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격화되면서 의료계와 한의계간 이성적 대응을 넘어서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가 경제단체에서 건의한 규제개혁 건의사항을 바탕으로 확정·발표한 규제기요틴 과제에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을 포함한 것이 원인이다.
의료인의 전문적인 면허범위에 관한 문제를 경제단체 건의로 바꾼다는 발상 자체도 황당한 일이고, 의료인들이 여기에 휘둘려 집단적인 감정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의료계는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게 무면허 의료행위와 같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는 "환자를 진단함에 있어서 현대의학의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적 원리와 한의학의 기본원리인 음양오행 이론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는 진단기기는 엄격히 구분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의계는 "보다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진료를 위해 한의사가 진단기기를 활용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의료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맞서고 있다.
X레이와 초음파 진단기기 등의 현대의료기기는 현대의학에 기반해 개발된 장비로써 학문체계가 다른 한의학 분야에서 환자 진단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의학적 근거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런 논란의 한편에서는 '한방병의원에서는 왜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해 개발한 한방진단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고개를 든다.
분명 오래 전부터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한 맥진기나 양도락기, 경락진단기 등이 오래 전 개발돼 상용화가 이뤄졌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분기 기준으로 한방병의원에서 사용하는 양도락기, 맥파기, 맥전도기, 경락기능검사기 등의 한방행위 관련 장비는 총 8만9,546개에 달한다.
한방 진단에 활용하는 의료장비가 상당수 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학문적 체계를 기반으로 개발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걸까.
한의사들이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해 개발한 한방진단기기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앞서 한국한의학연구원과 한의과대학 등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한방진단기기에 대한 한의사들의 신뢰도가 상당히 낮았다.
상지대학교 한의대 진단생기능의학교실 연구팀은 2012년 한의사협회 회원 1만3,957명(응답자 1,2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방의료기기 사용 현황 및 개발 수요에 대한 조사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진단용 한방의료기기의 주요 불만사항에 대한 조사에서 '낮은 재현성 또는 낮은 신뢰도'라고 답한 경우가 25.1%, '불확실한 유효성'이라고 답한 경우가 16.3%로 나타났다.
많은 한의사들이 한방진단기기를 통해 측정한 결과의 정확성과 재현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의료기기 구매시 가장 고려하는 요소에 대한 조사에서 '유효성이 검증된 바 있는지 유무'라고 답한 경우가 37.5%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건강보험 적용여부'라는 응답이 21.4%, '재현성이 검증된 바 있는지 유무'라는 응답이 20.2% 등이었다.
전반적으로 지금까지 개발된 한방진단기기를 이용한 측정치의 정확성과 재현성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보다 앞서 한국한의학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었다.
한의학연구원이 2004년 한방병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방임상 사용 의료기기 성능평가 연구'에 따르면 응답기관의 53%가 진단기기에 불만족한다고 답했고 만족한다는 답변은 21%에 그쳤다.
불만족의 이유로는 한방진단기기의 결과를 임상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서라는 답변이 98%에 달했다. 나머지 2%는 측정방법 및 결과에 신뢰성과 재현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렇게 신뢰가 낮은 이유에는 한방진단기기가 측정하는 결과치를 한의학적 진단으로 연결할 이론적 근거가 취약한 때문이기도 하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의학적 이론을 임상에서 재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한의학연구원은 2011년 3월 발간된 대한한의학회지(제32권 제2호)에 게재한 '한방의료기관 의료기기 보유 현황에 대한 조사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경락기능검사기, 맥진기, 양도락검사기 등은 한의학적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한방진단장비이면서, 국민건강보험 검사료 급여로 인정되는 상황에서도 한방의료기관 전체 보유 비율이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유는 이들 3종류 진단기기에 대한 (임상 적용에 대한 어려움과 재현성이 떨어지는 등)한의사들의 부정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한 한방진단기기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한의사가 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 현대의학 원리로 개발된 의료기기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한의계의 주장이다.
한의협 김필건 회장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한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기반으로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기 사용에 제한을 받아서는 안 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내세워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고집할 경우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현대의학의 이론과 진단체계를 기반으로 개발된 의료기기를 이용하는 것이 한방의료에 부합하는 것인지, 현대의학과 의사를 '양의사, 양방'으로 표현하고 '한의사, 한방'의 상대적 개념으로 치부하면서 현대의학의 학문체계와 임상을 기반으로 한 진단장비를 사용할 경우 한의학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건 아닌지 의문도 든다.
현대의학과 과학 기술이 적용돼 물리적 양을 측정하는 진단기기 장비를 한의사가 이용한다면 무엇을 측정하고, 그 결과치를 한의학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부터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