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말보다는 몸 전체로 자신을 드러내어 변론합니다."

    1970년대 홍남순은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는다. 『함성』지 사건(1973년), 3•1민주구국선언(1976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고영근목사사건(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교사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필화사건(1977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우리의교육지표사건(1978년) 등 40여 건에 달한다. 그는 전국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노인네가 다들 미쳤다고들 했다. 서울이건 부산이건 내 돈 들여가며 뛰어갔으니까. 그러나 한 번도 고달프거나 짜증나지 않았다. 시국의 물줄기는 바꿀 수 없다고하더라도 내 힘으로 정의의 작은 불씨를 일으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18민중항쟁 이전에 광주의 민주화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우리의교육지표사건'으로 구속된 송기숙은 혼자 격리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정서불안 상태였던 그는 홍남순의 변론을 들으며 가슴에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그 재판풍경을 변호사 홍성우는 회고한다.

    "하루는 부장판사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송기숙 교수를 고압적인 언동으로 깔아뭉갰다. 그걸 지켜보던 홍남순 변호사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판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예끼'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판사는 홍 변호사님이 짧게 내뱉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금세 얼굴색이 발그스름하게 변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잠시 떨구었다. 나는 그때의 홍 변호사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그걸 보면서 '광주란 이런 동네구나. 광주사람들끼리의 인정, 교류 같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홍남순 영감이 아니면 저렇게 판사를 나무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판사를 그렇게 나무라는 사람은 처음 봤다."

    5•18은 민중혁명이다!

    1980년 5월 26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는 계엄군에 맞서 홍남순은 16인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나선다. 그날, 그의 뒤를 따른 어느 젊은이의 회고다.
    "도청을 나와 한참을 말 없이 걷고 있는데, '어이 갑제, 나는 살 만큼 살았네만 자네는 참 안 됐네.'그래요.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네. 그러니 몸을 피신하게.'라고 말할 텐데, 홍 변호사는 그게 아니었다. 광주시민이 죽어 가는데 젊고 늙음이 무슨 필요 있겠냐는 거지요. 사실, 저도 그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거든요."

    1980년 5월 21일,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서울에서 광주로 돌아온홍남순은 시내병원을 둘러보았다. '병원 복도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가마니를 덮어놓은 시신들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눈과 머리가 짓이겨졌거나 총상을 입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1980년 12월 17일 홍남순의 항소심 재판이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살만치 살았고, 저기 있는 두 여자 분들(이애신, 조아라)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불의에 항의하고 올바르게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나.'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다 석방해야 한다. 나이 먹어가면서 법조인으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수습위원 활동을 부당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홍남순이 최후진술을 하는 동안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방청석에 앉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구속자들도 흐느껴 울었다. 5•18민중항쟁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홍성우 변호사)라는 말대로, 각본에 따라 검사는 무기징역을 내렸다. 그러자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셋째 아들 기섭이 냅다 '이 개자식들아, 이게 재판이냐!'하고 재판장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 구속자 가족들은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법정에서 나와 버렸다. 재판관들이 피신하는 바람에 재판은 중단되고 헌병대원들이 진압에 나섰다.

    19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홍남순은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이 워낙 심한 터라 사람을 모으고 민주화운동 단체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1983년 복권이 된 그는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트는 데 주인공으로 나섰다.

    "젊은 동지들과 박석무, 송기숙 교수 등 몇 사람이 찾아와서 나의 고희를 기념하는 논총집도 하나 내고 조촐한 기념행사라도 한번 꾸려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 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동지들이며 이 나라의 양심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로 자신들의 글을 쓰고, 거기에 덧붙여서 이 나라의 정치•경제•역사•인권 등을 폭넓게 논해보자는 의견들이었다." 고희논총집에참여한 필자들(문익환, 백기완, 리영희, 이호철, 유인호, 송건호, 이효재, 김진균, 한승헌, 이우정, 안병무, 성래운, 백낙청)을 몽땅 밖으로 내보내면 대한민국이 조용할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발간위원회는 책을 만들었다. 논총집 증정식이 열린 곳은 광주 YMCA 무진관이었다.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인 그리고 민주화운동가 수백 명이 모여 커다란 행사를 벌렸다. "그날 행사는 5공 군부세력에 의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던 민주진영이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기지개를 켜는 발대식이나 마찬가지였다."(박석무의 회고) 비로소 5•18민중항쟁 이후 첫 공식 대중집회가 열린 셈이었다. 박석무는 민주화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홍남순이 기여한 점을 말한다. "조직을 만들기 위한 싹을 마련한 셈이다. 첫 결실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고, 5•18광주민중항쟁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로 나아간다. 홍남순은 민주화운동 조직을 만드는 씨앗이 된 셈이다. 조직의 '장'을 맡음으로써 홍 변호사는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탑에 민중혁명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압박하는 군사정권에 홍남순은 항의했다.
    "세상과 역사는 유동적이고 또 그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거다. 지금의 정의가 나중에는 불의가 되기도 하고, 또 그것이 반대의 입장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동학이 무엇인가? 그들 역시 당시에는 만고의 역적으로 삼족이 결딴나는 무거운 형벌을 받았지만 시대가 바뀐 지금에 와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민중은 곧 백성을 일컬음이다.

    무등산의 혼이 숨쉬는 큰 어른


    평생을 함께 한 사무장 정광진은 인간 홍남순을 보면서 악한 일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선한 인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홍남순을 감시하던 형사나 기관원들이 나중에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보안사에서는 정보과 형사에게 홍남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 형사는 '옷 벗어도 좋다.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해서 홍남순 변호사를 사지로 몰 수 있나. 그것만은 못한다'고 거부했다. 홍남순은 '광주시민으로서 대책위원장을 하라기에 시민의 안전보장을위해 나섰다.'고 주장했다. 증인으로 나온 형사는 홍 변호사님이 수습위원으로 청년들을 설득해서 총을 회수하지 않았으면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을 거라고, 홍남순의 도움이 컸노라고 증언하였다.

    고려말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했듯, 세상을 시류에 맞춰 살면 되지 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던 형사는 고희 논총집 증정식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홍 변호사님에게 두 번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81년 12월 홍 변호사님이 석방되자 위로 차 집에 찾아오는 하루 수십 명의 인파를 보고서였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다. 정계•학계•재야•종교계 등에서 그야말로 쟁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다. 오늘을 계기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이런 삶이 존경받는 삶이고 성공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작은 일만 있어도 홍남순에게 역정보를 주었다. 돌아가는 정황을 얘기해주면서 이런 것은 조심하라거나 빨리 피신하라고 일러준 것이다. 그는 진심이 우러나 홍남순을 도와주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을 잡은 오늘의 세태를 홍남순은 어떻게 볼까. 그는 민주화운동을 한 경력을 이용해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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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남순
    1912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출생
    1930년 화순군 능주공립보통학교 졸업
    1941년 1월 26일 윤이정과 결혼
    1948년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
    1953년 광주시 궁동 15번지에 변호사 개업
    195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
    1958년 제 4, 5대 국회의원선거관리원회 광주을구 위원장
    1964년 대일 굴욕외교반대 투쟁위원회 전남부위원장
    1969년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남위원장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 대표
    1973년 '지식인 15인 시국선언' 참여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대표 상임위원
    1980년 민주헌정동지회 전남 조직 책임자
    광주 5·18항쟁 수습대책위원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 선고
    1981년 징역 7년으로 감형, 홍성교도소로 이감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83년 광주시 궁동에서 변호사 다시 개업
    고희논총기념 출판기념회
    1984년 광주5·18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1985년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1986년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짐
    2006년 10월 14일 타계 향년 9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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