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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14501
    작성자 : 계피가좋아
    추천 : 6
    조회수 : 3369
    IP : 121.170.***.74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1/04/25 23:57:19
    http://todayhumor.com/?panic_14501 모바일
    브금주의,스압주의]옆집남자


    조금 길지만 정말 수작입니다














    1. Recollection (회상)



    지영은 어느 때와 같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냄비에 물을 끓이며, 당근을 자르는 게 뭐 그리 흥이 나는 지 콧바람을 흥얼흥얼 거렸다. 앞치마를 두른 모양새가 지영의 빼어난 몸매를 두각 시켰다. 유행에 따르는 단발 머리 역시 그녀의 외모를 더 멋지게 했다.


    20대 후기의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요리였다. 그것도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을 해주는 것. 그것이 그녀의 삶의 낙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녀가 다져진 당근들을 끓는 냄비에 쏟아 담았다. 그리고 삶은 감자들을 칼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콧바람 소리가 한층 더 커졌고, 이내 노래로 자연스럽게 노래로 이어졌다.


    “네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마냥 걷다 걷다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구슬이 은쟁반 굴러가듯한 주옥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와 너무나 어울리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였다. 그녀가 감자를 썰어 내려살 무렵, 그때 집 마당 앞에 차가 주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시계를 쳐다 보았다. 시계는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이가 벌써 오셨나? 아직 오려면 멀었을 텐데..?”


    그녀가 식칼을 내려놓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은 뒤 부엌을 빠져나왔다. 카페트가 깔린 거실 바닥을 밟으며 앞치마를 의자에 걸쳐 놓고 현관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녀가 남편의 차로 착각한 것은 트럭이었고, 그녀 집 앞이 아닌 옆 집 앞에 세워 져 있었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려할 때, 트럭의 스티커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퀵 이삿짐 센터-


    그녀가 다시 현관문을 열고 조금더 자세히 밖을 내다 보았다.


    이삿짐 트럭에서 직원들 세명이 내려 트럭 뒤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셋이서 다 같이 커다란 장롱 하나를 트럭에서 꺼냈다. 이와 동시에 때마침 작은 검은색 승용차가 트럭 뒤에 섰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30대 중반정도 되 보이는 사내였다. 덥수룩한 수염에 더벅머리가 마치 야인을 연상시켰고, 옷 역시 하얀 와이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으나 왠지 모른듯한 구질구질한 느낌과 싼티를 냈다.


    그는 이삿짐 직원들에게 여기저기 가리키며 무언가를 지시했고, 직원들은 그저 끄덕끄덕 거렸다. 그는 흡족하다는 듯 웃었고,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보았다.


    그때 대문을 열고 그를 주시하던 지영과 눈이 마주쳤다. 지영은 왠지 모를 듯한 소름을 느꼈다.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그런 혐오감을 사내가 보여주었다. 살기와 욕망이 가득한 눈빛, 살짝 드러난 구역질 나는 누런 이빨.


    그러나 지영을 질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사내의 외모가 아니었다. 지영은 사내가 차에서 나올 때 부터 보았다. 그는 왼쪽 발을 약간 절은 다는 것을. 마치 무릎부상을 당한 축구 선수가 필드를 걸어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팡이도, 크러치도 없었다.


    너무나 닮았었다, 그 악마와.


    지영은 잠시 생각에 빠졌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아니, 악몽을 꾸는 듯.













    처음부터 그에 대한 혐오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정 반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지영이 본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순하고 젠틀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지영이 대학시절 때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그가 아이들 밥을 챙겨주며 지영에게 던졌던 한마디가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눈이 참 예쁘시네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당황한 지영이었지만, 마냥 싫지 만은 않았다. 훤칠한 키에 각진 얼굴, 잘 다져진 몸매에 감미로운 목소리. 거의 완벽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흠이 있었다면 그가 왼발을 약간 절었다는 것이었다.


    “아, 이거요?”


    그들이 고아원의 만남을 계기로 사귄지 몇주째 되는 날, 지영이 그가 상처 받지 않을 까 조마조마 하며 용기를 내어 그의 다리에 대해서 물었다.


    “어렸을 때 겪은 교통사고 휴유증이예요.”


    그가 멋쩍은 웃음을 띄며 말했다. 지영은 그런 그 남자의 모습에 더욱 더 빠져들게 되었고, 드디어 그녀에게 사랑이란게 찾아오는 듯 했다.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고, 때문에 지영은 그런 일이 그녀에게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만난지 5주째 되는 날, 지영이 그와 함께 시골에 있는 별장으로 여행을 갔다. 아직 한번도 같이 자본 적이 없는 지영으로서는 매우 설레이는 여행이었다. 자제를 하려 노력했었지만, 여행 시작부터 그녀는 그들의 ‘첫날밤’ 생각 뿐이었다.

    별장에 낮에 도착한 그들은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은 뒤 그의 차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었고, 지영은 이미 만발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또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 믿었기에, 그녀의 몸을 내주기로 준비를 했었던 것이었다.


    둘은 별장 안으로 발을 딛자 마자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열이 오르고 사랑이 피어갈 무렵, 그가 하던 것을 갑작스레 멈추었다. 지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고 순간 뇌리에 스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경험 때문에 그가 관심을 잃었던 것일까…?


    “자기, 왜 그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둘은 알몸 이었고, 땀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특히 그의 붉게 상기된 얼굴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난 사실,취향이 따로 있는데… 이렇게 하니까 제대로 못하겠어.”


    그가 한숨을 쉬며 지영의 위에서 내려와 옆으로 누웠다. 지영은 어쩔줄 몰랐다. 어떻게든 그의 취향에 맞추고 싶었고 어떻게든 그의 마음에 들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취향? 어떤거인데?”


    그의 취향대로 따르기로 한 지영은 침대에 팔다리 모두 묶인 채로 입에 재갈까지 물렸다. 하지만 그녀는 기뻤다. 그렇게라도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그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어서였다. 적어도 그가 부엌에서 식칼을 빼오기 전까지.


    그녀는 그것이 그의 짓궂은 장난인 줄 알았다. 아니, 연기일 뿐이라고 굳게 그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슴없이 그녀의 팔을 베었다. 마치 회를 뜨는 듯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렇게 사악 베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고, 그의 실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살살 열린 피부 사이로 고여 나오는 피를 보고 히죽히죽 웃는 그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재갈을 단단히 물려 소리가 나질 않았다. 발버둥 치려 했으나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팔을 베었다. 피가 솟구쳐 침대 시트를 적셨고, 그녀가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느라 통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피범벅이가 된 채로 그녀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가 좀 전까지만 해도 따듯하고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사람에게서 나오는 같은 미소였으나 그녀를 두려움에 빠뜨렸고,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악몽에 시달리게 한 섬뜩한 미소였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열심히 가구들을 나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고통과 분노의 눈물이었다. 그때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참! 가스불!”


    그녀가 잠시 잊고 있던 주방으로 달려갔다. 끓는 물에 담가 두었던 당근은 물이 반쯤 증발해 버릴 정도로 오래 끓인 덕에 불어서 못쓰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스불을 끄고 냄비를 집으려다 손잡이에 손을 데었고, 냄비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당근과 뜨거운 물이 바닥을 누볐다.


    “아 뜨거워…”


    그녀가 두 손가락으로 귓볼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요리에서 만큼은 실수가 없던 지영에게는 벌어 질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그 악몽이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끼치는 대단한 영향력을.















    2. 파라노이아 & 인썸니아 (Paranoia & Insomnia)




    겸사겸사 요리를 마치 지영은 남편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였던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려 했으나, 조금 전에 있었던 실수에다 쉽게 떨쳐버릴수 없는 불안감과 수치에 요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둘은 늘 그렇듯 마주보며 거실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깔금히 정돈 된 거실이었다. 군데군데 화분들도 놓여져 있었고, 남편이 따온 골프 트로피와 여기저기서 받은 상들도 전시 되어 있었다.


