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마당에 심어놓은 커다란 개암 나무에 기대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며 책을 읽다 불어오는 바람에 책장이 펄럭거리며 넘어가 버린 바람에 책 읽기는 잠깐 중단하고 옆에 놓인 채 식지 않은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들어 홀짝거렸다.
날씨가 좋다. 잠깐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내 머리 위로 펼쳐져 있다.
은은히 내려쬐는 따스한 팔라라의 빛이 나를 나른하게 만든다.
그럴 때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낮잠을 잘 만큼 피곤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그저 멍한 채로 앉아 있다 들어갈 뿐이다. 때로는 정원에 핀 꽃과 식물들을 감상하기도 하고.
문득 옆 자리에 시선이 가 돌아보고는 작게 한숨을 쉰다.
서툰 솜씨로 분홍빛 꽃이 그려진 하얀 색 머그 잔이 방금 우려 낸 따끈따끈한 차를 가득 담은 채 오도카니 놓여 있다.
컵이 놓인 자리의 바로 옆에 작고 하얀 들꽃이 하늘하늘하고 여린 몸을 기대고 있음이 보인다.
그리 좋지 않은 솜씨로 도자기 가마에 컵을 넣어 굽기 전 '정원에 핀 꽃을 그려보았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웃던 네 모습이 생각나 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 때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우리가 차 마실 컵을 만들 때 몇 개 더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
그럼 이 공간에 네 흔적이 조금은 더 남았을까?
그 컵을 손에 꼭 쥔 채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다 나를 바라보며 웃던 너의 모습이 보여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손을 뻗기 무섭게 희미한 안개처럼 흐려져 금방 사라져 버렸다.
아아 - 그렇지 . 네가 있을 리가 없다 .
너는 이미 오래 전 네가 숭배하던 아튼 시미니의 품으로 돌아가 한 줌의 흙이 되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 땅 , 에린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그것도 이미 몇십년 전 일이다 .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버릇처럼 차를 마실 때면 늘 그러했듯이 내 몫에 한 사람 분을 더해 옆 자리에 놓아두곤 한다.
그러면 방금 전 처럼 한 순간이라도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라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일까?
그저 그런 남은 사람의 그리움 때문일까.
너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저 네가 즐겨 쓰던 머그 컵만 덩그러니 놓인 그 자리를 한참 바라본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너를 보내던 그 때처럼 마음이 아프진 않다.
그저 그리울 뿐. 매일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텅 빈 마음과 절망에 흐느끼다 오열하며 울던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다.
이젠 네가 보고 싶다 생각하며 눈물을 닦기만 하면 되는 일이고. 오늘도, 내일도 같은 행동을 하며 너의 모습을 그릴 뿐이니까.
남은 자의 미련 있는 행동이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를 찾아온 옛 동료들은 모두들 내게 말했었지.
- 이미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간 사람의 잔상을 끌어안고 멈추어 사는 일은 이제 그만 둬. 너는 네 시간을 살아가야지.
하지만 그들은 알까? 네가 떠나고 난 후 내 삶의 시간은 그때 그 시간에서 멈추어 버렸음을.
목숨보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남은 시간을 그저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괴로움을 당신들을 알까?
모두 다 허울 좋은 위로일 뿐이다. 다 의미 없이 사라지는 소리일 뿐. 하지만 나의 이러한 행동도 그들의 말이나 마찬가지인 의미 없는 행동이란 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안다. 그렇지만.
작게 한숨을 내 쉬고는 책과 컵 두개를 다시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래서야 네가 보고 싶어져서 오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너를 보고 난 이후에는 읽던 책의 내용도, 마시던 차의 맛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네가 그립다 는 생각에 빠져 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리고 나선 늘 그러했던 것처럼 너를 생각하겠지.
몇번을 되새기고 기억하고 추억했는지 횟수를 셀 수 조차 없지만. 오늘 내 머리 위로 무심하게 흘러간 맑은 하늘의 색이 나를 바라보던 너의 눈동자 색과도 같아 유난히 네가 생각났다는 건 핑계겠지?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하늘을 바라보며 네 이름을 작은 소리로 불러 본다.
톨비쉬. 나의 돌아갈 곳이자 에린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었던 나의 사랑했던 사람아.
나는 지금도 너와 내가 함께 살았던 숲 속의 작은 집에서 너의 흔적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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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처음 만났던 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던 반호르 외곽의 황야에서 너와 나는 처음 만났었다. 원하던 일은 아니었으나 항상 그러해 왔듯이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엮여 들어간 일에서였지.
생전 처음 보던 - 사도 - 라는 괴물을 힘겹게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건지 기척 없이 다가와 뒷짐을 진 채 한참을 재미있는 무언가를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기사 차림의 남자.
나름 절박했던 싸움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혀 하마터면 사도가 휘두르는 스태프에 맞아 저 멀리 나가떨어질 뻔 했었다.
그래. 첫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했지. 당신이 소속된 비밀 집단 - 알반 기사단 - 의 일을 도와달라는 말에. 나를 따라다니다 억울하게 배신자가 된 소년의 일에는 일부의 내 책임도 있기에.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때 농담처럼 던진 네 말이 참 가관이었지.
- 뭐 . 겸사겸사 세계를 구하는 것 정도 많이 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 하하하
'도대체 나를 무슨 거창한 영웅이라 생각하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생각에 울컥하고 분노가 솟아나 너에게 스태프를 들이대며 경계했었지만, 그럼에도 너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대할 뿐이었다.
너와 나의 첫 만남은 그러했었다.
그떼 당시 그저 능글맞은 기사단의 한 사람일 뿐이라 생각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
너의 종족 , 다누의 자식들은 그저 항상 내게 영웅이라 추켜 세우며 도와달라 요청하면서도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나를 이용하고, 심지어는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었지. 그렇기에 잘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나 싶었다.
그리하여 ,네가 도와달라는 일이 일단 해결되면 빨리 당신네들과 관계를 끊고 저 바다 건너 이리아 대륙으로 다시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네가 믿는 아튼 시미니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사랑의 신 인우스의 뜻이었는지 ... 너와 나의 사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그 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었고 이런 저런 부탁을 하는 네게 나는 제법 가시 돋힌 고슴도치처럼 대했었다.
심지어 그 동안 내 뒤를 밟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라이트닝 로드라도 한 방 먹이려 했었지.
그렇지만 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너의 부탁을 들어주러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바보처럼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멍청한 짓을 다시 하기 위해 .
아마 그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아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었다. 그 때는 .
그때까지 너는 그다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
맡은 조사 임무는 내게 떠넘기고 ,대충 넘어가기 일쑤였으며 너의 일행이 잔소리라도 하려 하면 그저 웃으며 구렁이가 담장을 넘어가듯 능청스럽게 피하곤 했지만
정작 너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따라가다 보면 해결되는 일들이 제법 많았기에 어쩌면 네가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상대에게 미소를 짓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
예상이 적중해 -사도- 의 배후를 찾아냈을 때 오죽하면 그들 중 한 명인 펜아르가 너를 책략가 라며 욕했을까 . 사실 그 말은 나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앞에서는 져 주고 뒤에서는
함께 다니는 동료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전략을 짜곤 했던 너였던지라 - 그들 ' 선지자 ' 일행을 잠깐 봉인했을 때가 특히나 그러했다. 그 상황, 그 몸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 네가 만약
내게 칼 끝을 돌린다면 제법 곤란한 상황에 빠질거라 생각하고 되도록이면 거리를 두려고 했다. 스승이라 생각했던 이도 나를 배신하고 에린을 위해 죽어달라며 내 목에 검을 들이대었는데 나를 이용하기 위해
오랫동안 뒤를 밟아 온 집단의 책략가라면 오죽할까 싶었기에 .
