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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학당에서 보이는 라파엘로 본인의 모습
처음에는 그림보기 좋은 자리를 잡기 힘들었지만, 혼자 온 장점이 무엇이던가? 난 그냥 좋은 자리가 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고 결국 사진 찍기도 좋고, 감상하기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사진도 찍고 충분히 감상도 했다. 더 감상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세계 시민적인 아량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이 세계 시민적인 모습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정말 명당인 자리를 내주어서 고마웠는지 내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나에게 “Thank you so much, Thank you, thank you” 이렇게 말을 했다. 처음엔 당황했다. ‘이게 그리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곧 당황함을 숨기고 문화시민답게 ‘Your welcome’으로 응수했다. 다시 인파에 휩쓸려 움직였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도착한 곳은 현대 미술 작품의 전시공간이었다. 순간 ‘아.. 벌써 끝난건가? 아직 시스티나 성당도 못봤는데.. 저 인파를 뚫고 다시 돌아가야하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안내판을 찾았는데,그 안내판은 내가 휩쓸려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면 시스티나 성당이 나온다고 안내해주고 있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현대미술도 조금 감상을 했다.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에는 한 사람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무심한 듯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성경의 내용을 모티브로 한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했다.
섬뜩한 마음을 뒤로하고 시스티나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엄청 많았다. 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었다. 천장의 천지창조가 아니라 벽면의 최후의 심판을 찍었는데, 갑자기 경비원이 ‘노 포토(NO Foto)’를 외치며 다가왔다. 그제야 시스티나 성당이 사진 촬영 금지라는 것을 알았다. 기왕에 찍은 것을 지워야 하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경비원은 그냥 쿨하게 지나갔다. 아무튼 난 시스티나 성당에 도착한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리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년 8월 9일 - 1484년 8월 12일)가 원래 이곳에 있던 마조래 성당이 허물어진 자리에 다시 지은 성당으로 성베드로 성당과 함께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크고 작은 미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두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당시 조각으로 유명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부탁할 때, 그는 율리오 2세의 무덤 장식을 만들기 위해 로마에 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스케치를 본 교황은 2차원의 종이에 3차원의 조각을 표현하는 그의 그림 실력을 보고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조각가로 알려진 그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맡긴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어이도 없고, 당황하기도 한 것 같다. 친구에게‘난 조각가야.. 블라블라’하는 편지 한통을 남겨 놓고 자신의 고향 피렌체로 도망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교황은 화를 꾹 참고 그를 다시 설득했다. 결국 그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는 성당의 천장을 성경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 나갔다. 천지창조에서,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되는 모습, 그리고 노아의 홍수까지 길이 36m,너비 13m의 천장이 300여명의 인물로 가득 채워졌다. 작품 자체도 훌륭했지만, 더 파격적인 것은 성당 천장을 누드로 가득 채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성당 내 그림에서 누드화는 금기시 됐다. 하지만 그에게 그림을 맞긴 율리오 2세는 이를 용인했다. 결국 4년의 시간이 흘러 명작이 탄생했다. 이 그림은 당시 같이 활약하던 라파엘로에게도 강열한 인상을 줬다. 얼마나 인상이 강열했는지는 그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 잘 나타난다. 아테네 학당 그림의 계획에서 미켈란젤로는 원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천장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라파엘로는 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미켈란젤로를 넣은 것이었다.
뭐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그림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난 멍하니 서서 목이 아플 정도로 천장을 바라봤다. 한 10분쯤 흐르니 목이 아팠다. 옆에 의자가 있어 의자에 앉아서 다시 또 천장을 봤다. 처음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소백산 자락을 내려다 봤을 때의 감동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천지창조(와 시스티나성당)에 관한 오디오 가이드의 음성 안내만 5개가 넘었다.
이곳은 사진을 찍을 수 없으므로.. 일단 인터넷에서 주운 사진으로 대체를..
그리고 천장을 보느라 위로 향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니 또 다른 걸작 최후의 심판이 보였다. 최후의 심판은 1535년 교황바로로 3세는 교회에 의혹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했다. 1535년은 가톨릭교회의 폐습에 대한 반발로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지 1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루터의 움직임은 곧 ‘종교개혁’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요한 바오로 3세는 바로 이들 ‘개혁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 메시지로 선택된 방식은 대형 프레스코 벽화였고, 장소는 시스티나 성당의 북쪽 벽이었으며, 그릴 사람은 바로23년 전 같은 장소에서 명작을 만든 미켈란젤로였다.
작업은 6년이 걸렸다. 높이 13.7m, 폭 12m, 400여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재단화가 완성됐다. 예수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 천국과 지옥으로 갈 사람을 나눈다. 중앙에는 예수그리스도가 판결을 내리고 있고, 옆에는 성모마리아가 아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림 위쪽으론 천국으로 간 사람들이 천사들과 함께 있고, 아래에는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행 명단이 있는 책에 비해 지옥행 명단의 책은 두껍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천국행에 탑승하려는 지옥행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밀어낸다. 미켈란젤로 본인은 껍데기만 남은 육신으로 표현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그림이었다. 무신론자인 내게 그림의 메시지는 크게 와 닿지 않았지만, 벽화 내 인물의 표정과 표현은 미켈란젤로가 교황 바오로 3세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루어 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한장 건진(?) 최후의 심판.. 물론 이후론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렇게 두 그림만 40여분을 봤을까? 내가 자리 잡은 명당 주변으로 왜인지 모르게 하나 둘씩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동방예의지국 태생으로 그냥 보고만 있기엔 어딘가 마음이 초조했다. 결국 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 할머니에겐 서명의 방만큼의 감사 인사는 받지 못했지만, 옆에 남편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보니 배가 고팠다. 그리고 틈틈이 쓰던 여행 메모도 하지 못했다. 결국 잠시 밖의 공원으로 나가 햇볕을 쬐며 글을 정리했다. 그리고 무언가 아쉬운 마음에 바티칸 미술관 전체를 한 번 더 돌아보려다 이내 포기했다. 배고품과 다른 곳도 봐야한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난 결국 오전 내내 나를 친절하게 안내해 준 오디오 가이드를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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