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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13112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9
    조회수 : 1199
    IP : 24.55.***.225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3/12/20 02:11:06
    http://todayhumor.com/?history_13112 모바일
    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3
     
     
    - 최후의 노력 -
     

     
     
    장안(長安)을 수복하고 수립된 민제(愍帝)정권은 말이 진(晉) 제국이지 이제는 제국이란 표현을 쓰기도 애매할 정도로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 수준의 규모였다. 지배하는 영역도 장안(長安)과 관중(關中), 옹주(雍州)의 일부 뿐이었던지라.
     

    그러나 옹주(雍州)의 그 일부조차도 확실한 장악이 의심되는 판국이었다. 코앞의 장안(長安)에 진(晉) 세력이 있는걸 알면서도 옹주(雍州)의 이민족들이 대놓고 독자적으로 작위를 자칭하고 심지어는 한(漢)과 접촉하여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양쪽으로 갇혀 협공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진(晉)으로서는 그것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이민족들의 수장들은 각각 저족(氐族)의 부홍苻洪)과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이었다. 전편에서도 한번 언급한 인물들이기도 한데, 영가의 난으로 진(晉)이 완전히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복속에서 벗어나 독립했던 터였다.
     

    결국에는 그런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진(晉)은 이제 한낱 이민족의 동향에도 일일이 신경써야 할 만큼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진(晉) 왕조의 부흥은 커녕 그나마 수립한 정권의 존속조차 위태로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3살 소년,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은 어떻게든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민제(愍帝)가 즉위(서기 313년)하고 새로이 정한 연호는 '건흥(建興)'. 일으키고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민제(愍帝)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재위기간 동안 그가 벌인 일련의 노력들을 보면 딱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민제(愍帝)정권의 당면과제는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있는 한(漢)을 막아낼 병력을 충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체적으로 병사를 양성하자니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당시 장안(長安)에는 가구 수가 100여호 가량 밖에 없는 실정이었던지라 인구가 부족해 그 또한 불가능했다. 거기다 물자도 부족해 수레도 4대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 사용하는 관복이나 도장과 같은 관청물품도 부족한 마당이었다.
     
     

    결론은 주위의 도움을 받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떠한 자구책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제 사마업은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당시 진주(秦州)에 주둔해 있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가 첫번째 상대였다.
     
     
    앞서 장안(長安)을 지키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가 한(漢)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던 일은 전편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사마모의 아들이 바로 사마보(司馬保)다. 사마보는 투항한 아버지와는 달리 세력을 이끌고 탈출하여 남서쪽의 진주(秦州)까지 달아나 그 곳에서 자리잡고 아버지의 남양왕(南陽王) 작위를 세습하여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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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313년 무렵의 진(晉).
     
    검은색 원 :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한 관중(關中)의 민제(愍帝)정권.
    빨간색 원 :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
    초록색 원 : 양주(凉州)의 장궤(張軌).
    파란색 원 : 양주(揚州)의 낭야왕(琅王) 사마예(司馬睿).
     
     
    민제(愍帝)는 이 사마보를 남양왕(南陽王)으로 정식 책봉하고 우승상(右丞相)으로 임명했다. 사마보는 이미 자체적으로 아버지 사마모의 남양왕 작위를 세습해 스스로를 남양왕으로 칭하고 있었지만 황제 민제(愍帝)가 정식으로 내린 작위이니 정통성이 부여된다 하겠다. 거기다 재상의 자리에까지 앉혀 최고 권력자로 임명함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 망해버린 나라의 왕(王)이고 재상이고 책봉되고 임명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저 이름만 거창할 뿐 아무 의미없는 칭호들에 불과했던지라 사마보는 그냥 무덤덤하게 반응했을 뿐, 민제(愍帝)가 내심 바랬던 원군은 커녕 특별한 충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마보로부터 이렇다할 반응을 못얻어내자 민제(愍帝)는 강남에 할거해 있던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사마예(司馬睿)가 양주(揚州)에서 상당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접근한 것이다. 사마보처럼 민제는 사마예에게도 낭야왕(琅耶王)의 작위와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사마보의 경우와는 달리 사마예 역시 그의 할아버지 사마주(司馬伷 : 사마의(司馬懿)의 4남)의 대부터 대대로 세습되어오던 작위를 물려받아 사마보처럼 정통성 운운할 것 없이 정식으로 낭야왕으로 책봉받았기에 이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었거니와 더구나 양주(揚州)의 사마예가 장안(長安)의 민제(愍帝)를 돕기엔 실질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제한되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 시도도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반응을 보인 쪽이 양주(凉州)의 장궤(張軌)였다.
     
