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재 놓은 안심 고기를 이용해 돈까스를 만들었다.
슈퍼에서 사 온 빵가루를 묻히고, 식용유로 잘 둘러놓은 프라이팬에 고기를 튀긴다.
튀겨지는 동안 다지기를 이용해 참깨를 갈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온다.
소스는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꺼냈고, 밑반찬은 간소하게 차렸다.
방울토마토와, 양배추, 오이 등이 담긴 셀러드를 가운데에 놓고,
김치와 오이지를 작은 접시에 담아 양 옆에 두었다.
자, 이것으로 셋팅은 끝났다.
이제 튀겨진 고기를 접시에 담아 오는 일만 남았다.
......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딸칵
“여보세요?”
-아 자기 집에 들어왔어?
“응, 지금 밥 먹는 중이야. 고기 잘 재 놨네. 맛있어.”
-신경 좀 썼지. 나 지금 막 동창들 만났어. 늦지 않게 들어갈게.
“그래, 모처럼이니까 재밌게 놀다 와. 은비 때문에 안 불편해?”
-은비 지금 잠들었어. 식사 나오면 깨워야지. 동창들이 귀엽다고 좋아하네.
“역시 우리 딸은 어딜 가도 환영을 받네. 알았어. 끝날 때 쯤 전화 해. 끊어~.”
-딸칵
......
......
한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나머지 손으로 리모콘을 이용 해 티비 채널을 돌린다.
마침 푸드 채널에서는 태국 고추를 이용한 놀랍도록 매운 요리가 소개 되고 있었다.
열시가 넘으면서 부쩍 시계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지금도 시계를 쳐다보며 10시 15분인 것을 확인했다.
방금 전에 입에 넣은 껌에서 씹는 족족 넘치도록 단물이 흘러나온다.
이제 껌은 네 개 밖에 남지 않았다.
......
......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미안해. 많이 늦었지? 응. 어 아니. 동창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밥을 먹다가 쓰러
져서 지금 응급실에 와 있어. 응? 어 어. 은비는 옆에서 자고 있어. 자기 먼저 자. 어. 동창들 아무도 집
에 안 갔는데 혼자만 집에 간다 그러기가 좀 뭐 해서. 그래도 이따가 슬쩍 먼저 나오려고. 아무래도 은비
도 있으니까. 어 어. 아 무슨 떡 종류를 먹다가 식도에 걸린 것 같아. 얘가 조금 급하게 먹는 버릇이 있거
든. 아휴. 걱정이야. 응. 그렇게 됐으니까 계속 기다리지 말고 시간 늦으면 먼저 자라고. 응. 사랑해 자기
야~
......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벽에 걸린 시계의 작은 바늘이 숫자 12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아내는 어떻게 빠져 나오겠다더니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밖에 없는 집은 상당히 조용했다.
일정의 소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적막하고 쓸쓸한 기분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탁상위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치익, 치익 네 김....기자. 거...치익, 치익
뉴스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맑은 소리를 듣기 위해 천천히 주파수를 조절해 본다.
-치익. 네, 부산 해운대구에서 신종 마약 사범이 잡혔다는 속보입니다. 이 들은 특이하게도 껌을 통해 마약
을 판매하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껌 얘기였다.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였다.
-껌을 씹으면 마약 성분이 흘러나와 우리 몸의 중추신경으로 퍼지고, 이내 다른 마약과 같은 증세를 보이
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같이 껌을 매개로 해서 마약이 등장한 것은 처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반인들
까지 마약의 마수에 걸려들 수가 있으니 국가적으로 대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약이 함유된 껌.
그러니까 마약 껌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씹고 있는 껌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껌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약을 할 때 처럼 환각이나 환정이 생기진 않았다.
대신에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약이라기보다 담배에 가까웠다.
뭐, 담배도 마약의 한 종류라면 종류겠지만.
그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껌의 근원지는 부산이지만, 내가 가진 껌은 강원도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대충 합리화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쨌건 뉴스는 내가 잠드는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파수에서 손을 멈춘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때, 푹 빠져 지냈던 빌리홀리데이의 슬픈 재즈였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껌을 뱉는 것도 잊은 채.
......
......
“커억, 컥, 컥.”
잠에서 깨어났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 느낌이 나 헛기침이 계속 나온다.
“커억, 퉤.”
껌이었다.
뱉지 않고 자는 바람에 목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뱉어낸 후에도 몇 번 더 기침을 한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래도 삼키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시계를 확인한다.
5시 40분.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없었다.
외박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아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자기야, 자는 중일 것 같아서 문자로 보내. 동창이 결국엔 죽고 말았어. 이제 막 가족들 불렀고, 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네?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 들 슬픔이 커. 그래서 나도 아침까지는 같
이 있기로 했어. 미안해 자기야.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은비는 대기실에 있는 침대에서 잘 자
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어. 늦지 않게 출근 잘 해. 미안해 자기야♡]
......
......
새벽 공기가 무척이나 차갑다.
