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Q-5를 성공적으로 채택시킨 난창 항공기 공장은 새로운 공격기 개발 프로그램을 위해이미 60년대 부터 70년대까지 전세계 항공기 산업의 흐름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그 당시 트렌드인 가변익 구조에 주목합니다. 이미 소비에트 연방의 MIG-23, 미국의 F-111등 당시 여러 국가에서 사용하는 트렌드였으며 각 속도환경에 맞춰 날개를 펼치거나 접혀 효율을 높히고 비교적 짧은거리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며 저고도 고속 침투에 적합하다는 것은 중국 해군이나 육군이 원하는 진보된 공격 능력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 해답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 항공 산업은 한번도 가변익에 시도한적이 없어 기술적 어려움이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개발 비용을 높일것이며 날개 중량 증가나 비용 증가등 가변익 자체의 문제도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창 항공기 공장은 가변익 설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새로운 공격기 역시 가변익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1976년 6월, 3개의 연구소들은 베이징와 프로젝트를 논의하였고 가능한 빨리 프로젝트 최종 설계안을 제출하라고 지시 받았습니다. 여기서 각 회사들은기초 설계안을 들고와 각자의 설계를 공개적으로 공개했습니다. 난창 항공기 공장은 가변익 구조를 채택한 나중에 Q-6으로 불리는 설계를, 선양 항공기 공장은 지금의 JH-7이 되는 설계를, 시안 항공기 공장은 새로운 설계가 아닌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던 J-8II를 공격용으로 개량한 나중에 JH-8로 불리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이중에서 JH-8은 J-8 프로젝트자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계마져 확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큰 위혐부담이 있다고 생각하여 반려되었고 JH-7과 Q-6은 거의 동시에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난창 공장은 그저 트렌드라고 무모하게 가변익을 시도한것은 아니였습니다. 난창은 이전에 공격기인 Q-5를 설계했고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이집트등 여러 국가에서 2대의 MIG-21M, 2대의 MIG-23MS, 2대의 MIG-23BN, 2대의 MIG-23U와 AS-5 공대지 미사일 5발이 중국으로 반입되었습니다. 특히 이집트는 욤키푸르 전쟁이 종전이후 이스라엘과 화해를 위해 일시적으로 소련간의 관계가 멀어졌고 소련의 이집트에 대한 군사적 지원 역시 이때 잠시 중단됬습니다. 이때 중국은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왔고 이집트는 여러 소련제 무기를 중국에 공급하기로 하였습니다. 최소 6대이상의 MIG-23이 이집트에서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베트남에서 F-111 잔해 역시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은 이미 MIG-23의 항공 전자 공학 제품과 R-29 엔진을 복제하기 위한 시도를 진행중였습니다. 난창 공장 수석 설계자이자 Q-6 프로그램에 리드 디자이너인 Lu Xiaopeng(陆孝彭)은 Q-6에 가변익을 이집트에 들어온 MIG-23MS를 기반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하였고 Q-5, J-6에 후속작으로서 단좌 초음속 공격기로서 개발될 예정이였습니다. 또한 Q-6에 엔진은 당시 중국에서 유일하게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터보팬 엔진인 WS-6을 채택했습니다.
목표로 삼았던 성능은 무장하중 4,500Kg에 작전반경 900Km로 원판 MIG-23MS보다 더 좋은 성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개발 기간동안 陆孝彭는 해군과 공군 사령부 그리고 일선 Q-5 부대를 지속적으로 찾아 필요사항을 지속적으로 확인했습니다. 1979년 2월 국방과학 기술위원회에 난창 항공기 공장은 설계도를 제출했고 이 설계도상으로 陆孝彭는 Q-6에 전체적인 설계안을 확정하였습니다. 난창 항공기 공장은 당시 중국으로서는 매우 진보된 기술을 여럿 Q-6에 적용했습니다. 가변익 설계는 전반적으로 특히 후면은 MIG-23과 유사했지만 동체 배부분과 전방에 새로운 공기 흡입구를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F-16과 MIG-23과 혼합된 형상을 취해 더욱 만족스러운 성능을 낼려고 했고, 70년대 후반 대부분의 중국 항공기 프로그램들이 사용할 예정이였던 WS-6은 1980년 10월 목표 성능에 도달함에 따라 이제 완벽하게 WS-6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WS-6 목표성능은 122.4kN 추력이며 총 중량은 14.5톤으로 설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