    “오늘은 요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지영이 한마디 내던졌다. 그의 남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사를 계속 했다. 그녀의 남편은 알아주는 외과 의사였다. 이름은 오민철 이었고, 나이는 지영과 15살이나 차이가 났었다. 머리 숱도 얼마 없었을 뿐더러, 몸매 역시 볼품없었다.


    지영이 대학시절 악몽을 조금씩 벗어나며 만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악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녀 밖에 없었다. 신고도 하지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때문에 한동안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기도 했었다. 민철은 그 악마와 정반대였다. 무뚝뚝한 성격에 볼품없는 외모, 게다가 나이도 훨씬 많았었다. 때문에 지영이 조금 안심하고 결혼까지 서둘러 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민철의 의견에 따라 아이가 없었고, 2세 계획 조차 전혀 없었다.


    “아참, 오늘 누가 이사 옆집으로 이사왔어요.”


    지영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응, 봤어.”


    민철이 다시 짤막 하게 대답했다. 하루종일 혼자 있었을 뿐더러 조금 전에는 악몽까지 돌아온 지영은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었고, 그녀 앞에는 민철 뿐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화제를 돌려 대화를 유지해 나갔다.


    “아참 그리고 민철씨 얘기 들었어요? 요즘 한국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살인마가 있대요. 뉴스에서 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이번 화제는 민철의 호기심을 산 듯, 민철이 먹던 밥을 잠시 멈추고 얘기를 했다.


    “나도 신문에서 읽은거 같았는데. 인천 어디서 죽인게 벌써 7명 째라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조심해. 우리도 매달 여행 가잖아. 그런놈들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워. 사이코들이라 겉모습은 멀쩡하단 말이야.”


    “네, 조심할께요.”


    지영이 민철의 걱정을 들으니 한결 나아 지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악몽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옆집 사내와 갑자기 떠오른 화제의 살인마가 지영의 머릿속에서 ㅤㄱㅕㅍ쳐진 듯 보였다.


    “무슨 고민있어?”


    민철이 심각한 지영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녀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지영은 한참을 뒤척이며 밤잠을 설쳤다. 거의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다. 대학 시절 그와 옆집 사내, 그리고 아직까지 잡히지 못한 살인마. 이 셋이 그녀를 괴롭혔다. 불쾌한 두 사내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더더욱 두려움에 빠지고 죽음 이라는 위협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리고 겨우 잠이 들었을 무렵 1년 째 나타나지 않았던 대학시절 사건이 그녀의 꿈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의 흉측한 얼굴은 그녀가 기억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일그러지고 악마스러웠다. 비록 꿈이었으나 그녀는 칼에 베이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 사각, 사각. 피부가 터지는 느낌과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


    지영이 꿈을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은, 당사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른 다는 것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똑같이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기 전 까지 그녀는 최고의 고통과 시련을 다시 겪어야 했고, 그때와 같이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 없었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 안방에서 나왔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잠옷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1층으로 내려와 냉장고 문을 열어 제꼈다. 냉수를 한잔 벌컥 들이킨 후에야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2시였다.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냈다. 검붉은 와인을 잔에다 따르는 동안, 다시 악몽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닮았었다. 와인과 그녀의 피. 옆집 사내와 대학시절 악마.


    그녀는 호기심에 창문을 내다 보았다. 저녁때에서야 안 사실이었으나 사내의 이삿짐은 몇가지 되지 않았었다. 지영의 집과 같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를 온 사람 치고는 터무니 없이 작은 살림이었다.


    그녀는 그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전주인이 온 정성을 들여 돌보았던 탓에 꽃들이 많이 싱싱했다. 지영은 요리 외에 다른 취미를 고려해 본적이 없었던 차라, 정원은 없었고, 그녀의 앞마당에는 그저 인조잔디 뿐이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사내의 창문을 바라 보았다. 여러 창문이 있었으나 그 중 유일하게 커튼이 있는 창문이었다. 아직 어두운 터라 비록 커튼의 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별로 우아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때 커튼이 움직였다. 그녀는 놀라 와인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커튼은 아까의 움직임에 의해 아직까지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분명히 지영의 상상이 아니었고, 커튼은 분명히 움직였다. 그가 거기에 서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아니, 왜?


    지영은 다시 두려움에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이 요동을 칠 정도였다. 그녀는 남은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착각일꺼야. 벌써 취했나봐.”


    그녀가 빈 와인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밤에 잠을 못한 덕에 지영은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있었다. 비록 집안일이 산더미였지만 그것들을 모두 미룬채 그녀는 시체처럼 쇼파에 누워 있었다. 아침을 안먹는 남편 덕에 그나마 아침에는 한가로운 그녀였다. 눈은 감고 있었으나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 민철이 언젠가 말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Paranoia causes insomnia.”


    “네?”


    “인썸니아의 원인은 파라노이아라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잠을 못이루는 것은 심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뜻이야.”


    몇년 전 같은 원인으로 밤잠을 설치던 지영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런 의외의 이해심이 많은 민철이 지영은 너무나 고마웠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라고.”


    “네…”


    그녀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그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고,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그녀가 소리를 높여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문 반대쪽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쇳소리 비슷한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저, 어제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입니다.”



















    3. Ho- Soo(호수)



    “안녕하세요, 김호수라고 합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에 같은 지저분함. 지영의 속을 메스껍게 하였다.


    “아, 예. 전 하지영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지영은 두려움과 역겨움에 거의 현기증이 나는 듯 했다.


    “근데 무슨일로…?”


    호수가 이제야 용건이 생각 났다는 듯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이웃사이인데 잘 해보자는 마음에 왔는데… 떡을 들고 와야 하는건데 혼자 살아서 떡 만드는 방법을 모르네요…”


    그가 웃을 때 그의 더러운 피부가 갈라지는 듯 주름이 졌다.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생김새를 가진 짐승과도 같았다. 그제서야 깨달은 사실이었으나 그에게서 심한 악취도 났다. 오래 씻지 않은 그런 땀냄새였고, 지영의 두려움은 혐오감에 의해 거의 사라진듯 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지영이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저기,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가 지영의 집 안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지영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가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호수는 지영이 마실 주스를 준비하는 동안 지영의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인테리어 디자이너 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는 편안하게 지영의 쇼파에 앉았다.


    “남편 성함이 오민철씨 맞죠?”


    그가 부엌에서 주스를 따르는 지영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그걸 어떻게…?’


    잠시 생각하던 지영이 호수를 바라보자 궁금증이 풀렸다. 호수는 민철이 예전에 따온 골프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민철의 이름 석자가 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 네.”


    그녀가 주스 두잔을 쟁반에 들고 오며 대답했다.


    민철과 지영은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국내로 여행을 자주 갔다. 지영이 비행기 멀미를 심하게 하는 탓이었다. 비록 같이 여행을 한다지만, 둘은 몇일 동안 서로 다른 일에 몰두했다. 민철은 여행을 갈때마다 골프코스가 있는 곳을 정해서 거기에 묵으며 골프를 쳤고, 지영은 호텔에 묵으며 이리저리 쇼핑을 했다. 비록 좋은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장보는 것이었지만, 지영에게는 마냥 즐거운 일이었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고, 취미였다. 그녀가 오랫동안 시달리던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남들이 바라봤을때 이런 민철과 지영을 이상하게 볼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서로의 취향을 맞춰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둘의 생각이었다. 민철이 지영을 따라 장을 보는 것도, 지영이 민철을 따라 골프를 치는 것도, 그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때문에 비록 목적지는 같았으나, 여행은 따로 했다.


    “남편분이 골프를 잘 치시나봐요.”


    호수가 잠시 넋 놓고 있던 지영에게 한마디 한 후,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저 컵은 내다 버려야지.’


    지영이 주스를 마시는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예요. 대회 많이 나간거 치고는 몇 개 못 따온거예요.”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영이 생각해봐도 자신이 너무 가식적인 듯 했다.


