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은비를 혼낼 때는 조금 날카로워 지지만 말이다.
“후우...”
아내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인 탓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내가 재차 물었다.
처음 보는 번호인데 걸자마자 한숨부터 쉬어서 그런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나야.”
짧게 한 마디 했다.
-어? 자기야?
단번에 알아챘지만 역시 의아해 하는 목소리였다.
“어. 은비는 자?”
-아니 아직. 음음. 이 번호는 뭐야? 음음.
밥이라도 먹고 있는 걸까.
손목을 올려 시계를 봤다.
열시 이십 분.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아아. 후배직원 전화야. 내 게 지금 고장 났거든.”
-음음. 음음. 아휴 어쩌다가. 그런데 밥은 음음 먹었어?
“어. 뭐 대충. 그건 그렇고,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왜? 음음 많이 바빠? 음음 은비가 자기 때문에 안자고 있는데. 음음.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할게. 은비 어서 자라 그래.”
-음음. 음음.
아까부터 우물거리는 소리가 계속 거슬린다.
대체 뭘 먹길래.
“대체 입안에 뭐야? 통화할 때는 삼키든지, 뱉든지 하라고.”
-음음. 아아. 알았어. 잠깐만. 음음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꿀꺽’하는 소리가 들린다.
삼킨 모양이었다.
“뭘 먹은거야?”
-아. 별 거 아니야.
“뭔데? 맛있는 거면 나도 내일 해줘.”
-후후. 은비 바꿔줄게~
‘은비야 아빠야~’ 하는 아내의 소리와,
‘어 정말?’ 하는 은비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은비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필중이 말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요?”
“아, 아냐. 그냥 딸내미가 소리를 좀 질러서 흐흐흐.”
어색하게 웃어주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그래 아빠야. 깜짝 놀랐잖니.”
-아빠! 아빠! 음음. 오늘 음음. 왜 안 와~?
“아빠가 오늘 너무 바빠서 그래. 내일 일찍 갈게.”
-아아아아~ 치킨 치킨~ 음음. 치킨~
“은비 너~ 아빠보다 치킨이 더 보고 싶구나.”
은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냐. 아빠가 훨씬 보고 싶어. 음음
가만히 듣고 있으니 은비도 뭔가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비야. 그런데 지금 엄마랑 뭐 먹고 있었니?”
-응~ 음음 나 지금 껌 먹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껌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반응을 하는 모양이다.
“어, 어 그래. 은비야. 아빠가 며칠 전에 사준 치약껌이니?”
-아냐 그거~ 음음 엄마가 대빵 맛있는 껌 줬어~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든다.
“치,치약껌이 아니면 무슨 껌이야?”
-우웅~ 치약껌보다 음음. 훨씬 훨씬 음음. 백만배 달아 히히
치약껌보다 달다니.
살면서 수많은 껌을 씹어봤지만 어린이용 치약껌 이상 단 껌은 맛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단 껌을 찾기 힘들 거고.
그 껌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껌.
그 껌?
순간 어제 잃어버렸던 껌 두 개가 떠오른다.
“은비야! 그 껌 어디서 낫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은비가 깜짝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아~ 깜짝 놀랐잖아! 아빠 바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안 좋은 쪽으로 일부러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시중에 파는 껌일 것이다.
어쩌면 껌처럼 생긴 츄잉캔디일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은비야~ 그런데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아빠랑 말 안 해 흥!
“은비야~ 아빠가 내일 치킨 두 마리 사갈게~ 교촌하고 비비큐. 어때?”
-저엉말?
“그럼~ 아빠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와아아아! 음음. 아빠 내일 꼭 와야 해! 음음. 꼭이야 꼭!
치킨 두 마리에 겨우 은비의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럼 아까 아빠가 물어본 거 대답해줘야지~”
-응? 아아 껌 뭐냐구?
“그래.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음~
잠시 은비가 말을 멈추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모양이다.
우물거리는 소리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대리님. 너무 오래 쓰시는 거 아니에요~”
필중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필중을 향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수화기 멀리서 ‘엄마 이 껌 아빠가 준 거 맞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사준 치약껌은 분명히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사다준 껌이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반드시 생각해내야만 한다.
잠시 후,
‘어 맞어.’ 하는 아내의 소리와 함께 다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이거 엄마가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껌이라고 했었어.
“응? 은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우리 주려고 세상에 두 개 밖에 없는 껌을 사왔다고 했어.
“아빠가?”
-응 아빠가 음음.
“대리님. 왜 그러세요. 껌 뱉으셨어요? 표정이 왜 그렇게...”
내 표정을 보던 필중이 말했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아마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이 분명하다.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맹렬히 뛰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호, 혹시. 그, 그, 그거 아빠 주, 주머니에 있던 거냐고 어, 엄마한테 물어봐”
입이 덜덜 떨린다.
-으응 알았어~ 엄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혓바닥으로 연신 입술을 축이지만, 임시 처방일 뿐 순식간에 다시 말라버린다.
