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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서릿발이 내렸다. 날씨 변화가 흔치 않은 이 곳에서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의복을 가볍게 갈아 입고 다른 사람이 깨지 않게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눈을 좋아하는 엘시 양에게 이 반가운 소식을 알려줄 요량이었다. 피부로 닿는 공기가 차가운 만큼 내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이 날씨라면 눈이 금방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재게 놀릴 때였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하늘 아래로 하얀 눈송이가 거짓말처럼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리고 그 눈송이들을 가지고 놀듯 손끝으로 희롱하고 있는 인물은 탁한 무채색의 적막 속에서도 완연하리 만치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득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찬란함을, 그 선연함을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나의 모자란 능력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고아하게 서있는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조장님.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일 생각으로 걸음을 뗐을 즈음, 나와 그의 눈길이 맞물렸다. 그는 내 의중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겨 그의 옆에 섰다.
"날씨가 많이 쌀쌀합니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조장님은 예의 그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거리던 눈송이는 그가 시선을 떼자마자 덧없이 사라졌다. 빛의 알갱이가 사그라진 흔적을 눈으로 좇다 의구심이 들었다.
"노파심에 여쭙는 겁니다만... 이 눈은 혹시 조장님이 내리신 겁니까?"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내 말에 긍정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재다능. 저 능력을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살아왔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내했을까. 떠밀리듯 신의 자리에 올라 원치 않았던 힘으로 과거의 동료와 칼을 맞대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상념이 꼬리를 물고 잡념으로 이어진다. 나는 의미 없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세계의 흐릿한 잔상과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의 얼굴뿐. 황홀하고 처연히 아름다운 눈동자를, 나는 감히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나는 나의 작은 조장님이 실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경애를 담아 그에게 한껏 웃어보였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당신을 조장님으로 모실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웃음을 띤 듯 무표정한 얼굴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그는 항상 미소 짓고 있었지만 한결 같이 생기가 없었다. 무감각해진 건지, 신이라 불리는 내 앞의 존재는 지친 것처럼 감정 표현에 인색했다. 눈이 맞으면 그저 반사적으로 웃을 뿐. 그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듯 저며온다. 나는 고작 한 사람을 잃고서도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는데,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잃었으면서도 저렇게 마지못한 웃음을 짓는다. 대체 무엇이 그를 저토록 몰아세운 것일까.
불현듯 경악스러웠던 첫만남이 떠올랐다. 벨테인에서 차출되어 처음 아발론 게이트에 배치를 받았을 때, 나는 내심 걱정했다. 새로 내정되었다는 특별조의 조장. 그는 알반 기사단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건만 상부 층의 신임을 얻어 조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다고 했다. 비록 특수한 상황이라지만 정식으로 아튼 시미니의 검이 되기 위해 수 년을 외부와 격리되어 수련에만 열중한 견습 기사들이 그런 그를 인정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우려대로 나와 카나 양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그를 경시하고 외면했다.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조장님은 안하무인인 견습 기사들에게 아무런 기색도 내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야심한 밤의 어둠처럼 새까만 그의 바다를 나는 도저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나는 내심 난감해 하며 그에게 입에 발린 말을 건넸다. 물론 그 속에 진심이 들어있긴 했지만 다분히 과장된 표현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담담하게 나와 눈을 맞추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바다에는 표면에 일렁이는 잔물결이 내비치는 감정의 편린만이 피상적으로 떠올랐다.
아마 그때 나는 결심했던 것 같다. 하잘것없이 초라한 나의 마음이라도 그에게 오롯이 맡기기로. 그 심연을 가득 채울 수는 없지만 한 조각 빛이라도 되어 심층에 닿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보답 받을 수 없는 마음일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그런 것에는 익숙했으니까. 그 익숙함이 다행스럽게 느껴진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나마저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감정이 이토록 깊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속살을 드러낸 상처에 등을 지고 방황하던 나를 조장님이 잡아준 때였을까. 남을 챙겨주는 것에만 익숙하던 나에게 애정 어린 보살핌의 생경함을 깨닫게 해준 때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로간?"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자 번뜩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오랜만의 휴식이라 그런지 잡념이 끊이질 않는군요."
멋쩍게 웃고 있으려니 조장님이 별안간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매만졌다. 쓰다듬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겠지. 다른 사람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낯설어 묘하게 언짢으면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조장님이라는 것에 들뜨고 마는 그런 이질적인 느낌.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장님."
사실 죄송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그의 손길이, 그리고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할 뿐이다.
"눈발이 점점 굵어집니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경치를 감상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하지만 나는 위선적인 사람이니까. 거짓말쟁이니까.
"저도 조장님과 눈 오는 날의 풍경 속에서 산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조장님의 옷차림이 너무 가벼워서 건강을 해칠까 염려됩니다. 아무리 영생을 산다고 해도 고통스러운 것은 저희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 그때는 제가 채비를 해놓겠습니다."
친절하게 말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거짓말로 적당히 에두르면 끝이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쥐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만약 그때 일이 생긴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부디 나의 거짓을 용서하시길. 그리고 바라건대, 나의 진심을 꿰뚫어 보는 일이 없으시기를.
당신이 영원히 나의 작은 조장님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이 이기심은 내가 무덤까지 안고 갈 테니, 당신은 부디 나를 미련 없이 후련한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그대, 자그마한 신의 이름 아래 기도를 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