    “아, 남편분이 골프를 자주 치러 가시나요?”


    그가 또 민철에 대해서 물었다. 지영은 왠지 꺼림칙해지기 시작했다.


    “네, 조금요.”


    지영이 대답하자 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은 주스를 마저 들이켰다.


    “전 이만 가볼께요 그럼. 집을 참 잘 꾸미셨네요. 다음 번엔 제 집도 들려 주세요.”


    그가 나가자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지영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문 앞에 서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호수가 마시던 컵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4. Trip (여행)



    호수가 왔다 가서인지 지영은 한층더 심각한 상태였다. 불안함이 심해져 거의 몸살까지 날 지경이었다. 민철이 돌아왔을때 그녀는 집안 일은 커녕 저녁 준비도 못한 상태였다. 제시간에 저녁을 한번도 거른적이 없는 민철은 아무것도 준비를 안한 지영에게 신경질이 난 듯했다.


    “당신 오늘 하루종일 뭐했어?”


    민철이 양복 외투를 소파에 집어던지며 누워 있는 지영에게 물었다.


    “미안해요. 오늘 몸이 좀 아파서…”


    “그럼 전화를 주던가. 나보고 굶으라는 거야?”


    민철이 언성을 높였다. 지영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민철이 밉기만 했다.


    민철은 잠시 누워있던 지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말을 걸었다.


    “당신 어제도 잠을 설치는 거 같더니. 정말 무슨 일 있는거야?”


    “아무일도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내일부터 휴가요청 할테니까, 다시 여행 갔다가 오자.”


    지영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당신 이럴 때 여행가서 이것저것 사고 돌아와서 요리하고 나면 나아지곤 하잖아. 나도 골프치고 좋은 음식 먹고 좋지. 이번에는 장만 보지 말고 옷이나 그런 것도 사. 당신 아직 젊잖아. 알겠지?”


    그의 세심한 배려의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은 지영이었다. 그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여행이었다. 당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김호수라는 악마와 닮은 혐오한 자를 피해 있으면 지영은 완쾌할 듯 했다. 벌써부터 들뜬 기분에 지영은 웃음이 절로 났다.


    “어디 갈껀지 정해놔. 내일 내가 전화 주면 나와. 알겠지?”


    “충청도 공주 쪽에 소문난 정육점이 있대요.”


    민철이 지영의 말에 웃는다.


    “그래 그럼.”


    “저녁 지금이라도 드실래요?”


    민철이 고개를 젓는다.


    “아냐 됐어. 점심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 씻고 올께.”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여행준비를 마친 지영은 민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옷까지 다 차려 입은 채로, 무거운 배낭을 그녀 옆에 둔채 쇼파에 앉아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으나, 하루 빨리 지옥같은 이 곳에서, 지겨운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민철씨?”


    민철이가 맞았다. 그녀는 들뜬 기분에 민철이 나오라는 말을 기다렸지만, 민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어, 당신 미안해서 어쩌지? 휴가를 내려고 했는데, 요즘들어 휴가 낸 의사들이 너무 많아서, 일손이 많이 모자란대. 나까지 휴가를 낼수 없겠더라고.”


    민철의 말에 가슴이 철컹 내려 앉는 듯한 심정이었다.


    “아…”


    지영은 말을 잃을 정도였다.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당신 괜찮겠다면 혼자라도 갔다 올래? 당신 차 가지고 가면 되잖아.”


    지영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누구와는 상관 없이, 이 곳을 너무나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럼. 잘 다녀와. 그리고 미안해.”


    “괜찮아요.”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민철이 그녀 혼자만이라도 보내준 데에 감사했다. 사실 민철이 있으나 없으나 따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별 걱정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억지 웃음을 띄며 배낭을 맸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배낭을 내려놓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구멍으로 누가 초인종을 눌렀는지 내다 보았다.


    그녀가 본 사람은 호수였다. 그가 여전히 같은 옷차림으로 눈구멍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안에 계세요?”


    그가 누런 이빨을 들이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지영을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이 인간이 왜…’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열지는 않았다. 그렇게 계속 문구멍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더니 주먹으로 초인종을 내리쳤다.


    ‘띵동!’


    초인종이 사납게 울려퍼졌다. 지영은 문고리를 더욱 세게 잡았다. 그녀에게 다시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러나 호수는 돌아가는 듯 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지영은 그렇게 30여분 동안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도데체 왜 그 악마같은 사람이 그를 찾아 왔었을까. 과민반응이었을까? 그를 그냥 들여 보내주어야 했을까?


    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자를 한번만 더 집에 끌고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해봤다. 조금 안정이 되는 듯 했다.


    그녀가 다시 쇼파를 돌아봤다. 쇼파에는 그녀가 내던진 배낭이 놓여 있었다.


    ‘여행.’


    두 글자가 지영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여행. 그녀의 유일한 살 길이었다. 그녀는 다시 배낭을 맸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바깥의 차가운 저녁 바람을 맞자 왠지 그 자가 그녀를 보고 있을 듯 했다. 그녀는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에 달려가 차를 탔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이제 끝이다. 악몽은 끝이야.’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5. Death (죽음)




    죽음은 지영과 전혀 낯설 지 않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자신 역시 죽음에 문턱까지 다녀왔기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담담할 수 있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몇 일 여행을 떠나 돌아온 뒤 민철이 그녀에게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죽었대 그 사람.”


    그녀가 주방에서 여행다니는 동안 사온 음식 재료들을 꺼내며 물었다.


    “누가요?”


    “우리 옆집 이사 온 사람.”


    민철이 대답했다. 의사 답게 그 역시 죽음에 대해 담담했었다.


    “아… 어쩌다가요?”


    그녀가 궁금한 척 하며 물었다. 사실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심 잘 ㅤㄷㅚㅆ다고 생각 할 정도였으니.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그 살인마의 8번째 타겟이었을 가능성이 높대.”


    그녀가 멈칫했다. 살인마…


    “그래요…?”


    그녀가 고기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지않아? 당신이 때마침 떠날때 일어나서… 안그럼 당신이 죽었을 지도 모르잖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지영의 착각이었을까, 민철의 그 말은 왠지 협박으로 들렸다.


    그녀는 고기 덩어리들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당신 내가 여행 갔다가 온 동안 계속 집에 있었어요?”


    “응? 응. 그랬지. 근데 왜?”


    민철이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당신 오늘 좋아하는 스테이크 해 드릴께요. 좋은 고기 사왔어요.”


    민철이 지영을 잠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맛있겠네.”














    6. Aftermath (뒷 이야기)




    “… 그렇게 해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 셋을 뽑아 왔습니다.”


    강력반 형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중 반장으로 보이는 자는 회의실 가장 끄트머리에서 프로젝터에 나온 용의자들의 얼굴들을 유심히 살폈다.


    “인상착의, 주 여행지, 나이, 그 외 여러가지 요소가 살인마와 정확히 들어 맞는 것으로 판정 났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불을 모두 끈 상태였기에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저번 처럼 허탕치면, 이번엔 네 모가지인거… 알지?”


    반장이 물었다. 살인마의 4번째 살인 때 사내가 저지른 실수를 묻는 것이었다.


    “네.”


    사내가 의기소침해 대답했다.


    “그럼 용의자들 한테 애들 붙여서 잠복근무 시켜. 이번이 마지막이다 김형사.”


    그때 불들이 켜지고 프리젠테이션이 끝이 났다. 다른 형사들은 모두 숨죽이고 김형사의 얼굴을 살폈다.


    덥수룩한 머리에 안깍은지 오래 된 수염. 게다가 이번에 터진 연쇄 살인범 케이스 때문에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였다. 더럽기 짝이 없는 그가 반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내가 맡는다. 그리고 종수, 강민 너희 둘은 이 사람 맡고, 지오하고 영민이가 남은 한 명 맡아.”