     
    전편에서도 밝혔듯 장궤(張軌)는 본래 양주자사(凉州刺史)였지만 중앙에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라는 두 국난을 거치는 동안 독자세력을 이룬 인물이다. (그리고 훗날 5호 16국 시대에 전량(前凉)의 기반이 된다)

    나중에 진(晉)이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진(晉)의 연호인 '건흥(建興)' 을 쓰며(이후 5호 16국들 중 하나인 전량(前凉 : 장궤가 시조)에서는 멸망하는 361년까지 이 연호를 썼다) 진(晉) 왕조의 대통을 이은 동진(東晉)에도 충성을 표한 이후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이 당시에도 진(晉)에 대한 어느정도의 충성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장궤(張軌)는 민제(愍帝)의 요청에 응하여 병력을 보내어 장안(長安)을 수비하는데 조력하고 이후의 한(漢)의 잇달은 침공에도 몇번 군사를 보내 돕게한 유일한 조력자였다.
     
     
    결론적으로 피를 나눈 친족들인 번왕들로부터의 도움을 바랬던 민제(愍帝)의 기대와는 달리 번왕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외면하다시피 했고 결국은 한(漢)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 마지막 발악과 최후 -
     
     
     
     
    서기 313년 4월에 사마업(司馬業)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에 있는 유총(劉聰)에게까지 보고된다.
     

    그리고 이 참에 진(晉)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유총은 토벌군을 보낸다.
     

    건흥(建興) 원년, 10월. 유총이 조염(趙染)에게 명하여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기습하게 하자 장궤(張軌)의 장수 국감(鞠鑒)이 5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지원하고 나섰다. 조염(趙染)이 패하여 도망가자 국감(鞠鑒)이 영무(零武)까지 뒤쫓았으나 유요(劉曜)를 만나 크게 패하였다. - 진서 민제기
     
    장궤가 여러모로 도와준 것이 기록에 나와있다. 전세는 계속해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바뀌고 있었다.
     
     
    유요(劉曜)는 승리에 자만하여 대비에 소홀했기에 11월에 국윤(鞠允)의 공격으로 크게 패해 평양(平陽)으로 회군했다. - 진서 민제기
     

    계속해서 본국에서 병력이 보충되어 쳐들어오는 한(漢)과 달리 민제(愍帝)정권은 보충할 길이 없어 매번 전투마다 한정된 병력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위태롭고도 처절한 싸움은 어느덧 다음 해로 접어든다.
     
     
    그리고 서기 314년, 5월. 유총은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공략했다.
     
     
    건흥(建興) 2년, 5월. 유요(劉曜)는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趙染)은 신풍(新豊)에 주둔하고 장수 은개(殷凱)는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진공하였다. - 진서 민제기
     
    하지만 민제(愍帝)의 적극적 대처로 다시 한번 선방한다.
     
     
    장군 색빈(索彬)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요격하게 하고 국윤(鞠允)에게 명하여 마익(溤翊)에서 유요(劉曜)를 맞게 하니 은개(殷凱)는 패하여 죽고 유요(劉曜)는 후퇴하여 포판(蒲坂)까지 물러났다. - 진서 민제기
     
     
    군사만 보내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던 진(晉)이 의외로 수차례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내자 유총(劉聰)은 전략을 바꾼다. 
     