그런 생각을 가지며 최대한 일 적인 부분에서만 너를 접하려 했고 ,웃으며 다가오는 너를 오히려 나는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했었다. 그래도 그 태도가 그닥 오래 가진 못했고
종국에는 너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으니 ... 내가 많이 외롭긴 했나 보다.
너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날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너와 함께 보낸 날들 중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지거나 사라진 날 들은 거의 없었으니 ...
' 선지자 ' 의 공격 때문에 내상에 가까운 부상을 입고 한 동안 마법을 비롯한 어떠한 힘도 쓸 수 없었을 때였다. 휴식이 필요한 내게 투아하 데 다난의 어린 여왕님은 나를 다시 전장으로 내어몰았고 ,
힘을 잃은 이방인이 이 땅에서 어떤 취급을당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날 .
나는 성벽 위에서 비를 맞으며 한동안 무기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내게 머물 곳이 있기는 할까 ? 나는 다만
당신네 투아하 데 다난의 필요에 따라서만 움직이다 사라져 갈 소모품인걸까 란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비 내리는 던 바튼의 풍경만을 멍하니 바라보며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였다.
부상으로 망가진 몸보다는 무너져버린 마음으로 인한 가슴 깊은 곳의 아픔으로 인해 소리없는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
너는 내 옆에 말 없이 다가와 한동안 석상처럼 섰다.
갑옷의 덜커덕거리는 마찰음 덕분에 너의 기척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 버리라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럴 기력도 없었기에 나는 너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동안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던 너는 팔을 뻗어 내 머리 위에 망토를 씌워주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비의
느낌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제서야 나는 너를 바라보았고 내가 바라보던 방향을 굳은 표정으로 응시하며 비를 맞던 너의 모습을 보았을 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라 외치려는 목소리는 이미 나오지 않았다 .
그저 네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 뿐이었다 .
사실 나는 그 때 어떻게든 기대고 싶은 곳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오랜 시간 에린에서 살아오며 많은 영웅담에 나올 일을 했건만 이렇게 말 없이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이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 .
외로웠으니까 . 신뢰하지 않는 자의 작은 행동에 기댈 정도로.
그렇게 나는 너와 함께 하는 일에 첫 걸음을 내어딛었다.
여신을 구한 에린의 수호자라 불리는 나 조차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을 몇번 겪었을 정도로 험하고 거친 일이었지만
그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네가 속한 집단인 알반 기사단이 모시는 신 - 아튼 시미니 -의 일부 힘을 얻었고 본격적으로 에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도와 선지자들을 상대하며 맞서 싸웠었다.
그 와중 네가 위급한 상황에서 내게 무리하게 다른 종류의 힘을 옮겨준 바람에 피를 토하며 괴로워할 정도의 후유증에 한 동안 시달려야 했다.
이미 완전하지 않지만 신의 힘을 몸에 담은 내가 다른 신의 힘을 하나도 아니고 셋 씩이나 담는다는 건 무리였고 ,그 힘들이 한동안 폭주와 충돌을 반복했었기에 사도와의 큰 전투를 치루고나선 며칠동안 크게 앓아누워 일어나지 못했었지.
그 때 네가 나를 크게 걱정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대 후려쳤을 거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그 때부터 한동안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아팠다고 ...
지금 생각하면 네가 나에게 힘을 옮기는 일을 한 게 아무래도 나를 잡아두기 위한 밑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일 이후 나는 기사단에게서 발을 빼려 하였으나 이미 그 집단에 반 쯤 발을 걸친어중간한 일원이 되고 말았으니까.
이건 뭐 들어올 때는 맘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였었지 ??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뒤를 밟다 목적을 위해 정체를 드러내 접근하고 처한 상황을 이용해 도움을 준 뒤 너의 집단에 끌어들인다. 과연 책략가 다운 발상이었다.
역시나 너는 적으로 돌리면 안 될 사람이야. 라 생각하며 그 때는 쓰게 웃었었다.
그 때는 네가 나와 함께 비를 맞았던 일이 네 진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해도 믿음이 가지 않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며 마음을 열려는 내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며 한 동안 내적 갈등을 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백 마디의 거창한 말도 아닌 ,마음이 담긴 행동이란 걸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너를 포함한 네 집단의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었으니까.
- 언제부터 저를 좋아한 겁니까 ? - 라고 그 언젠가 네가 나에게 물었었지 ?
그 땐 그저 웃으며 부끄러워서 말 못하겠다 하였지만 이야기 해 줄 걸 그랬다.
그 날 ,내리는 비에 옷이 젖어들듯이 네가 내 마음 한 켠에 스며들어왔었노라고 ...
그래서였는지 기르가쉬라 불리던 사도의 일이 일단락 된 후에 찾아온 잠깐의 휴식같은 삶은 오히려 무료하기만 했다.
울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리아로 떠나기 위해 슬슬 살던 집을 정리하려 하던 찰나에 네가 보내온 편지는 이리아 행을 조금 더 미루게 만들었다. 결국은 이래저래 너와의 연이 얽혀 그 넓은 대륙에 정착하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 때보단 경계를 풀고 조금은 편하게 너를 대했다.
그렇다고 너를 아주 신뢰하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예전 함께 모험을 하던 동료들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반가웠었다. - 물론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에린의 대지 일부가 되었고 나만 홀로 남았지만 - 하지만 다시 만난 장소가 탈틴 묘지라니 ... 넌 정말 그때에도 분위기를 모르는 답답한 남자였다. 게다가 만남의 작은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선지자들이 무덤에서 갓 파낸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보아야 했지.
아튼 시미니시여 대체 제가 왜 이러시나이까 .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 날이었다. 정말이지.
다시금 너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었다. 여전히 선지자와 사도를 추적하며 싸우는 나날들이었다.
그 와중에 티르 코네일 개울에서 우연히 주운 목걸이가 하필이면 네 기사단의 잃어버린 기억이 담긴 유물이었을까 .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알반 기사단에 대해 발을 빼고 훌훌 떠나갈 수 없게 되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정식은 아니지만 기사단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그닥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무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일은 위험할 뿐더러 매우 귀찮고 피곤한 일이기에 싫다고 거부해 손해보는 상황을 만들긴 싫었다 . 조금은 될대로 되어라 하는 생각도 있었지 .
그 때 네가 합류해서 기쁘다고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매우 환하게 웃었었다 . 네 손을 잡으며 나는 문득 네가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기사님이라 생각을 했었지. 너에 대한 경계가 점점 풀리는 순간이었다 .
여전히 능청스러운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
여전히 너는 내게 이런저런 부탁을 했다. 귀찮을 정도로 . 카즈윈이라는 수시로 혼자 사라지기 좋아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사의 뒤치닥거리부터 , 내가 주운 목걸이에 담겨 있는 기억 조사 ,선지자의 흔적을 탐색하는 일 까지 .심지어는 너와 카즈윈이라는 기사와의 트러블 덕분에 일어난 기사단 내부의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내게 요리를 해 달라고 했었지.
용병 일에 심부름으로도 모자라 이젠 내가 밥하는 사람으로 보이냐 ! 하며 요리도구로 후려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는.
사실 재료를 구해오는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냄비를 집어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렇게 요리를 하는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즈윈이 대놓고 너를 내통자로 의심을 해 추궁했고
애써 풀어놓은 분위기가 다시금 어색하게 얼어붙었기에 화가 난 내가 그 때 모래밭에 냄비를 냅다 집어 던지고 소리지르며 화를 냈지.
