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그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남자친구 분과 그 유가족 분들에게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담한 심정 느끼며 위로의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또한 여혐, 남혐을 하려는 의도로 '여성'을 쓴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여성 타겟 범죄'의 현실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 쓴 글임을 밝힙니다.
'여성이라서 죽었다' 라는 말에 설왕설래하지만, 그 말 자체에는 공감이 가 슬퍼졌습니다.
참고로 그래서 '남자가 문제다'라는 남혐 일반화 논리는 분명히 잘못 되었다고 생각함을 미리 밝힙니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미친 사이코에게 걸려서 죽은 한 '사람'이다, 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분명 그 살인자가 미친 사이코인 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사건에서 사람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살인자 스스로 여자를 노렸다고 말했으며, 여자 화장실에서 한 시간 동안 여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며, 결국 여자가 죽었지요.
그리고 범행 동기를 '여자가 무시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여자가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실제로 무시했는지는 모르고,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싫어하게 되어 여자를 죽인 케이스지요.
돌아가신 분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죽진 않았을 겁니다.
불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살인인 건 맞지만, 불특정 여자를 대상으로 했던 살인 사건입니다.
반대로 만약 남자 분이 죽었고 가해자가 나는 남자에게 무시당해 남자를 죽였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건 '남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입니다. 단순 '사
람'이 아니라요.
이걸 인식하는 게 중요한 것은, 그래야 이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향한 범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작게는 언어적 폭력 정도부터 크게는 살인까지요.
단순히 '사람'을 타겟으로 한 범죄가 아니라요.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혹시나...하는 마음에 밤길을 조심합니다. 그게 집 근처이든 으슥한 곳이든지요.
왜 집 근처에서까지 여자들은 조심해야 할까요? 어디 잘 모르는 곳을 간 것도 아니고 단순히 집-학교-알바의 일상생활에서조차도요.
범죄가 정말 단순 '사람'을 타겟으로 한다면, 왜 남자 분들은 집 근처에서 떨지 않나요?
주로 여성을 타겟으로 일어나는 범죄들은 단순 범죄자 개인이 문제였다 라고 끝내기에는 광범위합니다.
물론 여성이 타겟이 되는 이유는 여자가 신체적으로 더 약하기 때문이죠.
이건 정말 격투기 선수 급의 훈련을 받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라 저 포함 많은 여성들이 어둡거나 으슥한 곳에서 주변을 의식하게 되는 원인이
되죠.
저만해도 저 혼자 밤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 남자분 한 분만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난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왜 의심 받아야 하냐'라고 억울해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런 분들이 뒤에 있는지, 정말 범죄 의도가 있는 사람이 있는
지 알 수가 없다는 거죠.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사람조차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마당에 초면인 분의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나요.
다만 저의 신변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는 거죠. 그렇게 집에 들어오면 안심부터 됩니다.
이번 살인 사건 피해자 분께선 남자친구 포함 일행과 있다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그렇게 되셨죠.
전에는 으슥한 곳에 혼자 있는 것만 조심했는데 이제는 일행과 있다가 화장실 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점점 더 조심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 거죠.
여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사회, 이게 바람직한 건가요?
여자를 특정한 사건들에서 여자를 배제하면 사회적으로 이 사건을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한 미친 x에게 희생당한 안타까운 사연, 땡.
그리고 그렇게 희생당하는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겠지요.
사회적으로 이 사건이 여자들을 향한 범죄라는 것이 논의가 되어야 추후의 범죄를 하나라도 더 줄일 수가 있습니다.
크게는 '여자들을 향한 범죄'를 하지 말자는 의식적 문제부터, 작게는 범죄의 타겟이 될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사실 희생당하는 분들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더 줄이자는 거지요.
의식적으로는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해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변화를 서서히 추진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과연 신체 건장한 남자라도 살인자가 칼을 휘둘렀을까? 라고 말이죠.
여자에 대한 범죄에 무감각해지면 그 대상은 점차 모든 약자에게로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단지 내가 신체적, 지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짓밟아도 된다-라는 식으로요.
여자라는 약자에게 폭력을 휘둘러 본 사람들이 다른 약자는 존중할까요?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소위 '갑질'을 경험합니다. 그 '갑질'에 대해서는 강자와 약자가 뚜렷하고 그래서 '갑질을 하지 말자!'가 되는 반면에, 여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서는 '밤 길을 걸은 여자가 잘못' '옷을 그리 입은 여자가 잘못', 뭐 조금 더 가면 '그 놈이 나쁜 놈' 정도죠.
그래서 '여자를 향해 범죄를 하지 말자!' 라는 말은 묻히고 '여자가 조심'이 됩니다. 전자의 말을 하면 '그래서 내가 범죄자라고?'가 되며 남혐이 되죠.