     
     
    장안(長安)의 서북쪽에는 북지군(北地郡)이라는 군(郡)이 있었다. 이 북지군(北地郡)에는 진(晉)이 방어수단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설치해둔 진(鎭 : 요새)이 몇군데 있었는데 요새라기보단 사실 일종의 병참기지에 가까운 시설로, 전쟁에 필요한 군량과 물자를 저장해두고 필요시에는 그 물자를 장안(長安)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진(晉)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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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재탕하는 지도. 빨간 원 안에 '북지(北地)' 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곧 유총(劉聰)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거기다 기지가 갖는 중요성을 알아차린 이상 이를 방치할 리 없었던 유총은 매달리던 장안(長安)은 잠시 제쳐두고 먼저 북지군(北地郡)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기 315년, 북지군(北地郡)을 비롯한 진(晉)의 세력권 하에 놓여있던 그 인근의 고을들이 함락되면서 장안(長安)으로의 공급은 끊겼고 사실상 장안(長安)은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민제(愍帝)정권은 탈출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그 무렵에는 쌩까던 예전과는 달리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로부터 자신이 있는 진주(秦州)로 망명을 해올 것을 권유받아, 때나 조건이 충족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의 권유를 두고 조정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논쟁의 초점은 사마보(司馬保)를 믿어도 되겠는가의 찬반다툼이었다.
     
    이건 사마보의 개인 성품과 결부지어 볼 필요가 있는데, 기록에는 사마보가 '의리가 없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이다' 라고 평해놓았다. 거기다 진(晉) 멸망 이후에 그가 보이는 뭇 행동들로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개차반 성격이었는지를 알 수있다. 굳이 기록을 들추지 않더라도 당장 위에서 보이듯 민제(愍帝)정권의 신하들이 사마보의 됨됨이를 두고 망명을 망설이는 것만 봐도 알 수있지 않나 싶다. 
     
     
    즉, 행여나 망명한 황제 민제(愍帝)와 조정이 사마보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한 것이다. 
     
     
    거기다 삭침(索綝)이라는 장군이 강력하게 반대를 주장하고 나서 망명논의는 무산되었고 사마보(司馬保)도 또 그새 생각이 바뀌어 권유를 철회함으로서 그냥 해프닝으로 끝난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기라도 하듯, 상황은 민제(愍帝)정권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 다음해에 이르러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다.
     
     
    서기 316년 8월, 북지군(北地郡)이 함락된 데에 이어 유요(劉曜)가 이끄는 한(漢)군이 진(晉)의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남안 장안(長安)을 공격해와 장안성(長安城)의 외성(外城)까지 점령해버린다.
     
     
    건흥(建興) 4년, 7월. 유요(劉曜)가 위수(渭水 : 장안(長安) 인근의 강)의 여러 성(城)을 공격하니 모두 함락되었다. 8월에 장안(長安)으로 진공해오니 외성(外城)이 떨어져 성(城)의 내외가 격리되었다. - 진서 민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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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316년 가을에 시작된 한(漢)군의 장안(長安) 공략전. 연두색으로 표시된게 당시 한(漢)의 영역이고 서쪽의 파란색 영역은 파저족(巴氐族) 이웅(李雄)의 성(成) 정권이다. 여기서 중국의 영역으로 표시되어있는 한반도는 무시하자. 중국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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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안성(長安城) 평면도. 
     
    장안성(長安城)은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의 형태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외성(外城)은 말그대로 바깥 쪽 성내고 내성(內城)은 그 안의 구역이다.
     
     
     
    이제는 목에까지 칼이 들이닥친 것이다. 장안(長安)의 내부마저 장악당했다는 소리인데 고립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밖에서 장궤(張軌)의 원군이 돕고자 멀리 양주(凉州)에서 달려오긴 했지만 장안(長安)을 둘러싼 한(漢)군의 에움이 워낙 두텁고 강했는지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고 만다.  
     
     
    포위는 몇 달간 계속되었다. 그 말은 민제(愍帝)정권이 이미 모든게 끝난 것과 다름없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공급은 끊긴지 오래라 곧 식량이 동이 나 내성(內城)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굶주리기 시작한다.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여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 진서 민제기
     
     
    그나마 남아있는 식량은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사려들어 그 값이 끝없이 치솟아 쌀 한말이 금 몇푼에 거래되기까지 했다.
     