    김형사가 지시했다. 그의 말은 곧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자신 혼자 맡겠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지 알았다. 특히 이번 연쇄 살인범의 성격으로 보아, 거의 목숨을 내놓는 듯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해야만 했다. 자신이 살인범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연달아 3명이 더 죽은 것 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수 형. 그러지 말고 반장님한테 인원 한명만 더 붙여달라고 그러지. 혼자서는 무리야. 특히 잠복근무는…”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걱정말고 가서 일들 봐.”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형사들을 해산시켰다. 그가 다리를 절둑 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살인범이 4번째 살인을 저지를 때, 그를 쫓던 중 차에 부딛혀 난 사고 휴유증이었다. 모두들 자리를 비우자 그가 용의자 파일을 들여다 보았다.


    “오민철…”


    용의자의 이름칸에 적혀있던 이름이었다.











    호수는 운이 좋았다. 때마침 용의자의 옆집이 비어있었고, 집주인의 양해를 구해 이사오는 척 잠복근무를 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사’ 오던 날, 그는 짐꾼들에게 지시를 하는 척 하며 용의자의 집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용의자 파일에서는 직업이 외과 의사였고, 의사 답게 집도 으리으리 했다. 그렇게 둘러보던 중, 대문에서 그를 바라보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인이었다. 호수의 기억으로 그녀의 이름은 하지영이었고, 오민철과 결혼한지 몇년 되지 않았었다. 그녀는 호수를 보고 놀란듯, 충격에 빠진 듯 했다. 그런 지영에게 호수는 손짓해 인사를 해 보였다. 그녀는 못 봤는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호수는 의아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호수는 하루종일 만원경으로 용의자의 집을 내다 보았다. 용의자는 7시경에 집에 들어왔고, 호수는 용의자의 차번호까지 정확히 적어 두었다.그렇게 날이 저물었고, 호수는 슬슬 피곤에 지쳐있었다.


    “역시 혼자는 무린가…?”


    그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용의자의 집 안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였다. 시각은 새벽 2시였고, 모두 잠든 줄 알았던 호수였기에 더욱 놀라 만원경을 집어들었다.


    자세히 보니 지영이 그저 물을 마시러 나온 것이었다. 호수는 괜히 놀랐다는 듯 웃으며 만원경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이 있었고, 반드시 살인범을 체포해야 했다. 더이상 무의미한 살인은 보고 싶지 않았다.










    호수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민철이 출근 하고 있었다. 민철을 미행하려고 했으나, 그것보다는 민철의 사는 집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심이 될 무렵 민철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우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그가 대답했다.


    “저, 어제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입니다.”


    잠시 인기척이 없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지영의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런 사람의 남편이 연쇄 살인범이라… 만약 사실이었다면 너무나 안타까울 것이었다. 잡혀가는 민철의 모습을 보며 이 여인의 맑고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춰서는, 마음을 굳게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호수의 목적은 살인범을 잡아 이유없이 죽은 영혼들을 달래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실례가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호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으려 두리번 거렸다. 지영은 주스를 내놓겠다고 주방으로 갔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민철이 딴 골프 트로피들 몇 개였다. 이것을 계기로 민철에 관해 조금 더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에 호수는 대뜸 물었다.


    “남편분이 골프를 잘 치시나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왠지 불쾌감이 느껴졌다. 불쾌감과 두려움… 형사 경력이 10년이 다되가는 호수에게 뻔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예요. 대회 많이 나간거 치고는 몇 개 못 따온거예요.”


    왠지 딱딱 들어 맞는 듯 했다. 골프를 나가는 척하며 아내 몰래 살인을 저지른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트로피가 몇개 없겠지. 사람 죽이기 바쁘니까.


    그가 주스를 마시며 겉눈질로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민철의 이름표가 달린 골프백은 보였으나 지영은 골프채가 없는 듯 했다. 아직 판정짓긴 일렀지만, 왠지 호수의 느낌에 와닿았다. 민철이 가장 유력했으니까.


    “전 이만 가볼께요 그럼. 집을 참 잘 꾸미셨네요. 다음 번엔 제 집도 들려 주세요.”


    호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수는 하루 종일 생각에 빠졌다. 지금 상황으로써 민철이 가장 유력했고, 때문에 그를 24시간 미행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민철이 7시에 정확히 귀가하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7시 부터 그는 약간의 취침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잠에 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인마, 넌 꼭 잡힌다.’







    다음 날, 민철이 나가는 것을 따라 나가려던 호수는 만원경으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지영이 왠일인지 배낭을 싸드는 것이었다. 마치 여행을 가는 듯이…


    호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곧 민철이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뜻. 그는 민철을 미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민철이 ‘골프’를 치러 갈 때를 기다려, 범행 순간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호수는 이미 민철이 살인마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지영이 배낭을 싸메고 민철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는지 지영이 전화를 받았고, 이내 수화기를 내려 놓더니 배낭을 메고 나가려는 눈치였다. 무언가가 잘못 된 눈치였다. 민철이 낌새를 챈건가…?


    비록 다리를 저는 상황이었으나, 호수는 재빨리 지영의 집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무언가를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의 지영을 보고 한마디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그러나 문은 열리지가 않았다. 호수가 귀를 기울였지만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어째서 문을 열지 않는 거지? 그가 화가나 초인종을 주먹으로 쳐서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호수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왠지 무언가가 굉장히 잘못 돌아가는 듯했다. 민철이 낌새를 채고 지영에게 전화를 준 것이었나? 그래서 지영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그렇게 다시 생각에 빠지던 중, 지영의 집 앞에서 그녀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호수는 재빨리 일어나 지영의 차가 가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집에서 나와 지영이 눈치 채지 못하게 차를 몰고 뒤쫓아 갔다.


    지영이 차를 몰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듯 하더니, 이내 시내로 나가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호수는 차 안에서 지영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녀는 걷고 걸어서 어느 여관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호수는 의아했다. 어째서 집을 놔두고 여관으로 가는 건지… 호수는 뭐가 뭔지 몰랐다. 그때 호수가 떠올랐다. 그의 목적은 지영이 아니라 민철이었다는 것을. 그가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민철은 이미 귀가한 듯 했고,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지영이 사라진데에도 별 대수가 아니었는지 그저 티비를 보고 자장면을 시켜 먹은 것 외에는 없었다. 호수는 헛다리를 짚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호수가 시계를 보니 밤 12시였고, 민철은 티비를 보다가 곯아 떨어진듯 했다. 호수의 주소를 아는 사람은 강력반 형사들 뿐. 그들이 여기에 어쩐 일로 왔는 지 그가 문구멍으로 내다 보았다.


    뜻밖에도 문 밖에 서있던 것은 지영이었다. 아까의 옷차림 그대로였고, 호수는 놀라 문을 열어 제꼈다.


    “무슨 일이세요, 지영씨?”


    지영이 느닷없이 호수의 품에 안겼다. 때문에 호수는 뒤로 밀쳐저 몇 발 물러나게 되었다.


    “왜, 왜 이러세요?”


    비록 당황 했으나 지영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포근함은 아니었다. 따뜻함은 잠시였고, 금세 호수의 배 주위가 얼음처럼 차가워 지는 듯 했다.


    “지…지영씨…”


    호수가 뒷걸음 치다 넘어졌다.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의 배에 시퍼런 식칼이 꽂혀 있었다는 것을. 숨쉬기가 점점 가빠졌다. 그리고 지영이 문을 닫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네가 날 잡겠다고…?”




















    “충청도 공주?”


    민철이 고기를 한입 먹으며 물었다. 그리고 와인을 한잔 들이켰다.


    “네. 소문대로 고기가 참 맛있지요?”


    “그렇네. 난 그것보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풀수 있어서 기뻐. 당신은 그나마 취미생활 하나 있어서 참 다행이야.”


    지영이 솜씨있는 실력으로 고기를 자르며 미소를 가득 띈 채 대답했다.






