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 엄마 아빠가 별거에 들어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는 아빠 집에 있고
토요일부터 일요일 까지는 엄마 집에 있었다.
아빠 집엔 장가 안간 삼촌셋 시집 안간 고모 하나. 서로 말 한마디 안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잘 했고, 할아버지와 사이 안좋은 할머니는 아빠와 엄마를 이간질 시켰다.
다섯살때부터 할머니에게 맞고 큰 삼촌에겐 심심할때마다 맞고
작은 삼촌은 조금만 수틀리는 일 있어도 집 물건 다 깨부수고 소리 질렀다.
주말에 만난 엄마는 히스테릭해져서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나무 빗자루로 때렸다.
일곱살의 어느날, 유치원을 혼자 걸어가다 갑자기 세상 모든게 무서워졌다.
불안을 견딜수가 없었다. 횡단보도를 못건너고 집에 되돌아와 엄마 찾으며 울었다.
할머니는 이제부터 울땐 엄마를 찾는 대신 할머니를 찾으라고 했다.
놀이터에 놀러 나가도 힘이 쭉쭉 빠졌다. 밥 한숟가락을 못넘겼다.
영양실조로 입원했다. 웃지 않고,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애로 변했다.
내가 어른 들을 힘들게 한다고 했다.
집에 놀러온 친척 아주머니는 '네가 그러니까 니 엄마가 도망갔지'라고 했다.
일곱살, 빨리 입학한 초등1학년. 부모님이 드디어 이혼했다.
어느날 갑자기 엄마는 사라졌고, 엄마집에 왜 못가냐고 묻자
'이제 너는 엄마 없다'란 말만 돌아가며 들었다.
사람들이 엄마 어디갔냐고 물으면 '시장가셨다고 해라'라고 했다.
아빠는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여관에 감금하고 얼굴에 염산 뿌린다고 협박했다.
낮에 몰래 짐 가지러 온 걸 붙잡아 칼로 위협해서 인질극도 벌였다.
동네 사람들 울 집 앞에 다 모이고 경찰 오고 아빠는 엄마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학교에서 금방 돌아온 나만 들어오라고 했다.
경찰이 나더러 들어가보라 했고 일곱살 내가 들어가서 본 건 피가 흩뿌려진 거실 바닥과
칼에 찔리고 맞고 얻어 터져서 울고 있는 엄마.
웃긴 건 우리 엄마 아빠도 둘 다 경찰이란 거다. 여경과 순경이 만나 결혼한 거다.
아빠는 엄마 얼굴을 계속 발로 찼다. 엄마가 맞다 맞다 칼을 집어 들고 아빠를 공격했다.
나는 기절했다.
병원에서 깨어나서 처음 본 건 울고 있는 엄마 얼굴, 엄마 목에 수십개 난 칼자국.
그날 엄마는 트렁크에 짐을 싸고, 나를 데리고 나갔다.
엄마랑 같이 여관에서 잤다. 너무 좋았다.
그 긴긴 밤이 기억난다.
난생처럼 보는 욕조에서 물장난도 치고
난생처음 침대에서 잠도 잤다.
아직도 난 트렁크를 미친듯이 좋아한다. 엄마 같다.
그리고 할머니가 날 키웠다. 할아버지는 다방 여자랑 바람 나서 집 나갔다.
엄마는 이혼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영어 배워서 외국으로 이민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자 만나 재혼했다.
엄마 잘 나간다는 소식을 접한 아빠. 초2때 또 다른 여경이랑 재혼하고 시골 촌 구석으로 아사가서 새 인생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온 가족이 교회에 다 출석해야 한다고 했다.
재혼 한건 우리 아빠가 잘한 유일한 일이다.
새엄마는 정말 착해서 유일하게 집에서
날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울때 위로해주고, 내가 아픈지 안아픈지 보살펴 줬다.
아빠는 새엄마가 호구란걸 금방 알아차렸고
경찰서 대공과 형사 생활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새엄마와 나에게 전부다 풀었다.