     
    식량이 없기는 조정도 마찬가지인지라 민제(愍帝)도 쌀죽으로 연명하며 외성(外城)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지만, 버티다 못해 결국 그해 11월, 항복을 결심한다.
     
     
    건흥(建興) 4년, 11월. 소매를 걷어올리고 옷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내고 양(羊)을 끌며 입에 옥(玉 : 구슬)을 물고 성에 나와 항복하였다.- 진서 민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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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하는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
    삽화에는 윗 기록대로 고대 중국의 항복의식에 따라 옷을 풀어헤치고 양(羊)을 끌고 나와 항복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삽화 속의 민제(愍帝)는 웬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로 그려져있는데 이때 민제(愍帝)는 17세의 소년이었다. 
     
     
    민제(愍帝)는 한(漢)의 총사령관 유요(劉曜)의 진영에서 항복절차를 마치고 숙부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가 그랬던 것처럼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서기 265년,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건국되어 서기 316년,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을 마지막으로 4대 56년 만에 진(晉) 왕조는 멸망한다.
     
     
    평양(平陽)으로 압송되어간 민제(愍帝)의 처우는 회제(懷帝)와 다를 것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회제(懷帝)는 그나마 처음에 대접받기라도 했다지만 민제(愍帝)는 시작부터가 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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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총(劉聰)을 만나는 민제(愍帝).
    왼쪽이 민제(愍帝)와 진(晉)의 유신들이고 오른쪽이 유총(劉聰)이다.
     
     
     
    유총이 회평후(懷平侯)로 봉하여 제후로 인정해주었고 관직도 최고위 군직 중 하나인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해줬다라지만 무늬만 그랬다.
     
     
    유총은 사냥나갈때 민제(愍帝)로 하여금 그 곁에서 시중드는 몰이꾼 짓을 시키고 연회에서는 회제(懷帝)처럼 술 시중을 들게 하여 갖은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민제(愍帝)도 유총에게 죽임을 당한다.
     
     
    서기 318년 무렵, 한(漢)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일종의 민중 봉기였는데 그들이 내세운 목표 중 하나가 유총의 아들, 태자 유찬(劉粲)을 몰아내고 그 태자 자리에 민제(愍帝)를 앉혀 복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민제(愍帝)의 존재 자체가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라 판단한 유총은 결국 민제(愍帝)를 처형한다. 서기 318년의 일이다.
     
     
    그리고 훗날,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민제(愍帝)로 추존되었다.
     
     
    진(晉)이 멸망했다라지만, 연재글 도중에서 몇번 언급했듯이 그 대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강남에 할거해있던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가 제위에 올라 다시 진(晉) 제국의 중흥을 선포하니, 역사에서는 서기 265년에 건국되어 서기 316년에 멸망한 이 진(晉)나라와 서기 317년에 세워져 서기 420년에 멸망하는 진(晉)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는 서진(西晉), 후자는 동진(東晉)으로 나누어 부른다.
     
     
    사실 이 두 개의 왕조를 같이 묶어서 진(晉)이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따로 서진(西晉)이라 부르지 않고 편의상 진(晉)이라 칭했음을 이제서야 밝힌다.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진(晉)을 개국하고 첫 연호를 '태시(太始)' 라 정했다. 크고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거창한던 시작에 비해 제국의 최후는 보잘 것 없고 비참했다. 
     
    존속기간 동안 제국은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권력싸움 등으로 대표되는 타락으로 인하여 발생한 내란으로 국정은 피폐해졌고 민생은 불안해져 수많은 민중 봉기를 불러왔다.
     
    국력은 급감하여 이 내란 도중에 이민족들이 개입할 여지를 제공했고 연쇄작용으로 이민족들의 거센 유입이 이루어져 제국의 멸망 이후로는 재분열하여 5호 16국 시대 및 남북조 시대가 도래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후 서기 589년에 수(隨) 문제(文帝)에 의해 다시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국은 장장 몇 백년에 걸친 난세를 겪게 된다. 
     
    내란 이후로도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걸어 결국 건국된지 채 반세기 남짓만에 이민족들에게 나라를 내어주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글에서는 진(晉)이 멸망한 그 후를 간략하게나마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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