- 내통자는 나 자신이니 그만하라고 . 이제는 사람들 부탁을 들어주고도 늘 배신당하고 원망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애 써 도왔더니 자기들끼리 내부 분열하는 꼴이 참으로 읏기다. 난 이탈할 테니 어디 너희들끼리 잘 해 보아라 - 고 말하며 씩씩거리며 반호르로 향하는 문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네가 내 손을 강하게 잡아 끌었다. 그 날 나는 너의 하늘빛 눈동자를 가까이 접했었지.
아아 - 너는 그 때가 내 손을 처음으로 잡은 날이라 하였지 . 당신은 특별 주시 대상이라 어디서 뭘 하는지 모든 행적이 다 기사단 측에 보고되는데 어떻게 적과 내통을 하느냐 . 말이 되지 않는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희생할 필요가 없다 며 너는 나를 좀 더 가까이 잡아끌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내게 말했다. 나를 믿고 있다고 .
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너에게서 그 날의 맑고 파란 반호르의 가을 하늘을 보았다.
마치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올곧은 눈빛에 더이상 화를 낼 기분조차 들지 않았었지 . 유일하게 네가 나를 믿어준 다누의 자식이었기 때문일까?
단단한 얼음 벽을 쳤던 마음이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뭉클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기사단의 여정에 함께 하기로 하며 네 집단을 위한 선의의 협력자가 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지. 그래서 네가 동료에 의해 내통자로 몰리었을 때 나는
유일하게 너를 변호했었다. 그가 가져온 증거가 너무나 명확했고 ,그로 인해 남은 동료들까지 너를 적극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어디에도 물러설 곳이 없었던 상황 .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던 마녀의 숲 속 외나무 다리에서 너와 대치하며 검을 들이대던 카즈윈의 앞을 막아선 것은 나였다 .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일개 드루이드 따위가 한 평생 검을 수련한 전사를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음에도 나는 한 때 믿지 못했던 너를 위해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왜 내가 그런 일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너는 결백을 증명해 돌아오겠다며 잠시 조직을 떠났고 너를 따라가려 했던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나를 밀어내었다.
늘 사람 좋은 ,유한 태도를 내게 고수했단 네가 처음으로 나를 냉정하게 밀어내었던 날이었지 .
그 때 왜 마음이 아팠을까 . 두 번째였다. 너희 다누의 자식들 때문에 이리 마음아파 해 본 일이 .
마치 뾰족한 가시 나무로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 . 마치 나를 배신했던 내 스승이 나를 차갑게 내쳤을 때 느꼈던 아픈 마음을 다시 느꼈다.
그 때 이야기를 말하자 너는 그 때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나도 정말
기사단 사람들에게 내통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에 나를 배려한 일이었다며 쓰게 웃으며 미안하다 말했었지.
지금은 그 차갑던 태도도 ,그 쓴웃음도 모두 옛 일이라 마냥 그립기만 할 뿐이다.
그랬던 네가 선지자들의 함정에 빠져 제거되기 일보 직전의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얼음 속에 갇혀 반쯤 얼어붙은 나를 꺼내주며 - 다시는 당신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 라 말했던 너는 참으로 따스했었다 .
물론 그 때 나는 네가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느냐 . 매몰차게 밀어낼 때는 언제고 다시 기어돌아오느냐며 마음에 없는 모진 소리를 내어뱉었지만 사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
나를 부축하겠노라고 내어민 네 손에 낀 금속 건틀렛 때문에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져 빨갛게 변해버렸지만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 싫었다 .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점점 변해갔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알 수 있었다.
아발론 게이트에서 치열했던 싸움이 있었던 날 이었지 . 내 인생에 있어서 어찌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
선지자들과 사도의 공격이 보통 때보다 치열했던 때였다. 그들은 네 집단의 성지 . 아발론 게이트까지 결국 침입했었고 그들을 맞아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
내 눈 앞에서 모두가 쓰러졌다. 네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묘한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함께 다녔던 옛 동료들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이 쓰러진 네 모습을 보자 다시 떠올랐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아 싸우는구나. 나는 또 혼자 남는구나 란 생각을 했다.
사도의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나 눈 앞의 적을 향해 마법을 퍼 부었었다.
그 때의 전투로 부서진 아발론 게이트의 절반은 내가 부숴먹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 그 때를 생각하면 네게 참 미안할 뿐이다.
비축한 마나가 모두 동이 났을 때 나 또한 사도의 앞발에 채여 날아가 차가운 바닥에 부딪치며 나뒹굴었고 그 충격으로 몸 속 어딘가에 내상을 입었는지 쿨럭거리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 할 때였다.
누운 채 바라본 게이트 위의 푸른 하늘이 빙글빙글 거리며 돌았고 곧 사도가 마지막 일격을 내게 가하기 위해 앞 발을 크게 치켜 들었을 때 . 그 때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 생각하며 에린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려 할 때 방금 전까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네가 검을 든 채 일어섰다.
비록 서 있는 것 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너는 바로 앞에서 앞발을 쳐든 채 위협을 가하는 사도를 향해 검을 향했고 곧 푸른 빛이 일렁거리며 너와 나 주위를 벽처럼 감쌌다.
너의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 , 그 안에서 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었다.
긴 세월이 지나도 너의 그 말을 내가 어찌 잊을까.
아직도 눈을 감고 너를 생각하면 그 때 그 말이 아직도 들려오는 것만 같은데 .
- 렌 씨는 결국 또 이렇게 되셨군요 .
사람들에게 영웅이라고 ,신이라고 떠받들여지면서도 .. 결국은 매번 전장에 혼자 남게 되다니 ..
저는 ... 적어도 저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혼자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
마지막까지 ... 제가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 -
그 말을 듣는 순간 .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지진같은 울림이 일었다. 그 말이 내겐 음유시인이 부르는 격려의 노래 ,잘 듣는 회복 포션과 힐러의 치료 ,나를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되어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었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입 안에 가득 고인 피거품을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버리고는 다시금 스태프와 검을 들었다.
얼마 만이었던가 . 누군가와 함께 전장에 남아 싸웠던 것이 . 내 앞에 서 있는 그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의 보호 아래 나는 다시금 적에게 달려들어 이번에야말로 원치 않게 깨어나 버린 시체들의 왕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그 때 처음으로 너는 나의 방패가 되었고 ,나는 너의 검이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 남아 싸웠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게이트 너머로 봉인된 문을 열고 넘어가 버린 선지자 일당을 막지 못했다.
그 때 아발론 게이트의 문은 다시 굳게 닫혀버렸지만 , 내 마음의 문은 너를 향해 활짝 열린 채 닫힐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
그 때 정신을 잃은 다른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눕히고 전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너덜너덜한 몰골로 게이트의 오래 된 벽에 기대었을 때. 괴물의 앞 발에 비껴맞은 옆구리가 그제서야 욱신거리며 아파왔으나 어딘가 부러진 것 같은 내 몸의 상태보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는지 묻고 있었다.
그 때 너는 이제 자신이 내 맘에 들게 된 것이냐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의 모든 웃음이 목적을 숨긴 책략가의 웃음이라 생각했었던 나였었지만 어느 새 너의 웃는 모습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각인처럼 새겼었다.
마음을 열기 시작하며 바라본 너는 웃음이 너무나 눈부신 기사였다. 마치 그 때 따스하게 우리들을
향해 비추어주던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
심지어 나는 너의 그 웃음에 넋을 놓아버렸는지 나 자신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갈비뼈가 두 대 정도 부러져 있었더라.
그래 .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그 날 반 쯤 무너져버린 너희 알반 기사단의 성지에서 너는 그렇게 내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 사람 일은 뜻대로 안 되는 법이지.
그 날 이후 너와 나는 조금씩 ,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 전까지는 너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묘하게 뾰족하게 굴던 나였지만 어느 새 오래 전 긴 여정을 위해 고향이나 다름없던 티르 코네일을 떠나던 그 시절에 그랬듯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졌다 .
