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도 착- no.1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시골길 위로 버스가 지나가자 뿌옇게 노란색 흙먼지가
버스의 진로를 따라 피어났다. 덕분에 희경이 앉은 가운데 자리에선 바깥
풍경이 마치 얇은 베일을 통해 바라보듯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저기 베이고
찢어진 갈색 비닐 시트만이 달랑 덮여진 좌석에 깊게 몸을 파묻자 불규칙적으로
덜컹대는 차체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얼마간은 적응이 안돼어서
울렁거리기 까지 하였으나 벌써 1시간째 그 진동속에 앉아 있으려니 희경은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반쯤 뜬 눈으로 뿌연 먼지 구름을 통해
희경은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0여분 전까지만 해도 드문드문 보이던
민가들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마을과 마을간의 경계 사이의 무인지대...
산과 산으로 가로막힌 채 골짜기에 자리잡은 산촌들만이 나열된 이곳의
지형적 특징때문에 창밖의 풍경은 민가에서 첩첩산중으로 다시 강에서
민가로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이 길을 다시 온게 얼마만인지 희경은 생각했다.
지난 여름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난 뒤에 걱정스런 마음으로 헐레벌떡
다녀간지 벌써 1년을 다 채워가고 있었다.
'1년이라...'
희경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지 느꼈다. 한배를 타고난 친언니를
첩첩 산중에 홀로 내버려 둔채 1년동안 제대로 연락한번 않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자신이 한심하고 무정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일이 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희경은 얼마전 자동 응답기의 테이프를 통해서 들은 언니의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희경아. 잘 지냈니? 언니야.... 서울서 일하려니 바쁘지... 이런 산골이지만
나도 할일없이 바빠서 전화 한번 하기도 힘들구나, 올 여름엔 한번 내려오지
않을래? 너도 머리좀 식혀야 하지 않겠니.. 내가 올라가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산골 생활에 익숙해져서 서울 공기 쐬기가 만만치가 않구나. 올수 있으면
연락 먼저 하고 와. 바쁘면 할수 없구...'
'바쁘긴 무슨...'
그렇다 바쁘다는 건 순전히 핑계였다. 글 쓴답시고 어느날 갑자기 산속으로
언니가 잠적해 버린 후로는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로간의 대화간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점점 타인이 돼어가는 듯한 감정을 숨기기 위한 핑계였다.
"덜컹!!"
한차례 차가 요동을 치는 바람에 희경은 현실과 꿈사이의 애매한 경계에서
벗어나서 거의 좌석 끝에 가서 걸린 엉덩이를 끌어당겨 앉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창밖의 풍경은 어느사이엔가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도로는 어느새
매끈하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져 있는것이 보였다. 아마도 조금전의
한차례 요동은 비포장길에서 포장돼 부분으로 넘어오면서 생긴 것일 터였다.
뿌연 흙먼지가 걷힌 창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풍경도 깊이를 알수 없는
수풀에서 도로보다 껑충 떨어진 곳을 흐르는 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아.. 다 와가는구나...'
희경은 눈에 익은 강줄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니인 진경이 지내고 있는
덕천리를 가기 위하여 건너야 하는 강이였다 조금만 지나면 강을 건너기 위한
작은 교량이 보일 것이다.
"어머, 저건?"
희경은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동떨어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채 입을 열었다. 분명 1년 전만 해도 거의 인적이 드문 조그만
산골 마을의 풍경이 그사이에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 한쪽을 조금 깍아내며 흉물 스럽게 들어선 건축물 이였다. 아마도 무슨
공장인듯한 그것은 건물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를 보고 있는것 같았다.
뿐만 아니였다, 예전에 건너 다녔던 작은 구 교량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곳에서
채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새로운 대형 교량이 건설중인것이 보였다
간신히 차 한대가 지나다니던 시멘트로 만든 예전 다리와는 달리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철골 구조의 다리는 단순히 넓이로만 따지자면 자동차 4대도 한꺼번에 지나
다닐수 있을듯이 보였다. 강의 양쪽 끝에서 시작된 공사는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듯 양쪽 끝이 서로 붙어있었고 나머지 부분적인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면 이 마을 버스도 좁은 예전 다리 대신 저 신교각을 이용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공장과 새로운 다리... 이 작은 산골 마을에 갑자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갑작스런 언니의 연락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흉하지 아가씨..."
갑작스런 목소리에 희경은 짐짓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건너편 자리에
구부정하게 기대어 앉은 노파가 보였다. 화려한 꽃무늬가 인쇄돼어 있는 몽빼바지에
갈색 가디건과 그 밑으로 보이는 노란색 티셔츠, 누런 느낌의 회색빛으로 바랜
백발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묵었음에도 탄력을 잃은 머리가 여기저기에서 마치
끊어진 기타줄 마냥 듬성듬성 삐져나와 있는것이 전형적인 시골 노파의 모습이였다.
"그렇네요.. 작년에만 해도 저런건 없었는데..."
"작년이라... 저놈 만들기 시작하기 직전에 왔었나 보구면... 하긴 급하게도
만들었지.. 무슨 대단한 걸 만드냐 했더니..."
"뭐하는 곳이에요?"
"늙은이가 뭐 아나... 우리 아들놈 말로는 무슨 퇴비 만드는 곳이랴.."
퇴비라.. 아마도 화학 비료를 만드는 공장을 얘기하는 모양이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공장 이름이나 비료 라는 글자라도 커다랗게 내걸었을 법도 한데 공장에는 아무런
표식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점이 은근히 묘한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아가씨처럼 젊은 처자가 우리 마을엔 왠일이야.. 누구 만나러 왔나?"
"예.. 언니가 덕천리에 살고 있어요."
"언니? 이름이 뭔데?"
"진경이에요.. 노진경"
"아구... 진경이 알지.. 내가 진경이야 알지. 진경이 동생이였구먼. 작년에
내가 발목을 다쳐서 읍내 병원에 누워 있는 바람에 못 봤었는데..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더니.. 언니를 닮아서 그랬었네 그려...."
"그런가요?"
희경은 언니를 알고 있다는 노파의 말에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경계심이 풀리자
겨우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런 시골의 마을 버스에서 만난 노파가
악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봤자 얼마나 무서운 짓을 할까봐 아까부터 경계를
하고 있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오랜 도시생활이 몸에 베인 탓이리라...
희경과 노파의 대화는 그렇게 덕천리 정거장에 도달할때까지 이어졌다.
"언니네 집으로 갈꺼지.. 나도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요"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희경의 손을 잡으며 노파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세요. 저도 와본지 오래 돼서 길이 가물가물하던 차에 잘 됐네요"
"그렇지.. 아가씨같은 도시 사람은 시골길 찾기 힘들어."
노파는 연신 웃으며 희경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심심하던 차에 길동무가
생긴 것이 기쁜듯 해 보였다. 희경은 틈틈이 노파의 말에 응대하면서 멀리 보이는
공장을 바라 보았다. 숲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하얗게 피어오르는
증기가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을 버스가 길을 돌아 나간 이후로 주위가 굉장히 조용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물론 잔잔하게 들리는 강의 물줄기 소리라던가 수풀 사이를
간간히 스치듯 지나가는 산바람 소리 같은 것은 들을 수 있었지만 예전에 왔을땐
이보단 더 다양한 소리를 들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기분 나쁜 적막 속에서 오로지 노파의 수다만이 희경의 귓속에 멤돌고 있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cla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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