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뭐니 뭐니 해도 데드 얼라이브죠! 그 피의 향연속에서도 코믹함을 잃지 않는 연출!!"
"너무 가볍지 않나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같은쪽이 전 더 좋아요."
"전 디 아워스나 식스센스 같은쪽이요.. 너무 비쥬얼로 치우치는건..."
단체 미팅이랍시고 만났던 자리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야기가 이런쪽으로 흘러버렸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다. 여럿이서 정신없이 술마시며 얘기하다보면 늘 그렇듯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결과만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말이다. 하여간 확실한건 개중에서 가장 열을 올린게 장일이 녀석이란 것이다. 고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녀석은 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공포영화에 대해선 거의 마스터한 듯 보였다. 녀석의 집에 놀러가면 국내에선 구하기 힘든 공포영화 비디오와 DVD가 한쪽 벽면을 메우다시피 할 정도이니 말은 다했지...
다행히도 자리에 나온 여자들 역시 공포영화를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야기는 껄끄럽지 않게 흘러갔지만 그쪽으로 영 정이 가지 않는 자같은 사람은 그저 입다물고 지겨워하지 않는 척 할수 밖에 없었다.
"양들의 침묵은요? 그것도 레퍼런스급이잖아요 영화의 완성도로 따지면"
검은색 탱크톱에 자켓을 걸친 여자의 질문에 장일이 녀석이 또 흥분하기 시작했다.
"물론이죠! 영화적으로 잘만든건 인정해요.. 하지만 너무 폼을 잡은게 별로에요.. 특히나 그 뒤로 이어진 연작들은 '맨헌터' 보다 못했던거 같구 말이에요. 하지만 아이디어는 정말 굉장하죠, 전 사실 '렉터'보다는 '버팔로 빌'쪽이 더 끌려요, 카니발리즘은 흥미롭지만 여기저기서 자주 다루어 왔던 소재잖아요... 게다가 카니발리즘쪽으로의 탐구 보다는 렉터 박사 본인의 천재성이나 카리스마를 다루는 데에 치중해서 별로였어요.. 선한쪽이든 악한쪽이든 태어날때부터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현실성도 없구.."
"버팔로 빌이라면 그 여자들 죽여서 가죽을 벗겨낸 범인이죠?"
"맞아요.. 그 아이디어가 정말 맘에 들어요. 트랜스인 살인마가 여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수단으로 여자들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든다니 말이에요.. 그 옷을 입음으로써 완전한 여자로 태어난다는 거죠..."
"꼭 트랜스일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냥 변태 복장도착자일 뿐이죠..."
"어찌 되었든 버팔로 빌의 계획은 상당히 현실적이에요.. 살아있는 동물의 가죽은 무두질을 하게 되면 수분이 날아가면서 표면적이 줄어들게 마련이거든요.. 때문에 살해 대상은 여럿이 되어야 하고 게다가 살집이 있으면서 가죽이 연한 젊은 여성들이죠.."
그때였다. 여자들중 나처럼 별로 말이 없던 연한 핑크색의 니트를 입고 있던 긴머리의 여자가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범인의 목적이 여자의 몸을 가지겠다는 것이였다면 실질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아닌거 같아요.. 결국 제단되어 옷으로 만들수는 있어도 그렇게 완성된것은 여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과 별 다를게 없을테니까 말이에요.. 게다가 사람 가죽은 생각보다 얇아서 제단하기도 힘들고 말이에요... 아마 어렵게 만든다고 해도 결국 자기 만족의 수준에서 그치겠죠. 그리고 영화에서 보면 남자 몸이 상당히 건장하던데 웃길거 같지 않아요? 그렇게 덩치큰 남자가 여자가죽을 뒤집어쓰고선 홍홍대며 걸어다니는 모습이란게..."
그순간 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장일이는 순간적으로 반해버린 모양이였다. 하긴 녀석의 악취미에 가가운 취향에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깊이있는 대응을 한 여자가 몇이나 있었겠는가? 게다가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얼마 못가 열띤 분위기는 사그러 들었지만 둘의 대화는 한쪽 구석에서 계속 이어졌고 나 역시도 음반기획사에서 일한다는 여성과의 대화에 빠지면서 둘에대해선 관심을 두지 못했다.
나중에 계산대에 가고 나서야 나는 그 여자와 장일이 녀석이 중간에 살짝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일행에게 술값은 치루고 갔다고 하니 다들 음흉한 생각을 하며 농담을 주고 받을지언정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장일이나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까맣게 날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 회사 근처의 까페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어떤 남자와 앉아서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이 익은 얼굴에 누군가 싶어 한참을 흘끔 거린 뒤에야 나는 장일이와 그녀를 연결시킬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근래에 장일이 녀석한테 연락이 없었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어찌 되었든 장일이랑은 잘 되지 않았는지 그녀는 다른 남자와 테이블 위로 손을 마주 잡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나는 괜히 그런 틈에 아는척 하며 끼어들 필요도 없을것 같아 다시 좀전까지 보고있던 잡지로 눈을 돌렸다.
"야.. 그런데 정말 특이한 지갑이네요. 이런 디자인은 처음 봐요"
"이거요, 수제품이에요.. 아는 가게에서 직접 맞춘거니까 처음 볼수밖에요"
"특히나 이 문양 말이에요.. 무슨 풀 같은데... 뭐에요 참 멋있네?"
"엉겅퀴에요.. 문양 장식이 화려한게 제 맘에 쏙 들었거든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려온 대화에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가 들고 있는 지갑을 쳐다봤다.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된것은 '엉겅퀴'란 단어 때문이였을 터이다. 그 단어를 나 역시도 장일이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 것이다. 그것은 몇년전 둘이서 스쿼시를 끝내고 사우나에 들어갔을때였다.
"이거.. 엉겅퀴야.. 뭐 특별한 이유는 없고. 뽀대나지 않냐?"
장일이 녀석은 몸을 틀어 자신의 어깨쭉지에 새겨진 문신을 자랑하듯 보여줬었다.
그녀가 대화를 나누던 남자를 이끌고 까페를 나서는 순간까지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자리에 굳어 버린듯 앉아 있을수 밖에 없었다. 장일이 녀석이 왼쪽 어깨쭉지에 새겼던 문신, 그리고 그녀의 지갑에 새겨진 문양, 두개의 엉겅퀴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너무나도 닮은 꼴이였던 것이다.
마치 똑같은 것인양...
출처 : cafe.daum.net/roclancy 작가 : cla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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