    “당신이 맛있으면 그걸로 됐어요.”







    단편] 옆집남자
    작성자 로버트아바타사물함보기 | 쪽지보내기 | 작성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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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0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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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collection (회상)



    지영은 어느 때와 같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냄비에 물을 끓이며, 당근을 자르는 게 뭐 그리 흥이 나는 지 콧바람을 흥얼흥얼 거렸다. 앞치마를 두른 모양새가 지영의 빼어난 몸매를 두각 시켰다. 유행에 따르는 단발 머리 역시 그녀의 외모를 더 멋지게 했다.


    20대 후기의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요리였다. 그것도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을 해주는 것. 그것이 그녀의 삶의 낙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녀가 다져진 당근들을 끓는 냄비에 쏟아 담았다. 그리고 삶은 감자들을 칼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콧바람 소리가 한층 더 커졌고, 이내 노래로 자연스럽게 노래로 이어졌다.


    “네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마냥 걷다 걷다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구슬이 은쟁반 굴러가듯한 주옥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와 너무나 어울리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였다. 그녀가 감자를 썰어 내려살 무렵, 그때 집 마당 앞에 차가 주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시계를 쳐다 보았다. 시계는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이가 벌써 오셨나? 아직 오려면 멀었을 텐데..?”


    그녀가 식칼을 내려놓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은 뒤 부엌을 빠져나왔다. 카페트가 깔린 거실 바닥을 밟으며 앞치마를 의자에 걸쳐 놓고 현관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녀가 남편의 차로 착각한 것은 트럭이었고, 그녀 집 앞이 아닌 옆 집 앞에 세워 져 있었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려할 때, 트럭의 스티커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퀵 이삿짐 센터-


    그녀가 다시 현관문을 열고 조금더 자세히 밖을 내다 보았다.


    이삿짐 트럭에서 직원들 세명이 내려 트럭 뒤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셋이서 다 같이 커다란 장롱 하나를 트럭에서 꺼냈다. 이와 동시에 때마침 작은 검은색 승용차가 트럭 뒤에 섰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30대 중반정도 되 보이는 사내였다. 덥수룩한 수염에 더벅머리가 마치 야인을 연상시켰고, 옷 역시 하얀 와이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으나 왠지 모른듯한 구질구질한 느낌과 싼티를 냈다.


    그는 이삿짐 직원들에게 여기저기 가리키며 무언가를 지시했고, 직원들은 그저 끄덕끄덕 거렸다. 그는 흡족하다는 듯 웃었고,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보았다.


    그때 대문을 열고 그를 주시하던 지영과 눈이 마주쳤다. 지영은 왠지 모를 듯한 소름을 느꼈다.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그런 혐오감을 사내가 보여주었다. 살기와 욕망이 가득한 눈빛, 살짝 드러난 구역질 나는 누런 이빨.


    그러나 지영을 질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사내의 외모가 아니었다. 지영은 사내가 차에서 나올 때 부터 보았다. 그는 왼쪽 발을 약간 절은 다는 것을. 마치 무릎부상을 당한 축구 선수가 필드를 걸어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팡이도, 크러치도 없었다.


    너무나 닮았었다, 그 악마와.


    지영은 잠시 생각에 빠졌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아니, 악몽을 꾸는 듯.













    처음부터 그에 대한 혐오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정 반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지영이 본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순하고 젠틀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지영이 대학시절 때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그가 아이들 밥을 챙겨주며 지영에게 던졌던 한마디가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눈이 참 예쁘시네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당황한 지영이었지만, 마냥 싫지 만은 않았다. 훤칠한 키에 각진 얼굴, 잘 다져진 몸매에 감미로운 목소리. 거의 완벽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흠이 있었다면 그가 왼발을 약간 절었다는 것이었다.


    “아, 이거요?”


    그들이 고아원의 만남을 계기로 사귄지 몇주째 되는 날, 지영이 그가 상처 받지 않을 까 조마조마 하며 용기를 내어 그의 다리에 대해서 물었다.


    “어렸을 때 겪은 교통사고 휴유증이예요.”


    그가 멋쩍은 웃음을 띄며 말했다. 지영은 그런 그 남자의 모습에 더욱 더 빠져들게 되었고, 드디어 그녀에게 사랑이란게 찾아오는 듯 했다.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고, 때문에 지영은 그런 일이 그녀에게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만난지 5주째 되는 날, 지영이 그와 함께 시골에 있는 별장으로 여행을 갔다. 아직 한번도 같이 자본 적이 없는 지영으로서는 매우 설레이는 여행이었다. 자제를 하려 노력했었지만, 여행 시작부터 그녀는 그들의 ‘첫날밤’ 생각 뿐이었다.

    별장에 낮에 도착한 그들은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은 뒤 그의 차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었고, 지영은 이미 만발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또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 믿었기에, 그녀의 몸을 내주기로 준비를 했었던 것이었다.


    둘은 별장 안으로 발을 딛자 마자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열이 오르고 사랑이 피어갈 무렵, 그가 하던 것을 갑작스레 멈추었다. 지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고 순간 뇌리에 스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경험 때문에 그가 관심을 잃었던 것일까…?


    “자기, 왜 그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둘은 알몸 이었고, 땀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특히 그의 붉게 상기된 얼굴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난 사실,취향이 따로 있는데… 이렇게 하니까 제대로 못하겠어.”


    그가 한숨을 쉬며 지영의 위에서 내려와 옆으로 누웠다. 지영은 어쩔줄 몰랐다. 어떻게든 그의 취향에 맞추고 싶었고 어떻게든 그의 마음에 들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취향? 어떤거인데?”


    그의 취향대로 따르기로 한 지영은 침대에 팔다리 모두 묶인 채로 입에 재갈까지 물렸다. 하지만 그녀는 기뻤다. 그렇게라도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그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어서였다. 적어도 그가 부엌에서 식칼을 빼오기 전까지.


    그녀는 그것이 그의 짓궂은 장난인 줄 알았다. 아니, 연기일 뿐이라고 굳게 그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슴없이 그녀의 팔을 베었다. 마치 회를 뜨는 듯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렇게 사악 베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고, 그의 실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살살 열린 피부 사이로 고여 나오는 피를 보고 히죽히죽 웃는 그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재갈을 단단히 물려 소리가 나질 않았다. 발버둥 치려 했으나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팔을 베었다. 피가 솟구쳐 침대 시트를 적셨고, 그녀가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느라 통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피범벅이가 된 채로 그녀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가 좀 전까지만 해도 따듯하고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사람에게서 나오는 같은 미소였으나 그녀를 두려움에 빠뜨렸고,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악몽에 시달리게 한 섬뜩한 미소였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열심히 가구들을 나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고통과 분노의 눈물이었다. 그때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참! 가스불!”


    그녀가 잠시 잊고 있던 주방으로 달려갔다. 끓는 물에 담가 두었던 당근은 물이 반쯤 증발해 버릴 정도로 오래 끓인 덕에 불어서 못쓰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스불을 끄고 냄비를 집으려다 손잡이에 손을 데었고, 냄비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당근과 뜨거운 물이 바닥을 누볐다.


    “아 뜨거워…”


    그녀가 두 손가락으로 귓볼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요리에서 만큼은 실수가 없던 지영에게는 벌어 질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그 악몽이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끼치는 대단한 영향력을.















    2. 파라노이아 & 인썸니아 (Paranoia & Insomnia)




    겸사겸사 요리를 마치 지영은 남편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였던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려 했으나, 조금 전에 있었던 실수에다 쉽게 떨쳐버릴수 없는 불안감과 수치에 요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둘은 늘 그렇듯 마주보며 거실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깔금히 정돈 된 거실이었다. 군데군데 화분들도 놓여져 있었고, 남편이 따온 골프 트로피와 여기저기서 받은 상들도 전시 되어 있었다.