잠시 후 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전히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으, 응. 으, 은비야. 뭐, 뭐래?”
-응. 맞대. 음음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대리님? 대리님?”
필중의 소리가 마치 스테레오처럼 울려서 들린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어긋난 모양이다.
-아빠! 아빠!
하지만 은비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은비야. 은비야. 아빠 말 잘 들어. 은비야. 은비야.”
-알았어 아빠. 음음. 왜 똑같은 말 해. 음음.
“하아. 하아."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은비야. 후욱. 지금 씹고 있는 껌. 절대로 삼키면 안 돼. 알았지?”
-응? 왜에. 음음. 이 껌 너무 맛있어서 이제 삼키려구 했는데. 음음
절대 이 껌을 삼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삼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겨우 여덟살짜리한테 그런 인내심을 바랄 수 있을까?
“이건 아빠랑 게임하는 거야.”
-응? 무슨 게임~?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아, 아빠가 올 때까지 은비가 껌을 계속 씹고 있으면. 아빠가, 아빠가 똑같은 껌을 또 줄게!”
일단 되는대로 말 해 버렸다.
-어? 정말?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은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 하며 말이 나왔다.
“아, 그, 아, 뭐. 아, 아냐. 은비야. 이건 그 껌보다 더 맛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껌이야~”
그래도 겨우 임기응변은 해냈다.
-흐음~
잠깐 뜸을 들을 들이더니,
-알았어 아빠. 나 안 삼킬게.
은비가 말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와 버렸다.
“은비야. 꼭이야. 아빠랑 게임하는 거니까. 꼭 지켜야 해. 알았지? 약속~”
-응응 알았어.
“은비야. 그럼 이제 엄마 좀 바꿔줄래?”
은비보다 아내가 더 문제였다.
아까 전에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삼켰다.
-여보세요?
“너, 너!! 아까 삼킨 거 뭐야. 뭐냐고!”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내 예상이 맞다면,
내 예상이 확실하다면.
“뭐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은비한테 안 들었어?
문에 몸을 비비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처참하게 찌그러진 몸뚱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다.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나 붙어서 너덜거리고 있고, 괴상한 소리를 연신 내뱉고 있다.
저 들도 이틀 전에는 사람이었다.
껌을 삼키기 전에는 말이다.
“야 너!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어!?”
-응?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껌 삼킨 것 땜에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그런데 그냥 껌이 아니지.
삼키면, 괴물이 되는 껌이지.
“내 주머니서 뺐어? 확실히 그 껌 맞아?”
정신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자꾸. 무섭게. 그 껌이 그렇게 중요한 껌이었어?
확신이 확실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고 시작했다.
“야! 왜 남의 주머니에 손을 대! 너가 도둑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이 막 나온다.
-대, 대체 왜 그래. 그 껌이 그렇게 아까워? 그 많은 것 중에 두 개가 그렇게 아까워?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따지기 시작했다.
미여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꺼냈다.
“씨팔! 너 정말 삼켰니? 아 맞다. 토하면 되겠다. 자기야. 소금물 마셔. 어서 토하라고!”
-자기 정말 갑자기 왜 이래... 나 무서워. 무섭다고.
이미 껌을 삼킨 마당에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나 역시 괴물에게 습격당해 밀실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자기야.. 흑흑, 자기야.. 흐, 흐흑”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 기야... 나, 나 무서워. 왜 울고 그래...흐, 흐흑.
아내도 덩달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필중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음, 흐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끅, 흐음. 금방 끊을게. 미안하다 필중아.”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집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참으려 해도 이 흐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후배직원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들썩이는 어깨를 억지로,
억지로 멈추고 필중을 향해 말을 꺼냈다.
“흐읍. 필중아. 나 마누라한테 딱 이십 초만 얘기하고 끊을 테니까. 잠깐만 떨어져 줄래?”
필중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필중이 충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 수화기에 입을 대었다.
“자기야.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학교 동아리에서 말이야. 흐읍. 그 때도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던
놈들 엄청 많았잖아. 흐읍.”
-그 얘기를 갑자기 왜, 왜 하냐고! 으아아앙.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울었었는데 기억나? 뉴스 보고 울었잖아. 흐읍. 우리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어린 아이가 죽었다고 그렇게 울었었잖아. 흐읍. 나 그 때 자기 참 푼수라고 생각했었어. 하하. 흐읍.”
-으아아앙!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흑흑.
“자기야, 아니 은영아. 내 말 잘 들어.”
-흑흑. 흐흐흑.
“지금부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만 믿고 견뎌야 해. 알았지?”
-흑흑, 흑흑흑
“어서 대답해! 알았지?”
-흑흑... 알았어.
“그래. 그래야 내 마누라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으아아앙!
나는 아무 말도 해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됐다.
이 말만 빼고는.
“사랑해.”
-자기야, 자기...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슬라이더를 거칠게 닫은 후, 물기어린 눈가를 오른 팔로 쓰윽 닦아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필중이 다가왔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굳은 표정으로 필중을 바라보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필중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자.”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건방진똥덩어리'님 作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