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성 네티즌들로부터 이른바 '얼짱 왕자'라 불리우며 주목받은 사람이 있다. 조선의 황손, 이우 공(公)이다.
몰락한 왕조의 후손...... 그의 서글픈 인생과 고뇌쯤이야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영화 배우 같은 외모에 걸맞게 참으로 영화 같은 인생을 사셨던 분이다.
1912년,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우는 다섯 살 되던 해에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이 후사 없이 별세하자 대원군의 증손자로 입적되었다.
이후 결혼할 나이가 되자 일제는 일본 여자와 억지로 정략 결혼을 시키고자 하였고, 이우보다 3살 위인 이복형, 이건 역시 이미 일본 여자와 결혼한 터였다. (이후 이건은 일본에 귀화하였으나 일본인 아내에게 버림받고 과일 행상으로 근근히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우는 끝끝내 조선인 신부를 고집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될 독립 운동가 유동렬의 서녀(첩의 딸) 유정순과 이미 정혼한 상태였었다.(유정순이 서녀였던 까닭에 현재 유씨 가문에서는 유정순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는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합을 허락 할 수 없었고, 결국 철종의 부마(왕의 사위)이자 친일파 대신인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일종의 '타협'을 보았다.
종의 무남독녀 영혜옹주는 박영효와 결혼 직후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왕실의 법도에 따라 박영효는 재혼할 수 없었다. 왕실은 젊은 나이에 독수공방하게 된 피 끓는 청년 박영효에게 젊은 궁녀 한 명을 소실(첩)로 하사하였는데, 그 소실에게서 낳은 서자(첩의 아들)의 딸이 박찬주이다.) 비록 독립 투사의 딸은 아니었으나 끝까지 조선인 신부를 고집하여 소정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만으로도 고종은 "황실의 기상을 드높였다."며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우의 아버지, 의친왕 이강 역시 높은 의기로 유명한 분이셨다. 1919년, 일제 치하에 반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만주에서 발각,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일본으로 건너감)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항일정신을 지킴으로써 조선 말 무기력하기 그지없던 황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드물게 체면치레하신 분이시다.
12남 9녀나 되는 의친왕의 자녀들 가운데에서도 아버지의 성품을 가장 많이 빼닮았던 이우는 1922년, 10살의 나이로 다른 황족들이 그러하였듯이 일본 유학을 떠나 1929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일본의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육군 사관학교에서도 그의 곧은 심지는 전혀 부러지지도, 휘지도 않았다. 1931년 육사본과 포병과로 입교한 그는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 일제의 요주의 감시대상이었는데, 끈질긴 감시와 군대라는 특수하고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그는 황족으로서 전혀 굽힘이 없어,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서도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조선 출신 생도에게는 조선말로 커다랗게 호령하였다 한다. 또한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 노래를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일본인들에게는 "호랑이 같은 조선 황족의 핵심"이라 일컬어지며 사납고 난폭한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조선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 되었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몰려와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고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며 호소하였다.
이에 이우는 즉시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물론 당연히도 일본인 담당자가 딱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자 이우는 권총을 빼내 담당자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위협함으로써 결국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한다.
1940년 육군 대학을 졸업한 후 1942년 소좌(오늘날의 소위)로 진급한 뒤 황족으로서 선봉에 서야한다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 산서성 태원으로 발령 받았고, 이후 북지방면군 제 1 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오늘날의 중위)까지 진급하였다.
일제의 장교로 근무하던 이 기간 동안 이우는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육군 사관학교 조선인 동기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독립 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진 탓에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여러 동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여러 가지 고급 정보들을 독립군에게 넘겨주었으며,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특히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 확장에 은밀히, 그리고 긴밀히 간여하면서 태항산 유격대를 비롯한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제는 이우의 보직을 정보 참모에서 교직 참모로 바꾸고 일본 본토인 히로시마로 발령을 내었다. 이에 이우는 서울로 돌아와 운현궁에 칩거하며 장장 6개월 동안이나 전출을 거부하였다. 이우는 이 기간 동안 전역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일본 대신 한국에 배속 시켜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이우는 어린 아들 청에게 억지로 설사약을 먹여 배앓이를 하게 하고, 아들의 병간호를 핑계로 히로시마 전출을 최대한 늦추는 한편,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갖은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나라 잃은 무력한 황족 이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해 결국 히로시마로 향하였고, 히로시마에서의 첫 출근날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는 태평양전쟁을 종결 짓는 미국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피폭되어 신음하던 이우는 일본군에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상태가 호전될 듯하여 도쿄의 전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도쿄로 옮겨진 바로 그날 밤, 34살의 젊은 이우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일각에서는 도쿄의 병원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해방 조국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젊고 똑똑하고 애국심이 투철하던 한 황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이우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그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즉 일왕 히로히토가 연합군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그의 조국이 해방되었던 바로 그 날, 이우의 시신은 경기도 마실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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