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여러 반응을 살펴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되어 두서없게나마 글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작년만 해도 비인륜적인 언행으로 일간베스트와 비견될 만 하다는 세평을 받던 메갈리아가, 보다 정확히는 메갈리아4 라는 명칭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별도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해당 페이스북 계정이 주도하고 있는 운동이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목소리로서 받아들여지며 다소 급진적이고 과격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에 우선 놀랐습니다. 거의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사이에, 그것도 반대 입장에 있는 대상들에게 -- 이 경우는 남성을 지칭합니다 -- 지지를 얻어내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고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지난 20여년 가까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권 존중이나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여러 차례 목도해 왔으며 10여년에 걸친 공방 끝에 알버타 주에서도 동성 결혼이 합법적으로 통과되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또한 남성으로서 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성차별적인 가치관에 노출되어 있거나 그러한 가치관에 의한 언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계속해서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여권 신장 운동이 전개된다는 점은 성 평등이라는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현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제 낙관론은 첫 십여 분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메갈리아4 페이스북 페이지나 기타 지지하시는 분들이 트위터로 남겨주신 의견 등을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며 느낀 점들을 요약하자면:
1) 메갈리아 4 페이스북은 메갈리아와 관계없는 계정이 아닙니다.
얼핏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떠한 토론도 동일선상에 서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토론의 대상이 되는 논제들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갖고 출발하여 각자의 의견을 전개하는 것이 토론인데,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측의 견해 차이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메갈리아 자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면서도 메갈리아4 페이스북 계정이 주장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는 타당하며 받아들일 만 하다고 하시는 분들의 상당수가 기존의 메갈리아와 메갈리아4 계정은 무관하다는 견지를 고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메갈리아와 정말 무관하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이트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성은 전혀 없습니다. 무형의 개체일 수록 이름을 통하여 그 정체성을 표현하게 되는데, 여성인권신장이라는 정당한 활동을 위하여 새로운 단체를 출범하며 기존의 단체, 그것도 수없이 많은 문제점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 메갈리아라는 단체의 이름을 차용한 것은 그 정체성 또한 계승하겠다는 의지에 다름아닙니다.
메갈리아 4라는 이름의 4라는 숫자는 최초의, 그리고 연이은 제 2, 3의 페이스북 계정이 이용 약관 위반으로 정지되었기에 채용된 것일 뿐입니다. 해당 이용 약관이 본인의 실명으로 개설 후 인증을 거친 계정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짓는다는 점에 있어 가족이나 지인의 명의를 이용했다는 것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위반이며, 약관의 주체인 페이스북이 위치한 미합중국의 경우 신원절취 및 사용억제에 관한 법 (The Identity Theft Deterrence Act) 위반입니다.
현재의 메갈리아 4가 전신인 메갈리아와 정말로 별개의 독립체이며 차별성을 원한다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는 기존의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 IS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의 영문 철자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이름을 변경하거나 축약형으로 부르는 것을 꺼리는 관습이 생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메갈리아4는 메갈리아의 지지층 및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진 층을 모두 끌어안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이름입니다.
2) 전신인 메갈리아의 정체성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메갈리아는 일간베스트와 마찬가지로 증오범죄(Hate crime) 사고방식이 짙게 배어있는 사이트입니다. DC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 개설 이후 13분만에 남성 혐오를 목적으로 한 게시물이 등록되고, 이후 타 갤러리나 사이트에 상주하고 있던 동일 성향인들이 모여 이후 별도의 사이트로 독립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메갈리아의, 남성이라는 성에 대한 극도의 증오를 표출하는 모습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일간베스트의 혐오 성향에 결코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현재 메갈리아4를 지지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메갈리아4가 아닌 메갈리아 전신에서조차 그러한 경향을 띤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최근은 게시물 삭제로 DB에서 인멸되었다 하더라도 아카이브 기능을 이용하여 특정 시점에서의 복사본을 남겨놓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입니다. 일일이 링크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러한 경향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지지하는 객체에 대해 무관심하다, 혹은 유감스럽게도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밖에는 다다를 수 없습니다.
3) 메갈리아의 과격성은 일간베스트의 "미러링"도 아니며,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져서도 안 됩니다.
