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감독인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과 특촬물 팬입니다. 엔드 크레딧에서 특촬물을 제작한 감독 혼다 이시로에게 경의를 표한 것과 더불어 작품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일본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일본인 배우가 두 명이나 등장했고요. 결과적으로 이번 작품은 철저하게 특촬물 팬들과 자신의 덕심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작품입니다.
스토리는 전형적인 영웅의 귀환 스토리고 반전 없음(=예상 가능), 감동 없음(거대로봇 전투장면 제외), 재미없음(홍콩편은 15분 넘게 들어내는게 좋았다)의 3무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괜히 평론가들에게 두들겨 맞은게 아니죠.
1. 스토리
애초에 이 영화는 스토리를 포기하고 액션에 치중한 작품입니다. 영웅의 몰락->극복->세계를 지켰다! 식의 전개는 이미 클리셰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이야기입니다. 이 보편화된 이야기에 양념을 잘 쳐서 버무려야 될 터인데, 이 감독은 과감하게 스토리를 포기하는 전략을 썼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게 초반의 설정풀이입니다. 카이주와 예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냥 리포트 읽듯이 숙숙 넘어갔죠.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작품 내에서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식 전달을 사용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신인 만화작가들이 자기 작품의 설정을 설명하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까지 해서 시간을 벌었는데 홍콩편에서 그렇게 루즈해질준 몰랐습니다.
또 모든 장면이 예측 가능했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스포일러가 별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아군의 희생으로 다음 전투단계로 넘어가는 전개, 원자로를 수동으로 기폭시켜야한다는 전개, 두 박사가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개 등등 예상 가능한 장면이 수두룩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겠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완급조절을 실패해서 홍콩편이 너무 루즈해졌다는데에 있습니다. 영화가 루즈하다보니 관객들이 앞 내용을 상상하게 되버린 것이죠. 그것도 냉소적으로요.
설정상의 개연성에 대해선 생각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왜 포탈을 타고 갈 때 바코드 인증을 한번밖에 안했는지, 로봇이 왜 철권맨손격투를 하는지, 수천 톤짜리 로봇이 대기권에서 떨어졌는데 도시가 멀쩡하다든지, 그런건 다 넘어가겠습니다. 다 넘어가겠다고요.
2. 감동 없음
정서적으로 아동용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인물간의 갈등을 제시했으면 이걸 멋지게 풀어야되는데 너무 쉽게 풀어버렸어요. 형의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도 그렇고, 마코와 스탁커와의 갈등도 스탁커가 '사실은 난 니가 너무 걱정되.근데 베켓한테 한소리 들었으니 예거에 태워줄께' 로 끝나버렸습니다. 마코의 과거 트라우마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땐 첫 드리프트였잖아? 두번째부턴 잘 됐음ㅇㅇ' 으로 해결된 걸로 치고 끝났죠.
2인 파일럿 시스템까지 가져다놓고선 파일럿간의 관계 중 가장 진중했던건 초반에 나온 베켓 형-동생 팀과 홍콩에서 나온 한센 아들-아버지 팀입니다. 왜냐면 한쪽은 죽음에 의한 트라우마를 남겼고, 한쪽은 천방지축 아들과 아들걱정 빠방한 아버지 역할을 잘 했걸랑요. 러시아랑 중국은 칼서렌치고 나갔죠.
마지막에 스탁커와 척의 자폭공격과 원자로의 수동자폭 전개에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만약 수동 폭발에서 누군가 죽었으면 진짜 어디가서 별점테러라도 하고 있을테죠.
그리고 갑자기 마코가 막판에 국어책 읽듯이 '가족을 위해!' 하고 외칠 땐 탄식이 절로 나더군요. 마코의 가족사가 부각된 적이나 있었습니까? 드리프트 때 잠깐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나왔고 복수를 한다는 식의 대사 한두번 날려준걸로, 문구멍으로 남자 스토킹하는 캐릭터에게'가족의 복수를 위해 싸우는 여자'이미지를 줬다고 생각했다면 정말인지 관객을 물로 본겁니다.
마코의 발연기도 보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마코의 음성은 어디서 혼자 따로 녹음한걸 음향감독이 조절도 안하고 그냥 덮어씌운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슬렸습니다. 감정이입하는데 큰 걸림돌이었죠. 아, 마코의 아역배우는 귀여웠어요. 철컹철컹. 이 영화가 철저하게 일본에게 바치는 영화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3. 재미 없음
홍콩편이 너무 지루했어요. 15~30분을 날리고 액션을 더 추가하거나 인물들의 대사를 반으로 줄였으면 조금 더 좋았을껍니다. 솔직히 액션 하나만 믿고 보는 영화였는데 딱 세번 싸웠어요. 초반, 홍콩, 마지막.
싸움도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거대로봇이라는 특성상 빠른 기동성을 살리지 못하니 po빠워!wer한 액션을 선보였어야되는데 그게 주먹질이라뇨. 게다가 매번 밤에 싸우느라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초반의 출격씬이 가장 멋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결국 이 영화는 감독의 2억달러짜리 덕질이며, 저는 이 덕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