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목소리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듯이 헐떡이며 들려왔다. 혜경은 단숨에 103호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오노인이란 것을 알았다.
혜경은 갑자기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사라진 태욱외에 자신이 최후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노인의 목소리를 듣자 동지를 얻은듯이 기뻤다.
혜경은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신중하게 발걸음을 뗐다. 목적지를 바꿔 103호로 다가갔다.
“제발..도와줘~~..” 오노인의 목소리는 하나도 힘이 없는 것 같았다.
혜경은 어느새 103호안으로 들어섰다. 아까전에 오노인이 쓰러져 있었던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는 바닥위에 피묻은 천이 덮혀져 있었다. 그안에 죽은줄 알았던 오노인이 있었고 방금전까지 도와달라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혜경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발바닥이 피에 닿아 끈적거렸지만 그런것에 신경쓸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 위에 쪼그려 앉고서는 조심스럽게 천을 걷으며 오노인을 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드세요? 저 혜경이예요. 정신좀 차려보세요.”
천을 다 걷어내자 낯익은 얼굴이 어둠속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혜경은 깜짝 놀라며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태욱의 부릎뜬 눈이 혜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혜경을 덮쳤다.
목이 졸린듯 갑갑해졌다. 코와 입에 뭔가 덮히며 제대로 숨을 내쉴수가 없었다. 강한약품냄새가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반항을 해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큰 충격들을 계속해서 받은탓에 온몸에 힘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꿈틀대어 보았지만 온몸이 제압되어 버린듯이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을 두르고 있던 팔이 점점 죄어들고 있었고 순간 온몸이 더욱 갑갑해지더니 의식이 흐릿해졌다.
한순간 눈앞에 번개가 친듯이 번쩍거리다가 다시 깜깜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혜경은 누군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도 환한빛이 온몸을 비추는듯 느껴졌다.
`찰싹’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뺨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혜경은 비로서 정신이 들어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다.
눈앞에 환한 전등이 눈을 아플정도로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혜경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손발을 움직이려고 해보았지만 그것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혜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현실속에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귓가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송혜경씨! 이제 정신이 드세요?”
혜경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목을 돌렸다.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불빛 때문에 어둠속에 인물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듣고 짐작한대로 오노인이 그곳에 서있었다.
오노인은 바짝 내려가 있는 전등을 위로 약간 올리며 혜경의 옆에 다가섰다. 혜경은 뭐라고 얘기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술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리테이프로 막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손과 발또한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경은 `음음..음’하며 테이프에 새어나오는 이상한 신음을 낼 수 있는게 전부였다.
피가 잔뜩 묻은 수의를 여전히 입고 있는 오노인은 웃으며 상냥한 말투로 혜경에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오노인의 모습은 죽은시체가 곁에 서있는듯 섬뜩했다.
“아까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부드럽게 대했어야 했는데 본의아니게 거칠어서 죄송했습니다.”
그의 미소는 앙상한 얼굴 때문에 섬뜻하게 느껴졌다. 혜경은 그제서야 자신을 기절시키고 결박한 사람이 오노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걷어낸 천밑에 오노인이 아니라 태욱의 시체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바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혜경은 눈앞에 오노인을 보자 몸서리가 쳐졌다. 손발을 꿈틀거렸지만 유리테이프로 수십겹이나 감겨진터라 자신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오..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다칠 수가 있습니다.”
오노인은 잠시 전등불빛의 범위 밖으로 사라졌다. 어둠속에서 뭔가 덜컥덜컥하며 이상한 소리가 들여왔다.
오노인은 작은 받침대를 밀고 나타났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금속집기가 빛에 반사되어 비쳤다.
혜경은 그것들을 보는 순간 온몸을 미친듯이 꿈틀대었다.
`음..음..음’하는 소리가 유리테이프속에서 새어나왔다. 오노인은 그런 혜경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오노인은 자신이 가져온 수술용장비에서 날이 파랗게 선 메스를 골라잡았다. 메스를 들고 있는 그의 앙상한 손은 마치 메스의 일부분같이 보였다.
“아.아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제가 실수 할지도 모르니까요.”
오노인은 누워있는 혜경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혜경이 입고 있는 수의를 위로 치켜올렸다.
새하얀 복부가 전등빛에 눈부시게 드러났다. 혜경은 깜짝 놀라 다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아..아..놀라지 마세요. 다른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얼마있으면 죽을 나이인데 젊은여자나 밝히는 변태가 아니랍니다.”
오노인은 자신이 자상한 할아버지라도 되는듯이 그녀에게 여전히 다정하게 말했다.
오노인은 메스를 그녀의 배꼽위에 갖다대었다. 순간 움찔하고 혜경이 움직이는 바람에 날카로운 메스가 그녀의 겉피부를 살짝 스쳤다.
혜경은 따끔한 통증에 `음..’하고 바람새는 소리를 비명으로 질렀다. 피가 한두방울 맺혀 피부위로 올라왔다.
오노인은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혜경에게 말했다.
“이런..이런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이렇게 다치게 되잖아요. 안그래도 제가 직접하려고 했는데 혜경씨가 먼저 서두르면 안되죠.”
혜경은 간절하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오노인을 쳐다봤다. 오노인은 그런 혜경을 보고 더욱 기분이 좋은듯이 말했다.
“제가 말했었죠. 지병으로 심장병이 있다고. 혜경씨의 입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떼어줄수도 있는데 만약에 실수로 혜경씨가 비명을 지른다면 저는 깜짝 놀라 손아귀에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실수로 이 날카로운 메스를 혜경씨의 예쁜 배위에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운이좋아 메스의 등쪽으로 떨어지면 괜찮겠지만 만일에 잘못해서 이쪽의 날이 잘 선 면이 맨살에 닿는다면…”
오노인은 그 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시겠죠? 전 심장이 약하니 실수라도 비명 같은 것은 지르지 마세요. 약속한다면 풀어줄 수 있습니다.”
혜경은 오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미친듯이 끄덕였다. 오노인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입에 두껍게 붙어있던 유리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녀는 입이 자유졌지만 오노인의 경고대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노인의 말대로 그가 실수로라도 자신의 복부위에 메스를 떨어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행운을 그런식으로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혜경은 되도록 차분하게 물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오노인은 그녀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여기는 101호실안의 해부대입니다. 이층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이곳이라서 제가 힘들게 당신을 옮겨왔죠.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계실텐데요. 전에 말한대로 오기호입니다.”
혜경은 그가 친절하게 나올때마다 오히려 기분이 섬뜻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의 정체가 도대체 뭐죠?”
오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여전히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대답했다.
“제가 바로 오성금융의 회장이랍니다.” 순간 혜경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다면 이 음모의 주동자?”
오회장은 혜경의 말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끔찍한 일을 했죠. 도대체 왜?”
혜경은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오회장을 다그쳤다.
“왜라? 왜라?”
오회장은 그녀의 질문을 받고는 이제와 전혀다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동안 심각한 분위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리고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는 혜경의 눈동자를 내려다 봤다. 오회장은 갑자기 자신의 왼손을 머리위로 가져갔다.
놀랍게도 그는 덥수룩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위로 떼어냈다.
혜경은 순간적으로 그게 마법이라도 되는 듯 깜짝놀랐으나 완전히 대머리가 된 오회장의 모습을 보고 그게 가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회장은 가발을 자신이 밀고온 이동선반위에 두었다. 다시 혜경을 돌아보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출처 : 리얼판타(www.realfanta.com)작가 : 자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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