미러링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심리학 용어를 생각하였습니다만, 실제 용례를 고려하면 혐오스러운 대상을 모방하여 무감각해진 관찰자들에게 혐오감을 일깨운다 정도의 신조어로 보입니다. 단 이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며 과격할 뿐 아니라 극도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일간베스트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을 어묵에 비유하거나 단식 투쟁을 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 농성을 벌이는 것, 여성의 성기에 전구를 넣고 깨트리겠다는 식의 발언을 일삼거나 고인이 된 인격체를 모욕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비난의 대상이어야 하고 절대로 사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저서는 안 되는 비인륜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일베 수준은 아니다"라고 아무리 외친들 성기 절단 사진을 업로드하고, 아동 성희롱범에 대한 공조 의사를 보이는 행동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으로 판단될 여지는 없습니다.
극도의 혐오 대상을 모방하여 잘못된 점을 일깨운다는 발언 역시 근거가 없는 궤변에 불과한데, 모방의 대상이 실제로 사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잘못된) 가치이거나 의사 전달을 위한 수준에서 절제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주장하는 목적을 잃는 셈입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위기에 봉착한 독일 국민을 상대로 유대인이 자본을 잠식하고 있다는 논리, 민족적 우월성을 토대로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자행한 나치나 지난 수 세기 동안 서방이 자행한 만행을 되갚아 줄 뿐이라며 보복의 합당성과 종교의 형태를 빌어 최악의 테러 집단으로 거듭난 IS가 어째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른바 "미러링"이라는 행위는 범죄의 재현일 뿐입니다.
메갈리아의 행동이 수백 만 명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치나 무차별적 테러를 일삼는 IS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 메갈리아가 실제로 인종 학살이나 테러를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폭발물 설치 예고를 하거나 무기를 소지하고 참여하여 난동을 부리겠다고 공언하는 용의자를 상대로 실제 범죄 행각을 벌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권력이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미러링이라는 행위를 할 때에는 그로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선은 어디에서 끝나며, 모방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메갈리아 스스로도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일간베스트의 모방을 지속적으로 반복한 끝에 동일한 괴물이 되어버린 현 상태에서 모방일 뿐이라며 부정하는 것은 상대방을 진지하게 접하지 않겠다는 의사 교환의 단절을 뜻하는 일방적 선언입니다.
타인의 피해를 강요하며 공동체의 안위를 위협하는 극단적인 사고는 "표현의 자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4) 페미니즘의 역할을 정의해야 합니다.
여성 인권 신장이라는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공동 기준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메갈리아4를 지지하시는 분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성 평등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고, 페미니즘이라는 이름대로 여성주의를 표방하며 그 정체성에서 여성을 빼고 성 평등이라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떠한 사상을 상대방에게 소개하고, 받아들이게 하고자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동일한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서로가 그 정체성을 달리 정의하고 있다면 타인을 설득하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성 평등이 목표인지, 여성 인권 신장이 목표인지, 그렇잖으면 극단적인 경우 여성우월주의를 표방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진정한 평등을 논하고자 한다면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성별의 언급 자체를 제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니까 해야 한다" 역시 "여자니까 못한다"만큼이나 성차별적인 사고 방식이며, 인종이나 연령, 외모로 차별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면 성별 또한 그 요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서구권에서 제출하는 이력서에는 증명 사진도, 생년월일이나 성별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 (주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만) 면접 중 결혼 여부나 국적, 연령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 마찬가지로 해당 요인들로 해고를 하는 것 역시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5) 설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이해입니다.
메갈리아를 보며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타인에게 잘못된 점이 있을 경우, 그를 알리고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의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접근 방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화의 내용보다 화자나 전달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리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대방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서 분류하고 증오를 쏟아내는 것, 비난을 일삼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사는 없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닌 투쟁을 전제로 한 접근이며 따라서 자연스레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여성인권신장을 목표로 한다면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형성되어 있는 남성 편의 위주의 가치관이나 그러한 체계가 강요하는 성 역할, 은연 중에 배어있는 언행에서 성차별적인 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이해시키는 것이 보다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수단이 과격한 선을 넘어 증오 범죄의 모방을 필요로 한다면 이미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TL;DR (3줄 요약):
1. 메갈리아와 메갈리아4는 동일 개체이며 독립되어 받아들여지고다 한다면 이름도, 전신에서 승계한 정체성도 바뀌어야 합니다.
2. "미러링"은 증오 범죄의 재현을 이루어낼 뿐, 이해와 설득을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없습니다.
3. 여성인권신장은 올바르고 정의로운 활동이나, 그 기반이 성 평등 / 여성주의 / 여성우월주의 중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