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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을 찾는 인간
연어는 알에서 부화된 후 몇 주가 지나면 먼 바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3-4년 후에는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생애를 마칩니다. 연어는 왜 그토록 먼 여행을 할까요? 어째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든 여행을 마다하지 않을까요? 연어 자신도 모를 것입니다.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연어와 같은 본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항)
예로부터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물이나 나무를 섬기는 형태이건, 조상 영혼을 신성시하는 형태이건,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심오한 종교이건 간에, 모든 인간은 종교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 ... ... 할말이 없다...
존나 불교 무속신앙 무시하냐?
2.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인간
어떤 이들은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은 헛된 신기루를 쫓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집중해서 살펴보면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갈망은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먼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세계를 바라봅시다. 광활한 우주, 수많은 동식물들의 조화로운 관계, 인체의 신비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이 모든 것들 배후에 “어떤 분”이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19-20).
땅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바다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드넓게 퍼져 가는 대기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하늘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이 모든 실재하는 것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든 것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들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고백입니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들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그 누가 만들었겠습니까?(성 아우구스티노)
=> 하... 두번째 할말이 없다...
존나 과학무시하냐? 믿으면 다 되냐?
첫페이지가 이런데 더 읽어봐야되나요...
이게 잘못된거겠죠? 다른 천주교 교리를 아신다면... 자료나 링크좀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가 원본]
혹시나 해서 2페이지를 읽었습니다...
5. 계시(啓示)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으로부터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식의 질서, 곧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내어 주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50항).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어떤 분”, 즉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는 알 수 있어도, 하느님의 속성은 알 수 없습니다”.
강 건너편에 집이 있습니다(우리에게는 강을 건너갈 수단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집의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그 집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음(존재)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속성)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커튼이 걷혔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주인공을 생생히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이 강을 건너와 우리 집 안에 들어와서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revelation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서 보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전능하시다, 공정하시다, 삼위일체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눈으로 직접 보거나,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수준 차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보고 느끼고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심을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속마음, 본모습을 열어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하느님의 계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6. 수양 종교와 계시 종교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때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교는 계시 종교”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기 힘만으로는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반면에 불교나 힌두교, 유교, 도교와 같은 종교들은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깊은 명상을 거듭하게 되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종교들을 수양 종교라고 부릅니다.
수양 종교들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수양 종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면벽 수행을 하는 스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일체의 사념을 끊어버린 채 명상에 전념하는 모습은 용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수양 종교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양을 거듭한다고 할 지라도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본성상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이고, 이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계시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2항).
원래 이렇게 까지 말 안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병맛이네요... 하... 성당사이트인데... 다른거 찾아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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