어느 새 나 또한 너를 만나면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였는지 정식은 아니지만 특별 기사단원이 되어 기사단의 일을 좀 도와달라는 너의 제안을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누의 자식들이 하는 부탁은 더 이상 내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고 그저 귀찮지 않을 정도에서만 가볍게 들어주게 되었지만 네 부탁은 솔직히 예전의 나 였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런 일까지 떠맡아야 하느냐며가시부터 세우고 보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네 편지를 다시 받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적당히 짐을 정리해 아발론 게이트에 나타났지.
말로는 마지막까지 같이 있겠다는 그 약속을 네가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다. 다누의 자식들은 순 거짓말쟁이라서 말야. 라며 둘러대었지만 사실은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게 일부 사심이 있었듯이 ,그 때 나도 나름 사적인 감정이 있었다.
일 관계로 아발론 게이트 내에 머무르고 있으면 이전보단 너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내가 마음을 열기 시작한 엘베드 조 조장 기사란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었기에 .
기사단 내부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알게 된 너란 사람은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람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래서 사람을 볼 때 편견을 가지고 보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누가 했었던가 , 그동안 네게 그다지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고 자주 투덜거렸던 내 태도가 미안해 질 정도였으니 .
흐트러짐이 없이 반듯한 기사 중의 기사 . 강하고 지혜로우면서도 때로는 상황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는 그런 유연함까지 갖춘 좋은 성품을 지닌알반 기사단의 최강의 방패 . 그것이 기사단 안에서의 네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전보다는 네게 거리감을 느꼈고 어지간하면 공적인 일 외에는 너와 접하지 않는게 좋겠다 생각했지만 사람 마음은 맘대로 되지 않더군.
가끔 너를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 곳에 머무르게 된 후 너와 나는 자주 마주쳤고 ,너를 마주하고 너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갈 때마다 그 느낌은 점점 자주 느껴졌다. 부드러운 새의 날개 끝으로 심장과 가까운 가슴 한 구석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 . 그리고 이어지는 몸 전체로 울려퍼지는 심장의 두근거리는 고동 소리 .
그 때는 몰랐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 그리고 그 감정을 제대로 인지했을 때는 이미 너라는 사람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코일 숲속의 커다란 나무처럼 크고 깊게 뿌리를 내려 버려 뽑아 내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너는 자주 내가 있는 곳을 찾아 나타났었다. 내가 맡은 벨테인 특별조의 훈련장 , 혼자 책을 읽고 마법서를 연구하기 좋아 자주 찾곤 했던 도서관 , 마치 보석이 매달려 있는 듯했던 에메랄드 색 나뭇잎이 무성하게 달려 있는 게이트 내의 커다란 나무 아래 ,생각에 빠지고 싶을 때 올라가 바람을 쐬곤 했던 게이트 내의 성벽 전망대 .
일과를 마치고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너는 예의 그 팔라라같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나와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고 아튼 시미니가 인도하는 대로 길을 따라 가 보니 내가 있었다 했었지 ?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네가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는 책략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어느 새 부턴가 내게는 너의 속내를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거든 … 하지만 그것이 나쁘진 않았고 오히려 좋았던 걸 보면 확실히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나보다.
어느 새 나는 너와 자주 마주치는 일이 내 생활의 소소한 낙이자 기쁨이 되어버렸다. 너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따스한 충만감을 느끼는 것이 좋았거든. 혼자일 때도 , 조원들과 일과를 보낼 때에도 어느 새 네가 나타났던 곳을 바라보며 오늘은 혹시나 네가 나타날까 , 아니면 …
장기 임무로 인해 네가 오랫동안 게이트에 없음을 알고 있을 때에도 너와 마주치고 짧은 대화나마 나눌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하곤 했다.
네가 나타나 잘 있었냐 인사하며 내 머리를 그 크고 단단한 전사의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를 기대했고
잠깐의 휴식 동안 에메랄드 나무라 이름 붙인 커다란 나무 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나를 가까운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기를 은근 바랬다.
그렇게 내가 먼저 너에 대한 마음을 키워 나가고 있었을 때였다.
너의 첫 고백은 그닥 로맨틱하진 못했다.
너와 너의 조원들과 함께 했던 임무 도중 나타난 사도의 갑작스런 공격에 모두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었고 나 조차도 사도가 날린 금속 파편에
옆구리를 관통당하는 심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날이었다. 크게 다친 채로 내 앞을 막아주던 파란 방패를 펼친 기사님을 보자
이대로 있을 수 없단 생각에 급하게 캐스팅한 파이어볼트로 옆구리 상처를 지져 지혈했던 나는 스태프 대신 브류나크를 뽑아 들고 사도에게 달려들었다. 너를 발판 삼아 날아오른 뒤 놈의 목을 일격에 날려버렸던 날이었지.
너는 그 날의 일을 떠나기 전 날까지 두고두고 내게 이야기하곤 했다. 등 뒤를 부탁한다 했는데 등을 밟고 앞으로 전진하셨더군요. 라며 .
그 때 입은 부상으로 너와 나 두 사람이 며칠동안 의무실 신세를 질 때였지. 모두가 잠 든 밤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이라도 할 까 싶었기에 깐깐한 의무관 눈을 피해 아직은 부자유스러운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든 등불을 떨어뜨릴 뻔 했지. 하지만 흐릿한 빛 너머로 비치는 사람의 모습이너라는 걸 확인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를 본 너는 왠지 얼굴이 굳어 있었지. 그 날 늘 웃던 네가 내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왜 그러했냐고 . 당신이 그러면 내가 감사라도 할 줄 알았냐며 잔뜩 굳은 목소리로 내게 말하며 화를 내는 너 .
그 때는 네가 나를 나름 걱정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당시에는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내게 화를 낸다는 것에 억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던 나도 너에게 화를 내었다.
- 알반 기사단 최강의 기사가 어디서 굴러온 떠돌이 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게 퍽이나 기사님 자존심에 금이 갔나 봐 - 라며
빈정거리듯이 쏘아붙였던 나는 네게 손을 잡혀 벽에 거세게 밀어붙여지고 말았다. 그 때 나도 화가 나 네게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네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역시나 양손검을 한 손으로 쓰는 괴력의 기사님 아니랄까봐 힘이 어찌나 세던지.
한 손으로는 나를 붙잡고 , 한 손으로는 내 손에 들린 등불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은 너는 나를 한동안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네가 두려웠었다. 내 말이 너를 자극해 버린 걸까. 하지만 나는 그 때 네가 사도에게 다치거나 죽게 됨을 보는 게 싫었기에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 뿐인데 어째서 너는 내게 화를 내는 걸까.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고 울고 싶었다.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애써 참으며 나 또한 너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싸움이었을까.
한참 나를 바라보고 있던 네가 나를 거세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미처 낫지 않은 옆구리의 상처가 날카롭게 욱신거렸지만 예상치 못했던 너의 행동에 나는 하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저 너머 설원의 땅 발레스를 흐르는 레우스 강의 얼음처럼 굳어버린 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콩콩 뛰는 심장의 고동만을 느낄 뿐이었다.
왜 그리 무모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던지느냐며 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었지. 너는 그 때 울먹이고 있었다.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나였었는데.
나는 신경 끄라며 , 다만 내 앞에서 네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네가 내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왜 내게 그러냐며 쏘아붙이듯이 이야기했을 때 네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 그야 .. 렌 씨. 저는 렌 씨가 좋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아픕니다. 어째서 아직도 혼자 짊어지려 하시는 겁니까.. -
요리용 냄비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방금 들은 네 말과 행동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를 생각하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벙어리가 되는 약이라도 먹었는지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을 때 천천히 내게 너의 얼굴이 다가왔다.
