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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헌법이 통과되면서 정당활동이 허용되고
대선을 통한 민정이양을 위해 각종 당들이 창당되기 시작합니다
일단 군사정부에서 모은 정치자금을 이용해 구 정치인들(주로 정치생명 끝난 자유당계열)을 포섭해 군인들 중심으로 만든
민주공화당
근데 박정희는 전면에 나서질 않았죠
왜냐면 민정이양을 한다고 했으니까
6월엔 민주당 구파계열이 민정당을 창당 했고
7월엔 민주당 신파(신민당)계열이 민주당을 창당했고
민주당에 끼지 못했던 김준연 계열은 자유민주당을 창당합니다
순조로워 보였던 민정이양 일정
하지만 8월 박정희 의장이 제대하면서 민주공화당 총재 겸 대선후보로 추대되자 얘기가 달라지죠
관권과 금권을 쥔 군정세력의 적극참여..
이미 상황은 군사정부가 쥐고 있었죠
군정 편에서 안 다뤘는데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대북강경책과 노동자 탄압을 비판해오던 민족일보 수뇌부를 '용공분자'라며 구속해서 사형시켜버렸고
(당시 배석판사가 이회창..민주화 이후 재심에서 무죄판결)
김지태를 체포해서 협박으로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를 강탈, 부산일보와 MBC까지 딸려갔죠
(김지태가 친일파니까 정당하다? 아니 친일파 재산을 환수했으면 국고에 있어야지, 왜 그게 다른 친일파한테 갑니까?
참고로 정수장학회는 아직도 MBC 지분 30%를 소유)
당시에 인터넷이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습니까
기껏해야 신문과 방송..신문은 저렇게 뺏고, 폐지시키고, 사형시키고..
방송은 5.16때 점령한 KBS와 정수장학회가 가진 MBC??
거기다 공화당은 엄청난 자금까지 갖고 있었죠
군정기간동안 워커힐,증권파동,새나라자동차,빠찡꼬 등으로 마련한 '정치자금'
뭐 동네 어르신들 맛난거 사드시라고 나눠드리고 그런 거죠 뭐
거기다 독점사업권 줘서 고마운 이토추상사 같은 일본 기업에선 밀가루도 제공해주고...
사실 군사정권때 투표율이 높았던 이유는 가면 고무신이나 밀가루 같은거 줘서 그런거죠
그리고 여기서 처음 시작된게 군 몰표..
군사정권과 상명하복의 군대..
이때부터 군인대통령이 사라질때까지 30년동안 다른 사람을 뽑을수가 없었어요
여튼 민정이양이 위태위태해진 상황인데
야권(민주당계열)은 사분오열하고 있었으니..
이에 단일화를 위해 신정당, 민우당 등의 정당들과 민정당 대표 김병로와 민주당 인사들, 심지어 자유당 잔재들까지 포함해서
민주통합정당이라는 국민의 당을 창당했는데!!!
이게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당 하나만 더 생긴 꼴이 된;;;
민정당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대선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은 장면이 정치활동금지라고 아예 후보를 안 냈습니다(하지만 민정당과 윤보선을 싫어하죠..)
자유민주당은 박정희에 대적하기 위해 같은 군사정권의 송요찬을 영입(????)
국민의 당은 4.19이후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이 대선후보로 나왔는데
이대로 후보등록 완료..
단일화는 무슨..
애초에 2공화국의 정통성을 가진 장면 같은 정치인은 정치활동 금지상태였고
민정당 윤보선은 5.16 당시 대통령이면서도 장면 쫓아내려고 진압 명령을 안 내렸었고
자민당 송요찬은 군사정권 출신이고...국민당 허정은 이승만 정권 출신이고...
서로 니가 무슨 야권단일후보냐 싸우느라...
물론 중정 요원들이 지지자인 척 하면서 서로 싸우고 사퇴하지 말라고 여론조작 하고 있기도 했죠...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10월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기껏 12일 남은 시점에서 허정이 사퇴, 선거 3일 전에 송요찬이 사퇴...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민정이양'이고 뭐고..'안될 것 같으니까 포기한 것'으로 밖에 안 보였고..단일화 효과는 없었습니다...(50년 전이나 지금이나22)
하지만 어쨌든 단일화가 되긴 됐고..
대선은 박정희vs윤보선 구도
말 그대로 초박빙의 상황
이 상황에서 윤보선 측이 꺼낸 카드..
북풍!!
항상 빨갱이 누명쓰고 잡혀가야 했던 민주진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켰던 북풍..
내용을 봅시다
박정희의 형은 대구폭동 때 우익단체에 죽은 공산주의자 박상희..
박정희 역시 남조선로동당으로 여순반란에 가담해서 기소되었다가 가담자 명단을 밝히고 살아났던 전력이 있었고
그래서 5.16이 나자마자 북에서는 축하 성명을 내려다가
소위 '혁명공약'이 '반공을 국시로..'라니까 말았잖아요?
이에 박정희의 속내가 궁금해진 김일성이 밀사를 파견했었는데
그게 박정희 형인 박상희의 친구이자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부상(경제부 차관이랄까?)인 황태성..
이게 먹혀들어간다 싶던 윤보선은 안동지역 유세에서
"공화당 창당 자금은 공산당에서 지원한 것이다"란 말을 하는데..
박정희는 '그래 황태성 우리 형 친구다'하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했고
사람들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며 죄없는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끌고가던 놈이 빨갱이란 걸 안 믿었죠
언론은 어차피 박정희 편이었고..
결과적으로 오히려 진보층에서 '윤보선이 진짜 극우네' 하면서 안 뽑아주고
박정희를 빨갱이로 모는 데 쓰인 대구폭동, 4.3사건, 여순반란을 겪은 경북, 제주, 전남에서
빨갱이 누명썼던 사람들이 박정희를 뽑아주는 역풍을 불러일으켜버렸..
(선거 끝나자마자 황태성은 '무단월경죄'로 사형..)
그렇게 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박정희 470만 표, 46.6%
윤보선 455만 표, 45.1%
1.5% 15만표 차이...역대 최소표차...
지역별로는 수도권은 물론이고
윤보선 고향인 충청과
빨갱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휴전선의 강원도가 윤보선을 지지했음에도
대구폭동 겪은 경북에서 29만표 차이
여순반란 겪은 전남에서 28만표 차이
4.3사건 겪은 제주에서 5만5천표 차이....
군인은 또 몇십만명이더라...
어쨌든 박정희는 그렇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대한민국선거사 제1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2)
[정치과외 제1교시] (이동형, 201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31&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 부일장학회 재산 등 강제헌납 의혹 사건: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56&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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