경찰서에선 데모하는 대학생들 뚜드려 패고,
집에와서는 나와 엄마에게 독설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방여자에게 버림 받은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자
새엄마를 '사용'해서 효도했다. 본인은 할아버지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삼시세끼 밥상 따로 차리고 집안일 전부 다 하는 새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못한다고 신경질을 자주 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80년대 고문 경관들이 지금 잘 살고 있진 않은지 궁금하신 분들,
안심해도 된다. 다들 이렇게 가족한테도 몹쓸짓하고 건실한 가장 코스프레 하고 살았다.
그렇게 살면 처는 몰라도 자식은 제 아버지가 개새낀지 사람새낀지 다 안다.
아버지 동료들, 거의다 자식하고 안보고 산다.
물론 밖에 나가서는 우리 아버지 망나니라고 말안하고, 얼굴 안본다는 것도 말 안한다.
친한척 한다.
친엄마는 자기 의견 뚜렷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새엄마는 그저 순진했다.
아빠가 새엄마에게 많이 한 말은 '무식하다'라는 거였다.
할머니는 그때까지 나를 때렸다. 빗자루, 구두칼, 파리채로 몇십대씩.
밥을 깨작거린 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다는게 이유였다.
새 남편과 사업해서 돈을 좀 번 엄마는 나를 만나러 한국으로 가끔 들어왔다.
삼촌들이랑 고모랑 아빠에게 날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아이에게 혼란을 준다'며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나에게는 엄마가 날 찾고 있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네 엄마는 너 키우기 싫어서 도망갔다'라고 했다.
나는 평생, 날 버리고 간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지옥에서 날 구해주기를, 제발.
중학교때쯤 다 컸다고 할머니가 날 때리는게 줄어들자
아빠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무 의자로 내리치고, 내 물건을 다 찢고 내다 버리고,
내가 교활하다고 했다.
아빠는 청소년기에 폐쇄병동에 한달간 입원한 적도 있었고
이혼 직후엔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스스로가 아프다는걸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우울하고, 매일매일 죽고 싶고, 학교 가면 너무 힘들다고 딱 한번 말했지만
황당하게도 아빠는 그게 내가 '신앙심이 부족해서'라고 했다.
더 힘들다고 하면 못나오는 기도원 보낼까봐 안힘든척 했다.
타이레놀 세통을 세번이나 한꺼번에 먹었다.
며칠동안 위액을 게워내고 있을때, 걱정해준건 새엄마 밖에 없었다.
열일곱살, 엄마가 나를 데리고 그 나라로 갈수 있는 마지막 나이였을때,
엄마는 학비도 생활비도 다 대겠다고 날 데리러 왔지만
아빠는 거절했다.
물론 나에게는 한마디도 전해지지 않았다.
스무살, 교수와 세번째 결혼을 한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완전히 팔자가 피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나 좀 데리고 가라는 말을 못했다.
그러면 안될것 같았다.
엄마가 새 인생을 사는데 내가 방해가 될것 같았다.
나는 아빠와도 할머니와도 사이가 좋은 척 했다.
다시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된 엄마 한테 뭘 말할수가 없었다.
스물세살, 정신과에 찾아갔다. 우울증이 오래됐다고 했다.
매일매일 죽고 싶었다. 사는게 너무 싫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점이 안좋다고
매일 화를 냈고, 나를 가리키며 (웃으며) '금치산자'라고 했다.
어느날은 내가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하고
어느날은 내가 신앙심이 얕아서 그렇다고
어느날은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고
어느날은 성질머리가 못되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게다 정말인줄 알았다.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정신과는 진료비가 비쌌다.
약만 먹는 데도 한번 진료하는데 만이천원이 들었다.
그 돈이 없어서 진료를 못받았다.
첫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무작적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루하고 가난한 결혼생활, 집에다간 행복하다고 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15년간 남편은 열번도 넘게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나한테 엄청 잘해줬다.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어주고 밤엔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갔다.
남들은 남편이 나한테 입안의 혀처럼 사근사근하게 한다고 했다.