갑질을 하지 말자는 '그래서 내가 갑질을 한다고?' 인가요? '갑질을 당하지 않게 조심하자' 인가요?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인식입니다. 너가 범죄자이기 때문에, 갑질을 하기 때문에, 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런 인식을 만들자는 겁니다.
되게 당연하지 않냐고요? 하지만 그 당연한 걸 모르는 이들도 있기에 범죄가 일어나고 갑질이 일어나겠죠.
살인은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다만은, 여자를 향한 온갖 범죄 혹은 폭력들이 있잖아요.
예시로 든다면 가수 김범수 씨가 자기는 밤길에 앞에 가는 여자 놀라라고 일부러 빨리 걷는 척 했다 이런 말을 했었죠.
왜 그 여자 분은 밤길에 이유도 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셔야 했나요? 이게 문제라는 생각도 없었으니 김범수 씨는 그런 말을 웃으라고 했겠죠?
만약에 내가 잘 모르는 할렘가를 혼자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총소리 내면서 뒤에서 쫓아오면 어떨까요?
그러고서는 나는 너를 해칠 의도가 아니라 그냥 총만 쏴본 건데 왜 피해의식이냐, 겁에 질린 너가 잘못이다, 웃기는 이야기이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뭐 이 예시는 내가 할렘가를 안 가기라도 하면 되지 집 근처를 안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자든 여자든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저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에서 범죄의 위협 없이 사는 것 일겁니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나중에는 신체 건강하지 않은 남자분들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게 될 수도 있어요.
누가 그랬죠, 너의 부당함에 대해 나는 침묵하였고 이제 내가 부당해졌을 때 나를 위해 외쳐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라고요.
난 여자가 아니니까... 라는 이유로 여자에 대한 범죄와 폭력을 눈 감으시면 언젠가 내게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설령 내가 그 범죄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인 어머니, 언니 누나 여동생, 부인, 여자친구, 딸, 여사친 등이 그 대상이 되는 걸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범죄에서 남자친구 분처럼요.(혹시 이 부분을 그 남자친구 분이 여성 범죄 문제에 침묵해서 그런거냐? 라고 해석하실 수도 있어, 그런 의도가 아님을 미리 밝혀놓으며, 저렇게 쓴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 역시 범죄의 대상 혹은 그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눈 감아선 안 된다라는 의도임을 다시 밝힙니다.)
다만 의식적인 변화는 정말 그래도 안 되는 진성 또라이까진 막을 수 없으며, 시간도 오래 걸려서 당장 위험에 처한 여자 분들을 도와 줄 수가 없죠.
그래서 시스템 적인 변화도 필요합니다. 지금도 여성 분들을 집까지 바래다 준다든가, 여성 전용~ 하는 장치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에 대고 '왜 여자만 보호하냐!'라는 주장이 이어진다면 그 시스템을 더 발전시키기 어려워지겠지요.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주장들을 줄이기 위한 거고요.
지금의 현실이 당연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그저 서로 신뢰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을텐데 왜 한 쪽은 불안에 떨고 한 쪽은 의심받아야 할까요. 얼마 전 늦은 밤에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뒤에서 한 남성 분이 저기요라고 말을 거시더라고요. 맘에 들어서 뒤에서 따라왔다.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겠냐라는 거였죠. 남자친구가 있어 죄송하다며 거절했고 그 분도 곧 가셨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더군요. 남자친구랑 그 얘기를 하며 그 사람이 너 집을 알고 있는데 괜찮을까...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단순 호의였겠지만, 그 호의를 호의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걱정해봐야 하는 이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저 많은 분들이 이 사건을 '한 싸이코의 살인'이 아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로 인식해주시고 이런 사건을 막고자 하는 의식에 동참해주신다면 더 많은 범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썼습니다. 긴 글이지만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아울러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저는 메갈도 아니며 여시도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제가 이번 사건에서 슬퍼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해자 분에 대한 삼가 조의와 '여성 타겟 범죄'에 대한 경각심까지 입니다.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간 컨텍스트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음을 밝혀둡니다.
+ 어떻게 보면 당연한 범죄에 대한 경각심에도 괜히 이런 저런 말을 덧붙이게 되는 게 어이없어 써둡니다. 메갈이 절대 악으로 등장하면서 '여성', '여혐' , '남혐' 등의 사용은 메갈로 연결이 되고, 그게 필요한 모든 논의마저 차단시키게 되는 게 화가 나네요. 분명 이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임에도 '남녀'라는 말만 나오면 네 메갈. 끝. 이 되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메갈 자체가 문제겠지요. 다시 밝히지만 남혐, 여혐과는 별개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