약간 쌉쌀한 약초의 맛이 나는 첫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달콤한 사탕과도 같았지.
네 고백에 대한 대답은 잠깐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잠깐 너를 바라보던 내가 다시 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 네게 다시 키스한 것으로 - 나도 톨비쉬. 당신이 좋다 - 는 말을 대신했었다.
그 날 나는 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 단단히 움츠렸던 너에 대한 마음이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웠던 것 .
- 왜 내가 좋은거죠 ? - , -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 라는 목소리를 통한 표현은 더 이상 필요없었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이 유난히도 밝던 날
나머지의 말은 연달아 이어지는 입맞춤으로 대신하였으니까.
그 이후 너에 대한 내 마음은 꽃을 활짝 피웠고 , 우리는 연인이 되었지. 별에서 온 자와 다누의 자식이라는 종족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다 생각지 않았다.
네 엘베드 조 조장기사라는 위치 때문에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지만 임무로 인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제법 자주 만나 마음을 나누었다.
만날 때마다 애정이 담긴 눈웃음을 나누며 인사를 했고 스치듯 손을 잡았었다. 항상 차가운 금속 건틀렛을 끼고 다녔던 네 맨손이 정말 따스했음을 그제서야 나는 느꼈다.
그 당시 우리는 보통 연인들처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진 못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도와 선지자 , 이계의 신 문제 때문에 조장급 기사인
너는 많이 바빴고 자리를 자주 비웠었지. 나 또한 내게 주어진 견습 기사들을 가르치는 일 때문에 제법 바빴고 .
자주 보긴 했지만 나무 토막같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마음을 나누는 일 외에는 그다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러했을까. 종종 너의 조와 함께 전투 임무에 나가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전투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기뻐 출전하기 전 장비를 점검하며 가슴이 두근두근 뜀을 느끼며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음이 그저 행복했었으니까.
누군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 기쁨이었다는 건 오래 전 여신이 나를 내어치려 했을 때 버렸다 생각했었는데 , 너와 전장에 나가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네가 아발론 게이트에서 나를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 맹세한 그 날 이후부터 너는 나의 방패가 되었고 , 나는 너의 지팡이와 검이 되었지.
네가 내 방패가 되겠다며 뒤를 부탁하겠노라 달려갈 때 나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지팡이를 뽑아 눈 앞의 적을 향해 얼음과 폭풍 , 화염을 쏟아부었다. 한 손엔 대검 , 한 손엔 방패를 들고 맨 앞에서 적을 상대하는 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주신의 충실한 방패이자 내게는 든든한 방호벽과도 같았다. 다른 때도 그러했지만 그 모습은 점점 네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의 일도 많이 겪었다. 그다지 나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편인 너의 윗선에서 너와 내가 함께 출전해 올린 성과가 제법 좋다는 걸 알고는 사람을 제대로 쉬게끔 해 주질 않았다. 기사단 내에서 너와 지낸 나날의 8할은 언제 목숨이 날아갈 지
모르는 전장에서 보내었다면 설명이 될까 ? 예전같았다면 좀 작작 굴려먹으라며 툴툴거렸겠지만 그 때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단 것 만으로 그저 좋았다. 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는 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
그럴 때마다 전투의 마무리와 네가 입은 부상을 치료해 주는 건 늘 내 몫이 되었다. 사실 내가 자원했지만 .
가끔씩 너는 치료를 받던 중 내 손길이 좋다며 - 앞으로는 자주 다쳐봐야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저를 치료해 줄 테니까요 - 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제대로 다쳐보지 못했나 봐 ? 하며 네 잔 근육이 보기좋게 붙은 등을 철썩 하고 때리며 면박을 주었다.
나는 그 때 네가 기사의 자리에서 은퇴하지 않는 한 크고 작은 부상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지만 되도록이면 네가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네 뒤를 지키겠다며 네 등에 길게 그어진 전투의 자국을 어루만지며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맹세했다.
그 때 치료를 받기 위해 등을 맡긴 네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 것을 보았다. 내겐 그렇게 애정 표현을 밀어붙이는 주제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부끄러워 하다니. 너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 것에 대해선 나중에 또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발론 게이트 내의 낡은 도서관이나 사람이 찾지 않는 성 벽의 낡은 망루는 우리가 자주 만남을 가지던 장소였지 ? 찾아오는 편은 언제나 네 쪽에서였지만 임무가 없는 짧은 휴식 시간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자주 만나 연인다운 시간을 보냈었다.
너는 유난히 우리가 처음 입맞춤을 했던 때 부터 나를 벽에 밀어붙여 품에 꼭 가두고 입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도서관 내에서 책을 고르다 책 한권에 동시에 손이 겹쳐졌을 때나 성벽 위에서 내 무릎에 너를 눕히고 리라를 연주할 때라던가 . 짧지만 느긋한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너는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다 갑작스레 나를 밀어붙여 이마에서 눈 , 코 , 입술까지 단 한 군데도 놓지 않고 입맞춤을 퍼붓던 너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능청스러운 다누의 자식이었지.
목이 훤하게 드러난 옷을 입은 날 목덜미에다 네 입맞춤의 흔적을 남겨 나를 조금은 곤란하게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내게 호감을 보이는 기사단 내부의 남자 기사들에게 묘한 질투심과 소유욕이 섞인 행동을 보이며 견제하는 그 태도도 너와 연인이 되기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기에 그닥 나쁘진 않았다. 그런 날이면 유난히 네 키스가 거칠고 집요했다는 걸 너는 알까.
웃기게도 우리는 딱히 앞 일을 걱정하진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너 또한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너는 가장 최전선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기사단의 전투조 조장이었기에 언제 전투에서 죽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너와 함께 임무를 가지 못했을 때 나는 너의 비보를 듣게 될까 항상 불안했었고 그럴 때는 종종 네가 죽는 악몽을 꾸며 새벽녘에 잠을 깨곤 했다. 에린에서의 긴 시간을 살아오며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고 ,떠나보냄으로 인한 아픔이 무뎌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소중한 이를 만들었고 그를 잃을까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내 결정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때에도 ,너를 잃어버린 지금에도…
그럴 때마다 너와 나는 조금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애정어린 표현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이라면 적어도 마음 표현하기를 미루지 않겠다는 게 너와 나의 생각이었지.
사랑에 빠진 이들은 매일매일이 행복이라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게 그 불안함이었음을 알까. 그 불안함이 극에 달한 일은 생각외로 빠르게 다가왔었다. 네 집단이 바라던 목적이 어느 정도 성사되었지만 너와 내가 함께 추락해 내린 날 .
열린 이계의 문을 통해 결국 선지자들이 다른 세계의 신을 불러 낸 날이다. 그로 인해 짓밟혀지는 에린을 위해 나섰던 날 .
유난히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투였다. 신의 힘을 빌릴 뿐인 한낱 인간이 온전한 신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일이었으니. 그 때 나는 기사단에 들어와 마음을 열기 시작한 사람들이 눈 앞에서 그에 의해 허망히 목숨을 잃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아야 했다. 늘 보고 겪어왔으나 그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지. 그 날 이계의 신은 내 앞에서 너를 앗아 갈 뻔 하였다. 그 때도 너는 나의 방패가 , 나는 너의 지팡이와 검이 되어 사력을 다해 싸워 겨우 이계의 신과 선지자를 다시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와 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아발론 게이트의 폐허에서 심하게 다친 채 쓰러져 있었다.