나는 다들 이라고 사는 줄 알았다.
남자는 다들 바람 피우고 사는 줄 알았다.
쓰레기 같은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또 없는데
다른 여자 만나는 것쯤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기적으로 친정에 갔다.
잘 살고 있다고 했다.
15년간 남편은 반은 백수였고 반은 한달에 백만원 남짓 벌어왔다.
난 예술계통을 전공했지만
편의점과 슈퍼에서 일했다. 할줄 아는게 별로 없었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계속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도 날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았다.
다른 여자 못만나게 한다고 남편이 길거리에서 날 때린 날,
아버지는 남편에게 내가 별나더라도 참고 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딱 한마디, '그래도 니가 이러는거 보니까 애비로써 화가 난다'라는 말에 감동했다.
아버지가 날 사랑하는구나, 착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날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제정신 아닌 나에게 그 남자와 살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 날, 입원을 한날,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또 감동했다.
몇달후 설날에 집에 가니 아버지는 친척들이 다 보는 앞에서
'딸래미 저거 몇대 쥐어박아봤자 상처 안받거든'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남편은 아예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나한테 잘해주면서도 그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살면 안되냐고 했다.
둘다 공평하게 사랑해 주겠다고.
집을 나오던 날 밤 남편에게 또 맞고 바닥에 앉아서 창문을 올려다 보는데
창문 밖의 달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하얗고
차갑고
나를 다 집어삼킬듯이 커다란 달
그게 나한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죽는지 안죽는지,
어디 한번 보자'
10년간 키운 강아지 한마리를 데리고
트렁트에 짐을 싸서 나왔다.
강아지를 몰래 숨겨 모텔에 데리고 들어갔다.
욕조에서 같이 목욕을 했다. 강아지가 좋아했다.
나는 엄마와 똑같아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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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년,
나는 더이상 아버지 집에 가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잘생기고 키크고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친구도 생겼다.
알바 말고 원래 전공했던 일이 대박나서
이제 다달이 돈도 잘 번다.
외제차를 몰고 방 세칸짜리 마당 있는 집에 산다.
사람들은 다 내가 성공했다고 말한다.
나는 드디어 사랑받는 법을 알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려고 노력한다.
정신과 치료도 꾸준히 받고 꾸준히 약을 먹었다.
이제 원하는게 없다, 비로소 행복하다.
서른 여덟, 모든 사람이 다 네 인생은 거기서 끝이라고 했다.
나같이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는 바람피는 남편도 감지덕지니 참으라고 했고
참지 못하더라도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은 없다고 했다.
내가 잘못한 유일한 일은
그 말이 진짜인줄 알았기 때문에, 누군가 날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는 거다.
이 이야기는 자작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백퍼센트의 실화다.
당신에게도 일어난 일일수 있고,
지금도 나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살고 있다.
이십년간 계속된 정신적, 육체적 학대는 지옥보다 더 지옥 같았다.
학대자는 끊임없이 피학대자를 무력하게 만든다.
너는 쓸모 없는 사람이고, 제가 불행한 것은 네가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는 좋은 사람인데 네가 날 이렇게 만든다고.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둘 다 그랬다.
복수하고도 싶었고 깽판도 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연락을 끊었다.
단절되어서 잘 사는게 최고의 복수다.
내 주변 사람들 더 잘 챙기고 더 잘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걸 더 많이 만들고
나에게도 사회에게도 좋은일 하면서 내 평판을 쌓아가는게 진짜 복수다.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이제서야 내 말을 믿는다.
내가 안정되고 나서야 '아버지가 쭉 날 학대했어' 라는 말을 이제서야 믿는다.
과거의 나처럼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스스로 행복해져라, 누구도 기다릴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그들과 단절해라, 화해는 화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하고 하는 거다.
전화 와도 받지 말고, 번호를 바꾸고, 주거지를 바꾸고, 직장을 바꾸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단절 후에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치료를 받자, 학대 생존자들은 끊임없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찾아올 행복한 일상을
믿자
꼭
그렇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