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무섭다. 사춘기때엔 지독하게 미워했던것 같다. 특히 매를 맞은 뒤엔 더욱.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를 뛰어넘은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내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아를 와 패노? " 라는 물음에 아버지의 반응은 항상 "아를 와 안 패노?" 라는 되물음이었다.
평소엔 자상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대화라는게 없었다. 명령, 질문과 대답, 꾸중만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옆집 아저씨와 더 친할지경이었다. 길에서 아버지를 마주치면 뭐라 인사해야할지 몰라 "어 아빠..안녕하세요. "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면 아버진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가시곤 했다. 친구와 어울리는것도 좋아하지 않으시고, 자식이라곤 딸래미 둘 뿐인 집에서 아버진 많이 외로우셨을 것이다.
나는 20살이 되던 해 서울에 올라왔다.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점이 나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주었다. 친구들과 놀다 아빠 얘기가 나오면 나는 그냥 "아빠랑 별로 안친해서.." 라는 말 밖엔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감히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를 부양하는 것은 그래도 자식이라는 책임감 때문이리라.
나는 아버지 생신때 딱 한번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 "어..그래. " "..." "끊어라. " "네. 안녕히주무세요. " 이게 그날 통화내용의 다였다.
어느덧 내가 서울에 온 지 7년째가 되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반찬을 보내 주셨다.
고등어 지짐..내가 좋아하던 반찬이았다. 서울에 혼자 살게 되면서 생선은 손질은 커녕 만지지도 못해 통 사먹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 고등어 한점과 시래기를 얹어서 한 입 가득 물었다.
아.. 고등어가 이리 먹기 힘든 음식이었나.. 입속에 잔가시가 가득 굴러다녔다. 고향에서 생선을 먹을 때, 아버지의 앞접시에는 뼈만 가득했고, 나와 언니의 앞접시는 항상 깨끗했다. 아버진 통통한 살은 건드리지도 않으시고 뼈만 가득한 부분만 집어서 우물우물하고 뱉으셨다. 그게 아버지가 생선 자시는 방법인줄 알았다. 덕분에 26살이 된 나는 아직도 생선 뼈를 골라낼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