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밤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하필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도망친 것은 큰 실수였다.
이미 달리기 힘든 하이힐은 벗어버린지 오래고, 무거운 전공 책들이 가득 든 가방마저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녀를 쫓아오는 남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져 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서 얼핏 뒤돌아봤을 때 그 남자는 마치 이 죽음의 추격전을 준비하고 오기라도 한 듯 달리기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조그만 우산같은 것과 칼을 들고 있는게 보였다.
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얼굴은 공포에 질리고 완전히 지친 나머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헉... 흐억... 흐흑... 살려..."
'푸욱'
여자가 말도 채 끝내기 전에 남자의 칼이 여자의 가슴을 찔렀다.
순간적으로는 가슴에 서늘한 느낌만이 들었다.
의외로 아프기보다는 차가움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완전히 지쳐서 엉망이었던 호흡마저 갑자기 침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모든 고통이 한 순간에 찾아왔다.
"꺽...어어어...아아..."
다시 숨은 가빠졌고, 가슴은 불타는 것 같았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다리는 이미 지친지 오래였고, 애원하듯 내밀려던 팔마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찌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여자는 다시 고통은 사라지고,
온 몸이 차가워지면서 호흡마저 멈췄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
아니 오히려 잘생긴 편이다.
군살이나 주름살도 없는, 깔끔하게 면도까지 한 얼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의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어릴 적 같은 학교나 학원을 다니던 아이들의
모습들이 떠올랐지만, 이 남자라고 확신되는 사람은 없다.
전혀 모르는 사람.
그녀의 삶은 이제 그 날 아침 집을 나서는 부분까지 모두 보여졌고,
그녀는 자신을 죽인 사람은 자기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결론내렸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죽는 것이다.
남자는 칼을 뽑았다.
피가 꽤 많이 튀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엔 한방울도 묻지 않았다.
새로 만든 방패같이 생긴 비닐장갑 덕분이다.
이 짓을 몇번 하다보니 갑자기 떠올라서 만들어봤는데 썩 맘에 들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어짜피 밤에만 꺼내니 상관없다.
한번 쓰고나면 뼈대만 빼고 비닐만 작게 뭉쳐서 음식물쓰레기랑 같이 봉투에 넣으면 된다.
이마저도 껄끄러울 땐 아예 잘게 잘라 강물에 뿌리거나 태워버렸다.
남자는 기지개를 한번 쭉 펴보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이 공원은 정말로 자신의 이 비밀 취미엔 안성맞춤이다.
다만 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나면 경찰들이 와서 난리를 치겠지.
이 생각을 하니 조금 아쉬워졌다. 그냥 저 여자 시체를 숨기고 한명만 더 죽일까?
하지만 그런 일은 들킬 염려가 크다. 그냥 깨끗하게 포기하자.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남자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가슴에 고통이 밀려오고는
다시 차가워지면서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전국은 '만천교 집단살해'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연예인이 알고보니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느니, 어느 정치인이 얼마를 받았느니 하는 것들도 모두 이 이슈에 묻혀버렸다.
한날 한시에 연관성을 찾기 힘든 백여명의 사람들이 가슴의 같은 부분에 칼에 찔린 듯한 상처가 난 채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게 하필 '만천교'가 휴거가 일어날꺼라고 주장하던 날짜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만천교는 용해산이라는 자가 만든 사이비 종교인데, 그걸 취재한 적이 있던 어느 기자가 이 사건과 연관지으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퍼져서 '만천교가 휴거가 일어날 꺼라면서 집단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라고 왜곡된 것이다.
일단 경찰은 교주 용해산과 신도 몇명을 체포했지만, 그들은 휴거를 준비한답시고 그들의 아지트에서 온갖 의식을 치르고 법석을 떨고 있었기에 전혀 혐의가 없었다. 만천교에 연관된 사람들 중에 이번 일로 죽은 사람은 만천교에 푹 빠져 전 재산을 갖다 바쳤다가 뒤늦게 후회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던 어느 편의점 사장 뿐이었다.
사건이 워낙 파장이 커서 온갖 소문이 다 퍼져나갔다. 그나마 '만천교'라는 수식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직 경찰만 알고 있는 사실은, 죽은 사람들 중 실제로 칼에 찔린 사람은 공원에서 발견된 여자 뿐이며, 확실치는 않지만 그 여자의 사망 추정시간도 제일 빨랐다는 것이다. 그 외엔 마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칼로 찌른 듯이 상처만 난 채 죽은 사람들 뿐이었다. 그 여자를 죽인 칼을 들고있는 남자조차도 그랬다.
놀랍게도 조사 결과 그 남자는 지난 몇년간 일어난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여성을 지칠 때까지 쫓아가다가 죽이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판명되었다. 거의 완벽하게 증거가 없어 경찰들이 애를 먹고 있던 사건 하나가 해결된 셈이지만, 대신에 더더욱 불가사의한 사건 하나가 일어난 것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수사는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달 뒤, 서울의 한 형사가 그간 전국에서 일어난 집단사망 사건의 피해자 리스트를 정리해보고 있었다. 나이, 거주지, 과거 어떤 단체에 들어간 경력까지 그 어떤 것도 뚜렷한 연관성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드러난 놀라운 사실은 대전에서 죽은 어느 부부가 알고보니 죽은 연쇄살인마 남자의 부모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랍게도 죽은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이상한 연관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를 죽인 남자와 함께 그간 연락을 끊고 살던 그의 친부모도 죽었다.
시골에서 혼자 살던 그 남자의 외할머니조차 똑같은 상처로 죽어버렸다.
그 남자가 살던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밀리터리 동호회 회원 세명도 죽었는데, 알고보니 이 셋은 불법으로 밀리터리 나이프를 만들어서 팔다가 적발된 적이 있던 사람들이고 이 남자가 범행에 사용한 칼도 이 셋이 만든 것이었다.
여자가 평소에 다니던 길의 멀쩡한 보도블럭들을 교체하느라 통행금지라며 빙 돌아가라고 말하던 불친절한 인부들도 죽었다.
그 외의 사람들도 직업들을 놓고 보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조금씩 여자가 죽던 상황에 연관이 있었다.
죽은 만천교 신도였던 편의점 사장은 이틀 전 이 남자가 '살인용 장갑'을 만들 때 쓴 비닐 우산과 비닐봉지를 팔았다.
죽은 대학 교수는 시험을 어렵게 내기로 유명해 그 여자가 그날 그렇게 밤 늦게 공부하다 집에 돌아가게 만들었다.
죽은 백화점 직원은 여자가 빨리 달릴 수 없었던 하이힐을 추천해줬을 것이고, 디자이너는 그 신발을 디자인했을 것이다.
죽은 여러 저자들은 그 여자가 내던져버린 가방 안의 두껍고 무거운 전공교재들을 썼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직업만 보고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약간씩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녀를 죽인 남자는 잘못이 있다.
그를 낳고 제대로 키우지 못해 살인마로 만들어버린 부모도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낳은 부모도,
그가 살인에 사용한 칼을 만든 사람들까지는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비닐을 판 편의점 사장이나 쓸 내용이 많아 책을 조금 두껍게 쓴 저자들도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이들을 잘못이 있다없다로 딱 구분할 만한 기준은 찾기 힘들다.
만일 형사 자신이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는다면, 그라도 그 순간 그를 죽인 자나 그의 부모까지는 증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이 죽는 순간, 이 모든 사람들이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한이 어떤 초인적인 힘으로 표현되어 한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버린 것일테다.
문득 형사는 종이 한장에는 만물이 들어있다고 하는 어느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만일 여자가 조금만 더 오래 생각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by 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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