이계의 신에게 살신(殺神)의 창 ,브류나크를 꽂는 것은 성공했으나 나는 그 날 이후로 내가 담고 있던 모든 신에 관련된 힘을 잃었고 ,빈사 상태까지 심하게 부상을 입은 너는 목숨은 건졌지만 한 동안 깨어나지 못했지. 겨우 숨만 붙어있는 너에게 마나가 바닥날 정도로 힐링을 퍼붓고 탈진해 바닥에 쓰러져서도 너를 향해 겨우겨우 기어가 손을 잡고 몇 번이나 일어나라고 , 제발 죽지 말라며 소리치며 오열했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그 일을 두 번은 겪고 싶진 않았지만 결국은 겪어버렸고 나는 혼자 남아버렸네.
너는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 후에 겨우 의식을 찾고 눈을 떴다.
아발론 게이트가 완전히 부서져 버렸고 ,이계신과의 전투로 인해 많은 기사들이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너를 돌봐줄 이는 나 외에는 없었다. 나 또한 부상을 크게 입은 편이었지만 네가 숨을 놓지 않기만을 바라며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너를 간호하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네가 눈을 떴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의 감촉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온 몸 군데군데 붕대를 감은 네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 하마터면 네가 숭배하는 주신의 곁으로 영원히 갈 뻔 했어 이 멍청아 !! "
네 얼굴을 보자 기뻤지만 왠지 눈물이 터져나와 괜히 네게 화를 내며 너의 넓은 가슴팍을 몇 번 때렸었지.
네가 아프다 말했을 때 나는 그저 너를 끌어안고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 일을 다시금 이야기 할 때면 너는 생각외로 내가 울보였다며 놀리곤 했다.
목숨을 건진 건 다행이었지만 너는 그 날 이계신에게 입은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기사단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는 기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었지. 은퇴하는 것 .
많은 이들이 한 때 주신의 충실한 검이자 알반 기사단 최강의 방패였던 네가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검과 갑옷 , 방패를 반납하고 짐을 꾸린 너는 청빈한 주신의 종 답게 간단한 짐만 꾸려 알반 기사단을 떠났지. 하지만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왜냐면 네가 떠나는 길에 나도 함께 동행했으니까 .
너와는 달리 내가 그 집단에서 발을 빼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애초에 정식으로 입단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협력자 로써 기사단에 발을 들인 것이었으니. 너와 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이계신 문제를 해결한 직후 떠날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돌아갈 곳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
우리는 이멘마하 코일 숲속의 내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숲 속의 섬 같은 아늑한 내 휴식처.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집이었지만 두 사람이 살기엔 적당한 공간이었다. 여기서 식구가 하나 더 늘어도 좁진 않을테고 .
그 때 이리아로 떠나려 집을 처분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
그 때부터 우리는 함께 살았다. 네가 마지막 숨을 놓을 때 까지.
함께 추락해버린 별에서 온 영웅과 주신의 검은 그저 평범한 다누의 자식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통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절제된 삶에 익숙한 너는 처음엔 여러모로 그 삶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이전 , 흘리듯이 네가 이야기했던 - 만약 죽지 않고 무사히 은퇴한다면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평온하게 살아보고 싶다 - 는 말이 그제서야 이루어진 걸까.
나는 비록 아튼 시미니의 신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네가 살아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됨을 이 에린에 와 처음으로 네가 믿는 신에게 감사해 했다.
혼자 살던 코일 숲속 오두막집 안에는 한 사람의 흔적이 더해졌다. 무작정 창고로만 쓰던 방 한 켠은 책을 좋아하는 너를 위한 서재가 되었고 침실 안의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침대는 조금 더 크고튼튼한 나무 침대로 바뀌었다.
잠깐 침대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이 집에 처음 오던 날 너와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려다 그만 네 무게를 못 이긴 침대 다리가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지. 그 때 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하던 모습이 참으로 귀여워 보여 너를 바라보다 그만 폭소해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그 침대는 너무 낡아서 조만간 바꿀 생각이긴 했었지만.
날이 좋은 날 정원에 널어놓은 빨래에는 네 큰 옷이 함께 펄럭거리며 따스한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 오도카니 놓여 있던 식탁 위의 예쁜 꽃무늬가 그려진 컵과 식기도 한 사람분 더 늘었고 , 욕실 안의 칫솔과 컵도 일인분 더 늘었다. 작은 세간살이들이 한 쌍씩 사이좋게 늘어놓여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그제서야 너와 함께 살게 됨을 실감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너와 코일 숲 작은 집에서 평온하게 살아갔던 시간이 내게 있어선 살아왔던 날들 중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 에린의 수호자 , 신의 힘을 가진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온 에린을 누비며 다닐 때 보다 훨씬 더 .
내게 있어선 짧았지만 너에게는 제법 길었던 그 시간. 그 동안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그 덕분에 네가 떠난 지금도 나는 그 기억들을 의지해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만...
사랑하는 이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삶은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다.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늘 네 봄날같은 낮고도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한번 잠들면 스스로 일어날 때 까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자던 나였지만 어째서 네가 아침을 알리며 나를 부를 때는 그리 칼같이 눈이 떠 졌는지. 물론 잠이 덜 깨 아침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지만 그 때마다 너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잠이 많으신 줄은 이제야 알았다며.
팔라라가 떠 있는 낮에는 함께 약초를 캐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거나 집 앞 정원 한켠에 밭을 일구어 야채와 약초를 키웠다. 부름을 받고 전장으로 달려나가지 않을 때면 나는 본업이나 마찬가지인 드루이드와 치료사의 일에 전념했었으니까.
모두가 선망해 마지 않던 그 힘을 잃었지만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너와 함께 평범한 다누의 자식처럼 살아가는 기쁨이 고독한 영웅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았기에.
일이 없는 날에는 함께 느긋한 시간을 보냈었다. 하늘이 맑고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정원에 서 있는 커다랗고 오래 된 삼나무 그늘에 작은 다과상을 차려놓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다 조금 쉬고 싶을 때는 그대로 자리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우리는 늘 손을 꼭 잡은 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자세로 그리 낮잠을 잤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때 너는 매우 편안한 표정을 한 채 잠들어 있었었지. 너도 나만큼이나 만만찮은 악몽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던 지라 그런 널 보며 이제서야 마음을 놓고 쉴 수 있게 되었음이 기쁘기만 했다.
가끔은 코일 숲을 나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평범한 연인들처럼 사랑 놀음을 했었지. 기사단에 몸담고 있을 때 종종 임무 수행을 위해 이멘 마하나 던 바튼 , 타라 같은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보았던 그들의 일상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
단 한번이라도 너와 평범한 연인이 되어 아무 걱정 없이 도시를 누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 소망했었는데 조금 늦게나마 그 바램이 이루어진 셈이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
그 동안 규율 때문에 먹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들도 실컷 먹으러 다녔다. 네가 생각외로 단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손을 잡은 채 도시의 이 곳 저 곳을 구경하다 해가 저물면 광장으로 모여드는 음유시인의 공연도 즐겼지. 특히나 이멘 마하의 공연장에서 열리는 음유시인들의 연주회를 네가 매우 좋아했는데 음악에 귀를 귀울이다 보면 가끔 네가 그들의 선율을 따라하며 기분 좋게 부르는 콧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매번 돌아오는 삼하인의 날마다 우리는 연주회를 들으러 이멘 마하를 찾았지.
하지만 너는 그 어떤 음유시인의 연주보다 내가 정원에서 너를 위한 노래를 연주하는 것이 더 좋다 하였다. 연주회가 끝난 날이면 종종 그 곳에서 들었던 내게는 생소한 노래를 청할 때면 나는 좀 당황했었다.
하지만 너를 위해 류트를 퉁기고 하프를 연주하는 건 내 하나의 즐거움이었으니 그건 일단 좋은 추억이었지.
