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는 남자애들이랑도 줄곧 잘 놀고 얘기도 서슴없이 했던 것 같다.
낯가림은 있었지만 그건 남자들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한테도 그러했고, 남자에 대해서만 유독 낯가림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때도 남자애들이 조금 낯설고 여자애들보다는 벽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기피하고 싶은 대상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아이들, 또는 남자들과 얘기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자신들과 얘기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두고 남자가 말을 붙이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중반, 왕따를 당했던 시점부터였을까, 고2인 지금까지 남자애들과 말을 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물론 자리를 비켜달라거나, 길을 막고 있는 애들한테 잠시 나와달라는 간단한 대화는 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굳이 말하자면 어느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남자라면 가게의 알바생, 미용실의 직원, 백화점의 판매원한테조차도 말을 못하겠고, 피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나를 유난히 예뻐하는 아빠는 오빠가 군에 입대한 후 마음이 허했던 것 같다. 최근들어 어찌보면 외로워 한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빠가 훈련소에 들어가던 날, 훈련소에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울음을 참다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는지 엄마와 내 어깨에 차례로 손을 얹었는데,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때도 소름이 끼쳤다.
아빠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빠가 나에게 무언가 나쁜 행동을 한것도, 성적으로 대한것도 아니다.
어릴때는 아빠랑 손도 잡고, 안기도 하고, 이마를 갖다대고 부비부비 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최근들어서 아빠가 가끔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토닥이는 것도 정말 싫어졌다.
싫어졌다기 보다는, 아빠가 만진 그 부위가 가시가 돋치는듯, 벌레가 기어가는 듯 미친듯이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런 아빠의 손을 계속 뿌리쳤다.
왜 그랬을까, 하고 매 순간 후회하고 죄송함을 느끼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으니 나로써는 더 답답하다.
지나가던 사람이 실수로 내 몸을 치고 지나갈 때, 그 사람이 여자라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지만,
그게 남자일때는 그 부분이 내 몸이 아닌 것 같고,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털어내고 긁는다.
그럼 그제서야 그 부분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고, 내가 긁은 부위의 쓰라림을 느끼며 모종의 안정감까지 든다.
학교에서 급식을 받을때, 남학생이 배식하는 건 왜인지 입에 대기도, 손을 대기도 싫어서 친구에게 줘버린다.
북적이는 곳에 가서 사람들, 남자들 사이에 치일때는 벌레가 가득 든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미칠 것 같다.
남자와 교제한다거나,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다거나, 스킨쉽을 하는 건 상상조차 안된다.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런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지나가는 사람이, 오빠의 지인이 아주 가끔씩 연락하고 싶다고 요구하는 때가 있었다.
예전이야 거절하지 못해서 몇번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만나지는 않았고, 지금은 시작 자체를 거부한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기분은 조금 좋았지만 그건 그냥 나 자신에 대한 만족일 뿐 남자와 대화하고 만나는 건 싫다.
문자라던가, 카카오톡을 이용해서 대화하는 건 가능하다. 어찌 보면 아주 쉽다.
내가 의식적으로 무시하면 이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자각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통화를 한다거나, 만난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니 더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