    “오늘은 요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지영이 한마디 내던졌다. 그의 남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사를 계속 했다. 그녀의 남편은 알아주는 외과 의사였다. 이름은 오민철 이었고, 나이는 지영과 15살이나 차이가 났었다. 머리 숱도 얼마 없었을 뿐더러, 몸매 역시 볼품없었다.


    지영이 대학시절 악몽을 조금씩 벗어나며 만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악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녀 밖에 없었다. 신고도 하지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때문에 한동안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기도 했었다. 민철은 그 악마와 정반대였다. 무뚝뚝한 성격에 볼품없는 외모, 게다가 나이도 훨씬 많았었다. 때문에 지영이 조금 안심하고 결혼까지 서둘러 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민철의 의견에 따라 아이가 없었고, 2세 계획 조차 전혀 없었다.


    “아참, 오늘 누가 이사 옆집으로 이사왔어요.”


    지영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응, 봤어.”


    민철이 다시 짤막 하게 대답했다. 하루종일 혼자 있었을 뿐더러 조금 전에는 악몽까지 돌아온 지영은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었고, 그녀 앞에는 민철 뿐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화제를 돌려 대화를 유지해 나갔다.


    “아참 그리고 민철씨 얘기 들었어요? 요즘 한국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살인마가 있대요. 뉴스에서 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이번 화제는 민철의 호기심을 산 듯, 민철이 먹던 밥을 잠시 멈추고 얘기를 했다.


    “나도 신문에서 읽은거 같았는데. 인천 어디서 죽인게 벌써 7명 째라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조심해. 우리도 매달 여행 가잖아. 그런놈들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워. 사이코들이라 겉모습은 멀쩡하단 말이야.”


    “네, 조심할께요.”


    지영이 민철의 걱정을 들으니 한결 나아 지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악몽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옆집 사내와 갑자기 떠오른 화제의 살인마가 지영의 머릿속에서 ㅤㄱㅕㅍ쳐진 듯 보였다.


    “무슨 고민있어?”


    민철이 심각한 지영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녀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지영은 한참을 뒤척이며 밤잠을 설쳤다. 거의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다. 대학 시절 그와 옆집 사내, 그리고 아직까지 잡히지 못한 살인마. 이 셋이 그녀를 괴롭혔다. 불쾌한 두 사내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더더욱 두려움에 빠지고 죽음 이라는 위협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리고 겨우 잠이 들었을 무렵 1년 째 나타나지 않았던 대학시절 사건이 그녀의 꿈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의 흉측한 얼굴은 그녀가 기억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일그러지고 악마스러웠다. 비록 꿈이었으나 그녀는 칼에 베이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 사각, 사각. 피부가 터지는 느낌과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


    지영이 꿈을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은, 당사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른 다는 것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똑같이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기 전 까지 그녀는 최고의 고통과 시련을 다시 겪어야 했고, 그때와 같이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 없었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 안방에서 나왔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잠옷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1층으로 내려와 냉장고 문을 열어 제꼈다. 냉수를 한잔 벌컥 들이킨 후에야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2시였다.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냈다. 검붉은 와인을 잔에다 따르는 동안, 다시 악몽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닮았었다. 와인과 그녀의 피. 옆집 사내와 대학시절 악마.


    그녀는 호기심에 창문을 내다 보았다. 저녁때에서야 안 사실이었으나 사내의 이삿짐은 몇가지 되지 않았었다. 지영의 집과 같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를 온 사람 치고는 터무니 없이 작은 살림이었다.


    그녀는 그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전주인이 온 정성을 들여 돌보았던 탓에 꽃들이 많이 싱싱했다. 지영은 요리 외에 다른 취미를 고려해 본적이 없었던 차라, 정원은 없었고, 그녀의 앞마당에는 그저 인조잔디 뿐이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사내의 창문을 바라 보았다. 여러 창문이 있었으나 그 중 유일하게 커튼이 있는 창문이었다. 아직 어두운 터라 비록 커튼의 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별로 우아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때 커튼이 움직였다. 그녀는 놀라 와인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커튼은 아까의 움직임에 의해 아직까지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분명히 지영의 상상이 아니었고, 커튼은 분명히 움직였다. 그가 거기에 서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아니, 왜?


    지영은 다시 두려움에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이 요동을 칠 정도였다. 그녀는 남은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착각일꺼야. 벌써 취했나봐.”


    그녀가 빈 와인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밤에 잠을 못한 덕에 지영은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있었다. 비록 집안일이 산더미였지만 그것들을 모두 미룬채 그녀는 시체처럼 쇼파에 누워 있었다. 아침을 안먹는 남편 덕에 그나마 아침에는 한가로운 그녀였다. 눈은 감고 있었으나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 민철이 언젠가 말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Paranoia causes insomnia.”


    “네?”


    “인썸니아의 원인은 파라노이아라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잠을 못이루는 것은 심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뜻이야.”


    몇년 전 같은 원인으로 밤잠을 설치던 지영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런 의외의 이해심이 많은 민철이 지영은 너무나 고마웠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라고.”


    “네…”


    그녀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그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고,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그녀가 소리를 높여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문 반대쪽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쇳소리 비슷한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저, 어제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입니다.”



















    3. Ho- Soo(호수)



    “안녕하세요, 김호수라고 합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에 같은 지저분함. 지영의 속을 메스껍게 하였다.


    “아, 예. 전 하지영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지영은 두려움과 역겨움에 거의 현기증이 나는 듯 했다.


    “근데 무슨일로…?”


    호수가 이제야 용건이 생각 났다는 듯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이웃사이인데 잘 해보자는 마음에 왔는데… 떡을 들고 와야 하는건데 혼자 살아서 떡 만드는 방법을 모르네요…”


    그가 웃을 때 그의 더러운 피부가 갈라지는 듯 주름이 졌다.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생김새를 가진 짐승과도 같았다. 그제서야 깨달은 사실이었으나 그에게서 심한 악취도 났다. 오래 씻지 않은 그런 땀냄새였고, 지영의 두려움은 혐오감에 의해 거의 사라진듯 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지영이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저기,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가 지영의 집 안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지영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가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호수는 지영이 마실 주스를 준비하는 동안 지영의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인테리어 디자이너 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는 편안하게 지영의 쇼파에 앉았다.


    “남편 성함이 오민철씨 맞죠?”


    그가 부엌에서 주스를 따르는 지영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그걸 어떻게…?’


    잠시 생각하던 지영이 호수를 바라보자 궁금증이 풀렸다. 호수는 민철이 예전에 따온 골프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민철의 이름 석자가 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 네.”


    그녀가 주스 두잔을 쟁반에 들고 오며 대답했다.


    민철과 지영은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국내로 여행을 자주 갔다. 지영이 비행기 멀미를 심하게 하는 탓이었다. 비록 같이 여행을 한다지만, 둘은 몇일 동안 서로 다른 일에 몰두했다. 민철은 여행을 갈때마다 골프코스가 있는 곳을 정해서 거기에 묵으며 골프를 쳤고, 지영은 호텔에 묵으며 이리저리 쇼핑을 했다. 비록 좋은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장보는 것이었지만, 지영에게는 마냥 즐거운 일이었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고, 취미였다. 그녀가 오랫동안 시달리던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남들이 바라봤을때 이런 민철과 지영을 이상하게 볼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서로의 취향을 맞춰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둘의 생각이었다. 민철이 지영을 따라 장을 보는 것도, 지영이 민철을 따라 골프를 치는 것도, 그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때문에 비록 목적지는 같았으나, 여행은 따로 했다.


    “남편분이 골프를 잘 치시나봐요.”


    호수가 잠시 넋 놓고 있던 지영에게 한마디 한 후,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저 컵은 내다 버려야지.’


    지영이 주스를 마시는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예요. 대회 많이 나간거 치고는 몇 개 못 따온거예요.”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영이 생각해봐도 자신이 너무 가식적인 듯 했다.


    “아, 남편분이 골프를 자주 치러 가시나요?”