밤이 되면 종종 이멘마하의 주점이나 카브 항구의 선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나는 제법 술이 센 편이었지만 너와 재미로 술 마시기 내기를 하고는 만취해 네 등에 업혀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너는 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신실한 성기사였지만 왠걸 . 너와 처음으로 주점에 간 날 나는 ,그 독한 벨바스트 위스키를 몇 병이나 비우고도 끄떡없는 네 모습을 보았고 결국 밤 하늘의 별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며 네 넓고 탄탄한 등에 업혀가고 말았다.
그날 밤 취해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했더라 ??
그럴 때도 있었지만 밤 산책 때는 술 마시는 것보다 시원한 풀 내음을 가득 담은 바람을 느끼며 너의 손을 잡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다니는 게 더 좋았다.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은 별과 달이 뜬 밤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러면서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다 아주 가끔 ,그림 좋아 보인다며 시비를 걸어오는 그닥 질 좋아 보이지 않는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은퇴했다 하더라도 한 때는 에린의 영웅과 알반 기사단 최강의 기사 아니였던가.
그럴 때마다 그들을 간단하게 때려눕히고 손을 털며 돌아 나오며 아직 우리 실력이 그다지 녹슬지 않았다며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거리고 웃었었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너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고 , 때로는 늦게까지 사랑을 속삭임이 나는 너무 좋았다. 라스파 화산의 열기처럼 달아오른 몸을 끌어안고 , 가까이에서 눈을 맞추며 서로를 바라보고 늘 그러했던 것처럼 오랜 싸움으로 인해 거칠어진 손을 겹쳐 잡고. 그럴 때마다 나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사랑한다 말을 하는 네 하늘빛 눈웃음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리하여 너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찬 나는 너를 내 품에 꼭 끌어안고 햇살과도 같은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치 따스한 태양을 품에 안는 느낌이었다 .
네가 가끔 눈이 돌아가 나를 재우지 않을 때는 체력적으로 많이 버겁긴 했지만 그럴 때는 팔라라가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를 때 까지 늦잠을 자곤 했지. 느긋하고 사랑스런 나날이었다.
종종 너는 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게 너무나 좋다며 아침 단장을 하고 있는 내 뒤에 다가와 내 머리를 빗질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검만 잡던 기사님 아니랄까봐 힘으로만 빗어 내리려는 게 제법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자 네게 머리를 맡기는 게 편했다. 시원하기도 했었고 종종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며 좋은 냄새가 난다며 웃던 네 모습이 너무 다정했었으니까 .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겠지만 여느 연인과 부부들처럼 ' 혼인 ' 이라는 것도 했다. 집 앞 마당 정원에 심은 커다란 나무에 분홍빛 꽃들이 만개한 어느 알반 에일레르의 계절에
코일 숲속의 잊혀져버린 아튼 시미니의 사원에서 둘만의 혼인을 했었다.
하객도 , 주례도 없는 둘 만의 결혼식이었지만 코일 숲의 수 많은 개암나무와 새와 토끼 , 사슴같은 동물들이 스쳐가며 지켜보는 가운데 치루어진 두 사람만의 약속.
서로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정교한 매듭 문양 반지가 우리의 결혼 반지였다. 그 때 너는 나를 바라보며 나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네 마지막 순간까지는 내 곁에 있겠노라며
네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고 내게 다시 맹세했었지.
혼인 후 이리아 대륙으로 넘어가 얼마 동안 광활한 대지를 여행한 일도 아직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어릴 적 부터 폐쇄적인 알반 기사단 내에 몸담으며 금욕적인 생활로 자신을 채찍질 해오느라
내겐 흔한 일이었던 여행 하나 해 보지 못했던 너를 위해 했던 일이었다. 함께 말을 타고 익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선 땅을 방랑했었지.
하늘과 땅이 맞닿은 끝이 보이지 않던 초원과 , 엘프가 산다는 모래 폭풍이 치는 사막 ,모든 것들이 눈으로 덮혀 고요히 얼어버린 설원의 땅과 드래곤이 산다는 불타는 대지의 끝까지.
낮이 되면 말을 달려 여행을 하고 , 밤이 되면 불을 피워놓은 휴식처에서 잠이 들 때까지 악기를 연주하며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리아의 하늘을 보았다.
피곤에 지쳐 누운 너를 위해 무릎을 내어주고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면 너는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때로는 잠이 들 때까지 별의 갯수만큼 키스를 할까 하며 입맞춤을 나눌 때도 많았다.
그 때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살아가게 해 달라고 수 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밀레시안과 다난의 인연이 늘 비극으로 끝나는지 아는가 ? 처음부터 우리는 다른 시간의 법칙을 따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늙지 않으며 쉽게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가는 밀레시안과 자연스레 나이를 먹으며 쉽게 죽어버리는 다난이 함께 자연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하는 일을 누릴 리는 없지.
떠나는 것은 언제나 다난이었고 남아 기나긴 기다림을 견디다 못해 지쳐 소울 스트림의 빛으로 화해가는 건 나의 종족. 밀레시안이었지. 가끔 그것을 생각하면 너를 사랑하길 잘 한 걸까 ? 라는 의문이 듬과 함께 앞일이 두려워지긴 했었다.
하지만 , 정말로 행복했다. 너와 살았던 그 시간들이. 그 행복에 취하여 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 너와 나의 시간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잊어버렸다.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너와 만났던 가을을 몇 번이나 마주했을까. 내 손을 잡는 너의 손이 예전보다 주름졌고 말랐다는 것을 어느샌가 깨달았었지.
너를 만났던 때와 별반 차이 없던 나와는 달리 , 너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갔고 늙어가고 있었다.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그 청명한 가을 하늘같은 너의 눈빛은 그대로였으나 태양같다며 좋아했던 너의 눈부신 금발 머리 위에는 어느 새 시드 스넷타의 풍경같은 눈이 내렸었다.
곧 퇴역한 후에도 내게 검 대련을 청하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던 검도 더 이상 들기 힘들게 되었지. 한 때는 한손으로 그 무거운 검을 가볍게 휘두르던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생각외로 빠르다며 너는 쓰게 웃었지. 그 때가 되어서야 나는 네가 꽤나 나이를 먹었음을 직감했다. 내가 너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은 어느 새 현실이 되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바깥으로 산책을 나갈 때면 이미 우리를 연인이나 부부로 보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알아보는 것은 소수의 내 동족들과 한 때 함께 등을 맡기고 싸웠던 기사단 동료들 뿐.
모두들 우리를 사이 좋은 부녀지간으로 보았었다. 어쩔 수 없다며 나는 쓰게 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네가 옆에 있음이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너와 나는 알고 있었을까.
그 어떤 것에도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네가 쓰러진 건 그 이후로 몇 년이 더 지난 가을날이었다.
전날 나와 산책을 가고 싶다 청했던 너는 그날따라 유난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가벼운 몸살을 앓으며 연신 기침을 하던 너였기에 그날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게 아픈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기침을 심하게 하던 네가 새빨간 피를 한 말이나 쏟고 쓰러졌었다. 서둘러 불러온 힐러의 말은 여태껏 들어왔던 절망적인말 중 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다.
너의 시간이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던 것 .
네 병은 생각외로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였다. 그 동안 많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용케도 아픔을 모두 참고 있었느냐 . 이제는 손을 쓸 수가 없으니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며 너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 하였지. 고통을 덜어주는 약 밖에 줄 수 있음이 없다 말하며 약을 건네는 힐러조차도 내게 아버님을 편안하게 해 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 보통 사람들이 보는 너와 나는 이제 그리 보였을 거다.
