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중공)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제 1편)
북한과 중국(중공) 의 건국 관계 (사진들은 삭제했음)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을 도와 맹활약한 이들이 북한군 중추가 됐다. 국·공내전 때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에 투입됐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하다.
베이징에 입성한 중국공산당 군대.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의 부일(附日) 왕족·귀족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무혈 병탄(倂呑)했다. 이로써
일본 영토는 조선반도, 류큐열도, 타이완, 남사할린, 남쿠릴열도, 관동주(다롄), 태평양 도서로 확장됐다.
일본의 조선 병탄을 전후해 조선인 일부가 만주와 연해주, 중국 본토 등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했다.
안동의 이상룡 가문과 이육사(이원록) 가문,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가문, 의열단의 김원봉과 김상옥, 이태준,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최재형, 김구, 윤봉길, 이승만, 신채호, 김무정(김병희), 김두봉 등이 대표적이다.
최용건, 김책(김홍계), 강건(강신태), 김일성(김성주), 김일(박덕산) 등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있던 동북항일연군
세력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김좌진, 홍범도, 최진동 등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는 체코군단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갖고 1920년 북간도 허룽(和龍) 일대에서 벌어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혁명 계속하라” 유언 남긴 쑨원
황포군관학교.
일본의 만주 진출이 계속되면서 더 많은 수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으로 가보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해 중국 본토가 축록전(逐鹿戰·제위, 정권을 얻기 위한 다툼) 상황으로 바뀐 1917년,
쑨원(孫文·1866~1925)은 망명지 도쿄에서 돌아와 광저우를 수도로 하는 광둥군정부(廣東軍政府)를 세웠다.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宮岐滔天)과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형제 등이 쑨원을 지원했다. 쑨원이 주도한
광저우 정부와 돤치루이(段瑞) 등이 주도한 베이징 정부 간 대립이 격화했다. 쑨원은 광저우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좡족(壯族) 군벌 루롱팅(陸榮廷)의 공작으로 상하이로 쫓겨났다.
1917년 11월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중국의 견해는 무시됐다. 이에 분노한 학생, 노동자, 상인 등이 5월 4일을 기점으로 중국
대도시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의 역할에 주목한 리다자오(李大釗)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등 13명의 지식인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CCP)을 창당했다. 그해 5월 쑨원은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 정부 총통에 취임했다.
루룽팅이 베이징 정부와 모의해 광둥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쑨원은 루롱팅의 쿠
데타를 저지했다. 쑨원은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참모본부를 북상시키는 등 북벌을 시도했으나 광저우에
남아 보급을 담당하던 천중밍(陳炯明)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쑨원은 간발의 차이로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도쿄로 망명했다.
러시아 혁명이 궤도를 찾아가자 쑨원은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쑨원은 레닌이 파견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마링을 만나 혁명 수행 방법을 문의했다. 마링에 설득된 쑨원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개별 입당을 허용하는 등 국민당을 좌경화했다.
세포조직이 만들어지고, 국민당은 전투조직이 됐다. 리다자오와 마오쩌둥 등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 간부로
선출됐다.
쑨원은 장제스(장개석)(蔣介石·1887~1975)를 소련에 파견해 군대 조직과 훈련 방식을 배우게 하고,
샌프란시스코 화교 출신 랴오중카이(廖仲愷)로 하여금 광저우 교외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게 했다.
프랑스에서 막 귀국한 저우언라이(주은래)(周恩來)가 황포군관학교 주임대리에 취임했으며, 예젠잉(葉劍英)과
조선인 최용건 등이 교관으로 부임했다. 의병장 허위의 종질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하게 되는 허형식과
김원봉이 입교했다.
두위밍(杜聿明)과 린퍄오(林彪)는 가장 우수한 생도였다.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을 통한 북벌을 추진했다.
국민당의 좌경화를 위협으로 느낀 기업가들이 별도 무장집단을 만들려 했으나 쑨원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쑨원은 베이징 군벌과 담판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은 1925년 3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쑨원은 부인 쑹칭링에게
“혁명을 계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좌·우 갈등 속에서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국민당 핵심으로 부상했다.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에
북벌을 명령했다. 국민혁명군은 예상외로 단 9개월 만에 창장 이남 9개 성(省)을 석권했다. 북벌 과정에서
공산당이 지도하고, 노동자·농민이 참가한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이들은 토호(土豪) 타도와 토지 분배를
요구했다. 공산당 세력이 창장 중류 한커우(漢口) 조계 강제 회수를 시도하자 열강의 국민당에 대한 압력이
강화됐다.
제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