    그가 또 민철에 대해서 물었다. 지영은 왠지 꺼림칙해지기 시작했다.


    “네, 조금요.”


    지영이 대답하자 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은 주스를 마저 들이켰다.


    “전 이만 가볼께요 그럼. 집을 참 잘 꾸미셨네요. 다음 번엔 제 집도 들려 주세요.”


    그가 나가자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지영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문 앞에 서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호수가 마시던 컵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4. Trip (여행)



    호수가 왔다 가서인지 지영은 한층더 심각한 상태였다. 불안함이 심해져 거의 몸살까지 날 지경이었다. 민철이 돌아왔을때 그녀는 집안 일은 커녕 저녁 준비도 못한 상태였다. 제시간에 저녁을 한번도 거른적이 없는 민철은 아무것도 준비를 안한 지영에게 신경질이 난 듯했다.


    “당신 오늘 하루종일 뭐했어?”


    민철이 양복 외투를 소파에 집어던지며 누워 있는 지영에게 물었다.


    “미안해요. 오늘 몸이 좀 아파서…”


    “그럼 전화를 주던가. 나보고 굶으라는 거야?”


    민철이 언성을 높였다. 지영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민철이 밉기만 했다.


    민철은 잠시 누워있던 지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말을 걸었다.


    “당신 어제도 잠을 설치는 거 같더니. 정말 무슨 일 있는거야?”


    “아무일도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내일부터 휴가요청 할테니까, 다시 여행 갔다가 오자.”


    지영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당신 이럴 때 여행가서 이것저것 사고 돌아와서 요리하고 나면 나아지곤 하잖아. 나도 골프치고 좋은 음식 먹고 좋지. 이번에는 장만 보지 말고 옷이나 그런 것도 사. 당신 아직 젊잖아. 알겠지?”


    그의 세심한 배려의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은 지영이었다. 그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여행이었다. 당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김호수라는 악마와 닮은 혐오한 자를 피해 있으면 지영은 완쾌할 듯 했다. 벌써부터 들뜬 기분에 지영은 웃음이 절로 났다.


    “어디 갈껀지 정해놔. 내일 내가 전화 주면 나와. 알겠지?”


    “충청도 공주 쪽에 소문난 정육점이 있대요.”


    민철이 지영의 말에 웃는다.


    “그래 그럼.”


    “저녁 지금이라도 드실래요?”


    민철이 고개를 젓는다.


    “아냐 됐어. 점심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 씻고 올께.”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여행준비를 마친 지영은 민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옷까지 다 차려 입은 채로, 무거운 배낭을 그녀 옆에 둔채 쇼파에 앉아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으나, 하루 빨리 지옥같은 이 곳에서, 지겨운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민철씨?”


    민철이가 맞았다. 그녀는 들뜬 기분에 민철이 나오라는 말을 기다렸지만, 민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어, 당신 미안해서 어쩌지? 휴가를 내려고 했는데, 요즘들어 휴가 낸 의사들이 너무 많아서, 일손이 많이 모자란대. 나까지 휴가를 낼수 없겠더라고.”


    민철의 말에 가슴이 철컹 내려 앉는 듯한 심정이었다.


    “아…”


    지영은 말을 잃을 정도였다.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당신 괜찮겠다면 혼자라도 갔다 올래? 당신 차 가지고 가면 되잖아.”


    지영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누구와는 상관 없이, 이 곳을 너무나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럼. 잘 다녀와. 그리고 미안해.”


    “괜찮아요.”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민철이 그녀 혼자만이라도 보내준 데에 감사했다. 사실 민철이 있으나 없으나 따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별 걱정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억지 웃음을 띄며 배낭을 맸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배낭을 내려놓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구멍으로 누가 초인종을 눌렀는지 내다 보았다.


    그녀가 본 사람은 호수였다. 그가 여전히 같은 옷차림으로 눈구멍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안에 계세요?”


    그가 누런 이빨을 들이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지영을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이 인간이 왜…’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열지는 않았다. 그렇게 계속 문구멍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더니 주먹으로 초인종을 내리쳤다.


    ‘띵동!’


    초인종이 사납게 울려퍼졌다. 지영은 문고리를 더욱 세게 잡았다. 그녀에게 다시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러나 호수는 돌아가는 듯 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지영은 그렇게 30여분 동안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도데체 왜 그 악마같은 사람이 그를 찾아 왔었을까. 과민반응이었을까? 그를 그냥 들여 보내주어야 했을까?


    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자를 한번만 더 집에 끌고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해봤다. 조금 안정이 되는 듯 했다.


    그녀가 다시 쇼파를 돌아봤다. 쇼파에는 그녀가 내던진 배낭이 놓여 있었다.


    ‘여행.’


    두 글자가 지영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여행. 그녀의 유일한 살 길이었다. 그녀는 다시 배낭을 맸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바깥의 차가운 저녁 바람을 맞자 왠지 그 자가 그녀를 보고 있을 듯 했다. 그녀는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에 달려가 차를 탔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이제 끝이다. 악몽은 끝이야.’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5. Death (죽음)




    죽음은 지영과 전혀 낯설 지 않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자신 역시 죽음에 문턱까지 다녀왔기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담담할 수 있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몇 일 여행을 떠나 돌아온 뒤 민철이 그녀에게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죽었대 그 사람.”


    그녀가 주방에서 여행다니는 동안 사온 음식 재료들을 꺼내며 물었다.


    “누가요?”


    “우리 옆집 이사 온 사람.”


    민철이 대답했다. 의사 답게 그 역시 죽음에 대해 담담했었다.


    “아… 어쩌다가요?”


    그녀가 궁금한 척 하며 물었다. 사실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심 잘 ㅤㄷㅚㅆ다고 생각 할 정도였으니.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그 살인마의 8번째 타겟이었을 가능성이 높대.”


    그녀가 멈칫했다. 살인마…


    “그래요…?”


    그녀가 고기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지않아? 당신이 때마침 떠날때 일어나서… 안그럼 당신이 죽었을 지도 모르잖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지영의 착각이었을까, 민철의 그 말은 왠지 협박으로 들렸다.


    그녀는 고기 덩어리들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당신 내가 여행 갔다가 온 동안 계속 집에 있었어요?”


    “응? 응. 그랬지. 근데 왜?”


    민철이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당신 오늘 좋아하는 스테이크 해 드릴께요. 좋은 고기 사왔어요.”


    민철이 지영을 잠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맛있겠네.”














    6. Aftermath (뒷 이야기)




    “… 그렇게 해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 셋을 뽑아 왔습니다.”


    강력반 형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중 반장으로 보이는 자는 회의실 가장 끄트머리에서 프로젝터에 나온 용의자들의 얼굴들을 유심히 살폈다.


    “인상착의, 주 여행지, 나이, 그 외 여러가지 요소가 살인마와 정확히 들어 맞는 것으로 판정 났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불을 모두 끈 상태였기에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저번 처럼 허탕치면, 이번엔 네 모가지인거… 알지?”


    반장이 물었다. 살인마의 4번째 살인 때 사내가 저지른 실수를 묻는 것이었다.


    “네.”


    사내가 의기소침해 대답했다.


    “그럼 용의자들 한테 애들 붙여서 잠복근무 시켜. 이번이 마지막이다 김형사.”


    그때 불들이 켜지고 프리젠테이션이 끝이 났다. 다른 형사들은 모두 숨죽이고 김형사의 얼굴을 살폈다.


    덥수룩한 머리에 안깍은지 오래 된 수염. 게다가 이번에 터진 연쇄 살인범 케이스 때문에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였다. 더럽기 짝이 없는 그가 반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내가 맡는다. 그리고 종수, 강민 너희 둘은 이 사람 맡고, 지오하고 영민이가 남은 한 명 맡아.”


