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법리학에서 말하는 사형제 폐지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의 형벌권은 생명박탈권까지 확장할 수 없다.
2. 사형은 범죄인의 모든 박탈을 의미하며,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자유사회에서 허용 할 수 없다.
3. 헌법상 절대적 기본권인 생명권의 본질을 침해해선 안 된다.
4. 오판 가능성이 있다.
5. 범죄예방 효과를 그다지 기대할 수 없다.
6. 형벌의 기본 목적인 교화 및 재사회화를 포기하는 일이다.
7. 정치적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대부분 이 7가지 내용의 변형이거나 확장인 경우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다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생명권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생명권은 불가침이 아니다.
2. 모든 이익을 박탈해야 마땅한 범죄가 있을 수 있다. 존엄과 가치는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다.
3. 생명권 박탈은 합헌이다.
4. 사형 언도에 대한 조건을 철저하게 명문화함으로서 오판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
5. 범죄예방 효과가 결정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을지라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범죄 예방의 수단으로만 형벌을 보는 것은 피해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다.
6. 형벌의 정당성은 교화와 재사회화보다 응보에서 찾아야 한다.
7. 악용가능성은 정치적 악용을 금지하는 입법 보완에 의해 차단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권'이 중요 가치로 여겨질 경우 사형폐지론이 강세를 얻습니다.
반대로 인권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그것이 정의든 발전이든 혹은 독재든) 주장이 힘을 얻을 때 사형제도가 부활합니다.
즉 다시 말해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이 기대하듯 사형제도에는 단순히 비문명적이고 원시적인 '개인적 보복', '복수'의 논리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죄를 범한 자는 범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황금률, 보편적 정의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다싶이 이 정의론에는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권선징악',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 '주는 대로 받는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등등이죠.
'죄 지은 이는 그에 합당한 죄값을 받아야 한다'라고 할 때, 여기에서 확장하여 우리는 '살인을 저지른 자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보편율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살인사건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타인에게서 빼앗았다는 것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가장 흉악한 범죄입니다.
그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이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롭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살인사건의 경우 다른 사건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피해자의 인권'이 없다는 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살인사건 피해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사법체계 안에서 사망과 함께 인간적 권리 주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체계는 살인범을 어떻게 적법하게 다룰 것인가, 살인범의 권리를 어떻게 얼마나 보장할 것인가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죠.
실제로 피해자 유족들이 재판 과정에서 분노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재판 과정 속에는 피해자의 권리, 근본적인 생명권조차 고려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를 들어 도난 사건이 있었다고 하죠.
그렇다면 피해자는 도둑에게 도둑 맞은 만큼 돌려 받으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살인 사건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살인범을 죽인다고 해서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생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 유족의 인권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법리학에서 당사자가 아닌 유족의 인권, 그것도 '복수할 인권'은 보장의 대상이 아닙니다.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행복추구권은 생명권보다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형제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말했던 '보편적 정의론'에 비추어 본 사형제도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비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을 보며 사형제도의 부활을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죠.
또 하나는 피해자의 비존재성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살인사건에서 피해자는 현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 측면은 인간권리, 즉 인권의 측면입니다.
인권이란 단순히 생명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오히려 생명권을 뛰어넘는 인간적 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살인이라는 인간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단지 생명권을 보장하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잃은 인간적 감정과 가치, 그리고 훼손한 것의 무거움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살인범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인권적 측면에서 볼 때 사형제도는 도피성 말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형만큼 편한 제도가 없습니다.
살인범에 대한 감정으로 마음 상할 필요도 없죠.
살인범을 먹이고 재우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세금을 소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 탈출하여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살인범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형 언도를 할 판사와 사형 집행을 할 몇몇 사람들만 불편해지면 끝날 일입니다.
사형제도가 부활하면 정의는 지켜지고 마음은 편해질 겁니다. 어쩌면 범죄율도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좋은 걸까요?
범죄자를 죽이고 죽이고 끝까지 죽인 다음에 과연 순수한 사람들만이 남을까요?
'미친 사람을 만드는 데에는 아주 불행한 하루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조차 사소한 계기로 살인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대란 그런 위태롭고 불안한 시대입니다.
사형집행이란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살인범을 외면하고 포기하는 행위가 아닌지 고민합니다.
사형을 집행할 것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범죄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살인범을 사형할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교화하고 그 데이터로 새로운 살인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