내게 병이 진행되고 있음을 숨긴 네가 미웠음은 아주 잠시.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어차피 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 전장에서 주신의 검으로 목숨을 바쳤을 테지만 이렇게 나를 만나 자연스레 시간이 주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주신의 축복이니 감사하게 받아들일 뿐이라며 너는 울고 있는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떠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다시 너를 잃고 혼자 남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기에 .
알고 있었다. 네가 퇴역한 알반 기사단의 일원 치곤 제법 오래 살아왔다는 것을.
고작 인간의 몸에 신의 힘을 담고 ,그 힘을 이용해 싸우는 일은 아무리 그것을 위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한다 한들 결국은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다.
은퇴한 기사단원들의 마지막은 한결같았다. 몸에 담긴 신성력은 그 육체를 서서히 좀먹어 들어갔고 그로 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에 극한까지 시달리다 숨을 놓고 알반 기사단원들이 매장된다는 벨바스트 토리 협곡의 집단 묘지에 매장된다는 것 .
너를 따라 퇴역한 기사단원들의 간호를 했었던 나는 그 최후 또한 내 눈으로 보았지. 그리고 언젠가는 너도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을 알기에
너무나 두려웠다. 그 때 너는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뿐더러 자신은 자주 힐러를 찾아가 몸 상태를 확인받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며 , 자신은 아마도 가장 오래 살아남은 기사단원이 될 것이라 말하며 웃었지.
하지만 그것 또한 네가 나를 위해 거짓말을 했었던 것 .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너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지.
그 사실을 알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우리가 언약했던 오래 된 아튼 시미니의 사원에서 어찌하여 내 사람마저 빼앗아간 채 나를 혼자 두게 만드느냐며
저주와 원망의 말을 퍼부으며 오열했었다. 뒤늦게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던 너를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어째서 네가 먼저 떠나야 하는지. 네가 왜 그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금방 무너져버릴 것 같은 너의 몸을 끌어안고 아픈 말을 쏟아내며 울부짖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너는 오히려 코일 숲의 나무 껍질처럼 말라가기 시작한 손을 뻗어 나를 위로했다.
그 때 함께 비를 맞으며 아픔을 나누던 때처럼 …그 때의 넓고 단단했던 품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너를 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 손을 놓을 순 없었다.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어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 외에 모든 힘을 잃었고 , 어떠한 약도 힐링 마법도
너에겐 듣지 않았다. 이미 생명력이 고갈되기 사작한 사람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해 본들 네 몸이 이미 그 힘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서서히 너는 부서지기 시작한 낡은 성벽처럼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숨을 놓기까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지.
너의 생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한 나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은 너를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었다.
이제는 거동조차 힘든 너를 돌보고 , 네가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때마다 너를 안아 위로하며 , 잠들기 전 마다
우리의 옛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에 시달릴 때에도 너는 그래도 자신의 삶이 꽤나 행복했다 하며
나를 보며 웃었다. 병마에 지쳤어도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몇십 년 전의 젊고 당당하던 그 때 그대로였었고 . 네가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너의 모습 모두를 내 눈에 , 내 머릿속에 , 내 마음속에 담았다.
지금도 네 모습이 생생하지만 그래도 네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많이 , 아주 많이 남겨둘 걸 그랬네 .
너는 결국 삼하인을 며칠 남겨 둔 어느 맑은 날 . 마지막 숨을 놓았다. 결혼 반지는 네가 남긴 유품이 되었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그날 이후로 모두 멈추어 버렸다.
모든 기력이 다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 그 몸으로 앙상한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고 마지막 기력을 다해 자신이 떠나도 나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 달라. 나를 처음 만난 라인 알트에서의 그 날 이후로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말하며 마지막으로 내 웃음을 저승길 선물로 받아 떠나야 할 것 같다며 웃어달라 하였지.
한 없이 따뜻한 사람. 하지만 잔인한 사람 . 내가 애 써 너에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감정을 애 써 삼키며 웃어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따스한 웃음을 희미하게 지어 보였고 그와 동시에 너는 마지막 숨을 놓았다.
고요한 숲의 오두막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외로운 별의 울음과 절규만 울려 퍼졌던 날이었다. 숨을 놓고 차가운 껍데기만 남은 너를 흔들어 깨우며 해가 지고 한밤중이 될 때까지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고 , 또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 날 이후 내 마음의 반 쪽이 송두리째 허물어져 버림을 너는 알까.
너의 장례는 퇴역한 알반 기사단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간소하게 치루어졌다. 토리 협곡에서 화장되어 기사들의 공동 묘지 한 켠에 묻히는 것 .
내 손으로 너를 묻어주고 싶어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나마 매장되기 전 겨우겨우 부탁하여 네 유골의 일부만 빼돌려 올 수 있었다.
그렇게 가져온 네 유골의 일부를 너와 내가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던 집 마당의 커다란 나무 밑에 묻었지. 그래서였을까 ? 그 이후부터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너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렇게 너에 대한 생각에 오랫동안 잠겨 있는 , 네가 떠난지도 근 몇 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너는 그 나무 밑에서 내게 따스한 웃음을 짓고 있지.
참 따스한 사람이었다. 혼자 춥고 외로운 세월을 견디던 떠돌이 별에게 너는 따스한 팔라라의 빛과도 같았다.
그 따스함에 취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너와의 사랑에 듬뿍 빠져 그리 살았다. 행복했지. 하지만 그리 시간이 가고 너를 허무하게 보낼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너를 사랑하고 아끼고 품을 걸 그랬다.
내 사랑을 모두 너에게 주었다 생각했지만 네가 떠난 후에도 너에게 줄 마음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지. 네가 그 마음을 받을 일은 영영 없겠지만.
나는 결국 네 뜻대로 나만의 시간을 살아 가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도 눈을 뜨면 네가 아직도 있을거란 생각에 여전히 두 사람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차를 마시며 바로 옆에 네가 있는 양 이야기를 했다. 종종 연주하곤 했던 악기 연주 또한 모두 네가 좋아하던 음악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침대에서 , 식탁에서 , 서재에서 , 정원의 나무 밑에서 웃고 있는 네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지. 하지만 손을 뻗으면 금방 사라져 버렸지.
함께 살던 집 , 같이 손을 잡고 걷던 거리 , 함께 여행했던 모든 곳마다 너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박혀 떠올랐다. 발 닿는 모든 곳마다 모두 너와 함께한 추억들이 조각조각 남아 차마 나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 동안 온 에린을 방랑하며 너를 잃은 슬픔을 달래어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너와 함께 한 추억들이 다시금 떠올라 그저 아플 뿐이었다.
너의 파편들은 이미 내 마음 깊이 박혀 버려 , 이제는 빼 낼 수도 지울 수도 없었음을 나는 그 때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너의 웃는 모습 , 화내던 모습 , 슬퍼하는 모습 , 너의 모든 모습들이 담긴 파편을 하나하나 꺼내어 기억하고 다시 기억하고 ..
오늘처럼 너를 생각하고 네가 떠난 자리를 여전히 지키며 나만 홀로 남은 채로 ... 네 이름을 다시 불러 보며.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내 사람.
.... 내가 없는 곳에서 긴 잠을 자는 내 사랑아.
톨비쉬 . 외로운 별의 기사님 .
아직도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네가 책을 읽다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너와 함께 살았던 코일 숲 속 작은 오두막에서 너의 파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제 , 오늘 , 그리고 내일도 그러하겠지.
다시 계절이 지나고 너를 만나고 사랑했고 이별했던 가을이 올 것이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듯이 , 내게도 언젠가 그럴 때가 오겠지. 흙으로 돌아가는 다누의 자식들과는 달리
언젠가는 별의 먼지로 돌아갈 날이 오겠지만 그 때도 너를 간직한 채 나는 살아가겠지.
비록 너는 떠나고 나만 혼자 남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