    김형사가 지시했다. 그의 말은 곧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자신 혼자 맡겠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지 알았다. 특히 이번 연쇄 살인범의 성격으로 보아, 거의 목숨을 내놓는 듯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해야만 했다. 자신이 살인범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연달아 3명이 더 죽은 것 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수 형. 그러지 말고 반장님한테 인원 한명만 더 붙여달라고 그러지. 혼자서는 무리야. 특히 잠복근무는…”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걱정말고 가서 일들 봐.”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형사들을 해산시켰다. 그가 다리를 절둑 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살인범이 4번째 살인을 저지를 때, 그를 쫓던 중 차에 부딛혀 난 사고 휴유증이었다. 모두들 자리를 비우자 그가 용의자 파일을 들여다 보았다.


    “오민철…”


    용의자의 이름칸에 적혀있던 이름이었다.











    호수는 운이 좋았다. 때마침 용의자의 옆집이 비어있었고, 집주인의 양해를 구해 이사오는 척 잠복근무를 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사’ 오던 날, 그는 짐꾼들에게 지시를 하는 척 하며 용의자의 집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용의자 파일에서는 직업이 외과 의사였고, 의사 답게 집도 으리으리 했다. 그렇게 둘러보던 중, 대문에서 그를 바라보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인이었다. 호수의 기억으로 그녀의 이름은 하지영이었고, 오민철과 결혼한지 몇년 되지 않았었다. 그녀는 호수를 보고 놀란듯, 충격에 빠진 듯 했다. 그런 지영에게 호수는 손짓해 인사를 해 보였다. 그녀는 못 봤는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호수는 의아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호수는 하루종일 만원경으로 용의자의 집을 내다 보았다. 용의자는 7시경에 집에 들어왔고, 호수는 용의자의 차번호까지 정확히 적어 두었다.그렇게 날이 저물었고, 호수는 슬슬 피곤에 지쳐있었다.


    “역시 혼자는 무린가…?”


    그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용의자의 집 안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였다. 시각은 새벽 2시였고, 모두 잠든 줄 알았던 호수였기에 더욱 놀라 만원경을 집어들었다.


    자세히 보니 지영이 그저 물을 마시러 나온 것이었다. 호수는 괜히 놀랐다는 듯 웃으며 만원경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이 있었고, 반드시 살인범을 체포해야 했다. 더이상 무의미한 살인은 보고 싶지 않았다.










    호수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민철이 출근 하고 있었다. 민철을 미행하려고 했으나, 그것보다는 민철의 사는 집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심이 될 무렵 민철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우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그가 대답했다.


    “저, 어제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입니다.”


    잠시 인기척이 없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지영의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런 사람의 남편이 연쇄 살인범이라… 만약 사실이었다면 너무나 안타까울 것이었다. 잡혀가는 민철의 모습을 보며 이 여인의 맑고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춰서는, 마음을 굳게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호수의 목적은 살인범을 잡아 이유없이 죽은 영혼들을 달래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실례가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호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으려 두리번 거렸다. 지영은 주스를 내놓겠다고 주방으로 갔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민철이 딴 골프 트로피들 몇 개였다. 이것을 계기로 민철에 관해 조금 더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에 호수는 대뜸 물었다.


    “남편분이 골프를 잘 치시나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왠지 불쾌감이 느껴졌다. 불쾌감과 두려움… 형사 경력이 10년이 다되가는 호수에게 뻔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예요. 대회 많이 나간거 치고는 몇 개 못 따온거예요.”


    왠지 딱딱 들어 맞는 듯 했다. 골프를 나가는 척하며 아내 몰래 살인을 저지른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트로피가 몇개 없겠지. 사람 죽이기 바쁘니까.


    그가 주스를 마시며 겉눈질로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민철의 이름표가 달린 골프백은 보였으나 지영은 골프채가 없는 듯 했다. 아직 판정짓긴 일렀지만, 왠지 호수의 느낌에 와닿았다. 민철이 가장 유력했으니까.


    “전 이만 가볼께요 그럼. 집을 참 잘 꾸미셨네요. 다음 번엔 제 집도 들려 주세요.”


    호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수는 하루 종일 생각에 빠졌다. 지금 상황으로써 민철이 가장 유력했고, 때문에 그를 24시간 미행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민철이 7시에 정확히 귀가하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7시 부터 그는 약간의 취침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잠에 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인마, 넌 꼭 잡힌다.’







    다음 날, 민철이 나가는 것을 따라 나가려던 호수는 만원경으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지영이 왠일인지 배낭을 싸드는 것이었다. 마치 여행을 가는 듯이…


    호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곧 민철이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뜻. 그는 민철을 미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민철이 ‘골프’를 치러 갈 때를 기다려, 범행 순간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호수는 이미 민철이 살인마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지영이 배낭을 싸메고 민철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는지 지영이 전화를 받았고, 이내 수화기를 내려 놓더니 배낭을 메고 나가려는 눈치였다. 무언가가 잘못 된 눈치였다. 민철이 낌새를 챈건가…?


    비록 다리를 저는 상황이었으나, 호수는 재빨리 지영의 집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무언가를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의 지영을 보고 한마디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그러나 문은 열리지가 않았다. 호수가 귀를 기울였지만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어째서 문을 열지 않는 거지? 그가 화가나 초인종을 주먹으로 쳐서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호수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왠지 무언가가 굉장히 잘못 돌아가는 듯했다. 민철이 낌새를 채고 지영에게 전화를 준 것이었나? 그래서 지영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그렇게 다시 생각에 빠지던 중, 지영의 집 앞에서 그녀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호수는 재빨리 일어나 지영의 차가 가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집에서 나와 지영이 눈치 채지 못하게 차를 몰고 뒤쫓아 갔다.


    지영이 차를 몰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듯 하더니, 이내 시내로 나가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호수는 차 안에서 지영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녀는 걷고 걸어서 어느 여관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호수는 의아했다. 어째서 집을 놔두고 여관으로 가는 건지… 호수는 뭐가 뭔지 몰랐다. 그때 호수가 떠올랐다. 그의 목적은 지영이 아니라 민철이었다는 것을. 그가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민철은 이미 귀가한 듯 했고,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지영이 사라진데에도 별 대수가 아니었는지 그저 티비를 보고 자장면을 시켜 먹은 것 외에는 없었다. 호수는 헛다리를 짚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호수가 시계를 보니 밤 12시였고, 민철은 티비를 보다가 곯아 떨어진듯 했다. 호수의 주소를 아는 사람은 강력반 형사들 뿐. 그들이 여기에 어쩐 일로 왔는 지 그가 문구멍으로 내다 보았다.


    뜻밖에도 문 밖에 서있던 것은 지영이었다. 아까의 옷차림 그대로였고, 호수는 놀라 문을 열어 제꼈다.


    “무슨 일이세요, 지영씨?”


    지영이 느닷없이 호수의 품에 안겼다. 때문에 호수는 뒤로 밀쳐저 몇 발 물러나게 되었다.


    “왜, 왜 이러세요?”


    비록 당황 했으나 지영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포근함은 아니었다. 따뜻함은 잠시였고, 금세 호수의 배 주위가 얼음처럼 차가워 지는 듯 했다.


    “지…지영씨…”


    호수가 뒷걸음 치다 넘어졌다.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의 배에 시퍼런 식칼이 꽂혀 있었다는 것을. 숨쉬기가 점점 가빠졌다. 그리고 지영이 문을 닫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네가 날 잡겠다고…?”




















    “충청도 공주?”


    민철이 고기를 한입 먹으며 물었다. 그리고 와인을 한잔 들이켰다.


    “네. 소문대로 고기가 참 맛있지요?”


    “그렇네. 난 그것보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풀수 있어서 기뻐. 당신은 그나마 취미생활 하나 있어서 참 다행이야.”


    지영이 솜씨있는 실력으로 고기를 자르며 미소를 가득 띈 채 대답했다.






    “당신이 맛있으면 그걸로 됐어요.”


















































    출처




    웃대 - 로버트아바타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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