아침을 차려 먹기가 귀찮아 일찌감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매장에 들어가 카푸치노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갓 구운 토스트 안에 잘 으깬 계란과, 야채들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입 가에 카푸치노 거품을 잔뜩 묻히며 허겁지겁 아침을 해결한다.
물론 다 먹은 후에 껌을 입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김대리, 김대리. 잠깐 이리 와 봐.”
박과장이 일찍부터 나를 찾는다.
잠시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펴고 박과장에게로 갔다.
“기획서 이야기는 들었어. 뭐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잖아. 너무 담아두지 말라고.”
“예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가보다 해야죠.”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아, 그건 그렇고. 김대리 하루만 더 수고해야 할 일이 생겼어.”
역시 용건은 따로 있던 모양이었다.
“예? 하루만이라는 건...”
“오늘 점심 먹고, 강원도에 한 번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강원도를 내려가라니.
불과 이틀 전에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않았던가.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말어. 상무님 지시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아니, 이유가 대체 뭐에요. 뭐가 또 빠졌어요?”
“우리 쪽 확인서를 팩스로 보내야 되는데, 팩스기가 고장 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상무님이 직접 다녀오
라고 지시하셨어. 그런데 너를 지목하시더라고.”
미칠 노릇이었다.
이건 단순한 응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팩스가 고장 났으면 다른 데서 양해를 구하고 받으면 되잖아요.”
박과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박과장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아 요즘 상무님한테 기획부가 별로 안 좋게 찍혀서, 출장 가 있는 사람들한테도 잘 믿음이 안 가는 모양이
야. 더군다나 어제는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됐잖아. 가서 업무 상황도 체크 해 보라는 이유도 있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업무 상황 체크를 대리 밖에 안 된 내가 왜 해야 하며,
당장 다시 써야 하는 기획서는 어쩌라는 말인가.
스트레스 때문인지 난폭하게 턱이 움직인다.
“당일치기로는 죽어도 못 갑니다.”
“누가 당일치기로 가랬나. 내가 간신히 설득해서 내일 하루 빼주기로 했으니까. 하루만 수고 좀 해 줘.”
다행히 당일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획서의 압박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획서는 어떡합니까. 김상무님이 당장 갖고 오라고 난리인데.”
“아 그것도 말 다 끝났어. 일단 다녀오는 것을 우선으로 해. 기획서는 조금 천천히 써도 되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어쩌겠는가.
위에서 하라면 하는 게 직장생활인 것을.
아내와 딸을 또 못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도 내내 혼자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껌도 세 개 밖에 안 남았으니,
내려간 김에 다시 그 가게를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열 통 정도는 사 와야지.
......
......
“은비는 학교 잘 갔어?”
-어, 거기서 곧 바로 보냈어. 조금 늦게 갔는데, 미리 학교에 전화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안 피곤해? 자고 있는데 내가 깨운 건가?”
-아예 꼬박 밤을 샌 것도 아닌걸 뭐. 집 좀 치우고 자려고.
“으응.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됐어. 내일 회사 쉬게 해 준다니까, 늦어지면 하루 자고 갈게.”
-아휴... 우리 자기 힘들어서 어떡해. 은비도 아빠 보고 싶다고 난리일 텐데.
“이러다가, 나 강원도 사투리까지 쓰는 거 아냐? 하하. 아무튼, 도착하면 전화할게.”
-추우니까, 단추 잘 잠그고 다녀. 감기 조심하고. 끊을게~
......
......
점심식사는 박과장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유명한 게장 집에서 먹었다.
늘 주문하던 매운 게장 무침을 시켰는데,
박과장은 매운 맛에 별로 소질이 없는지 버벅 거리며 잘 먹지 못 했다.
“매운 거 좋아하나? 간장게장을 먹을 줄 아는데, 게장무침은 너무 매워서 못 먹겠어.”
먹느라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리 한 쪽을 입에 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맛을 음미한다.
말랑말랑한 속살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매콤짭잘한 맛이 입에서 사라지기 전에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입에 넣었다.
“에이. 이것도 못 먹어서 어쩌려고 그래요. 강원도에는 여기랑은 상대도 안 되는 매운 가게도 있는데.”
“아후. 됐네, 됐어. 매운 거 좋아하면 빨리 죽는다는 말도 있잖나. 자극적인 건 피해야 돼.”
박과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 한다.
어쩔 수 없지.
박과장 몫까지 내가 먹는 수밖에.
식사를 마치고,
아무래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계산은 박과장이 했다.
가게를 나서자 매운 음식에 입이 뜨거워진 탓인지 벌써 하얀 입김이 나온다.
박과장은 서울역까지 나와 함께 가 주었다.
“이번에 고생하면 상무님 시선도 조금은 좋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전화 오면 꼭 잘 받으라
고. 알았지?”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박과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박과장은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예 알았어요. 제 밑으로 집합시켜서 기합 한 번 주고 올게요.”
“그래. 그럼 내일 모래 보자고.”
“예. 다녀올게요.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말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건방진똥덩어리'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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