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5월 18일이 되면 이 책을 추천하리라 마음먹고 계속 벼르고 있었습니다. 꼭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해서요.
추천하려는 책은 임철우 작가의 <백년여관>입니다. 제목처럼 5.18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간의 비극(제주 4.3사건, 보도연맹사건, 월남파병 등)에 대해 다루고 있고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5.18민주화 운동입니다.
서영채 평론가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위대한 소설"이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읽다보면 정말 울분이 터져나오고, 중반부부터는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장이 아름답고, 문학적으로도 우수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다 읽고 아침이 왔는데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후유증을 앓았었어요.
작가의 자전적 고백이 담겨있는 작품인데, 집필하는 동안 많이 울고 괴로워했었다고 합니다. 읽어보면 그 심정을 십분 공감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남해에 있는 가상의 섬 '영도'를 배경으로 하고, 그 바닷속에 있는 유령들과 그 유령들을 잊지 못하고 '살아있는 유령'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한 편의 위령제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 또다시 거대한 비극이 일어난 지금, 다시 이 소설 <백년여관>이 떠올랐습니다.
진도에서는 열두시만 되면 실종자의 가족들이 바다를 향해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열두시는 귀신들이 활동하는 시기니까. 어서 돌아오라고...
아래는 본문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을까. 하필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서 옮겨온 김이 굳이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며 당신의 어깨를 호들갑스레 그러안았다. 어이구, 오랜만이구먼. 하도 안 뵈기에 궁금하더니, 살아있었네. 동갑내기인 그의 너스레를 어설프게 받아주며 당신은 우물쭈물 변명을 햇는데, 다시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요즘 소설 안 쓰시나? 이형 소설, 본 지가 한참 된 거 같은데. 이젠 제발 오월이니 육이오니 하는 거 좀 벗어나서, 멋진 거 하나 써보쇼. 예?”
아무래도 좀 과민했던 성싶다. 당신은 말없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홀을 빠져나와버렸다. 썩어빠진 자식들. 이를 악물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한길로 나선 당신은 길가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소주 한 병을 훌쩍 비우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당신은 길을 되밟아 카페 2층 계단을 성큼성큼 기어올랐다.
시효? 유효기간이라고? 그 따위 폐품들을 이제 와서 어디에다 쓰겠느냐고? 야, 짜식들아. 함부로 지껄이지들 마. 세상엔 그것이 자신의 ‘전 생애’이거나 평생의 족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것이 끝내 벗겨낼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그 저주받은 시간에 사로잡혀 평생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나 있어. 너희들이 시효 지난 폐품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과 감각의 구체적 실체야. 살아있는 한,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는 한, 그건 과거가 아니라 그들에겐 엄연한 현재야.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컴퓨터 자판의 ‘삭제’키를 눌러 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지워버리라고? 천만에. 너희들은 정작 그 사람들을 ‘삭제’하고 싶은 거겠지. 어쨌거나 너와 동시대인임에 분명한 그들의 삶, 아니 존재 자체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거겠지. 왜냐면 지겨운 그들의 삶은 실상 바로 너희 어미와 아비, 할아비와 할미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그러므로 너하고도 결코 무관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 고약한 인분 덩이를 눈앞에 빤히 놓아두고서야 아무 일도 없다는 양 훌쩍 뛰어넘어, 저 현란한 너희들의 미래 속으로 홀가분하게 내달려가기란 아무래도 거북스럽고 기분 찜찜할 테니까. 안 그래?
유리문을 박차고 들어가, 당신은 그렇게 퍼부어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당신은 힘없이 등을 돌리고 만다.
(중략)
케이의 장례식 이후, 지난 일 년 반 동안 당신은 말 그대로 지옥의 시간을 살았다. 지옥은 당신의 육신과 정신의 거처였고, 그 안에 갇힌 당신은 이미 유령이었다. 폭음과 절망과 슬픔으로 당신은 끝없이 스스로 황폐해져갔고, 케이는 밤마다 꿈속으로 당신을 찾아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맹목의 분노와 증오심에 당신은 미칠 것만 같았다. 세상이 케이를 죽였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활보하는 학살자들 못지않게, 세상 사람들의 망각과 편견과 냉소가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당신은 확신했다. 당신은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신은 또한 당신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었다.
“순옥아, 결국 난 케이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만 거야. 도대체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니! 마침내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찾아간 하필 그 순간에, 케이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어. 아아, 그 녀석이 불쌍해서,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난 견딜 수가 없구나. 순옥아…….”
당신은 기어코 오열한다. 한번 터지고 나자, 오래 억눌러왔던 울음은 발작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나온다. 모래밭에 엎드린 당신을 순옥은 말없이 지켜본다. 이윽고 울음이 잦아지고, 파도소리가 조용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쩌면……그런 일로 하여 아직까지도 그처럼 고통스러워하고 계시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용서라니요.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피 흘리면서 용서받아야 할 죄를 결코 저지른 적이 없어요. 그땐 아마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나는 더없이 비겁했어. 친구와의 약속을 배신했고, 그들이 포위망에 갇혀 죽어가는 순간에 방 안에서 공포에 질려 떨고만 있었어.”
“그래요, 선생님은 분명 조금은 비겁했었는지도 몰라요. 살아남은 우리 모두 또한 그러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케이 선생님을 아니, 다른 그 누구를 배신한 것은 결코 아니에요.”
“아니야, 그건……."
"잠깐만요, 선생님. 제 얘길 잘 들으셔야 해요. 그때 선생님은 단지 눈앞의 군인들을 적이라 확신할 수 없었고, 때문에 내 손으로 총을 쏘아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뿐예요. 패배가 자명한 싸움에서 헛되게 목숨을 잃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던 거예요. 그 때문에, 배신이 아니라, 선생님 자신의 판단에 따라 둘 중 한쪽을 선택했을 뿐이라구요. 자, 선생님. 이젠 아시겠어요? 네?“
순옥은 절규하듯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돼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죠? 우린 언제쯤 이 끔찍스런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날까요. 세상 사람들에겐 고작 케케묵은 과거의 사건일 뿐인데, 시효가 지나도 한참 지난 지겨운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왜 어떤 이들에겐 그것이 평생토록 벗겨지지 않는 족쇄여야 하는 거죠? 정말이지 이런 얘기, 이젠 진저리가 쳐져요. 저는 다 잊어버렸어요. 남들처럼 고개 바짝 쳐들고, 앞만 보면서 달려갈 거라구요.”
(중략)
그날 새벽까지 Y회관에 남아 있던 케이는 군의 최후작전 개시 직후, 십여 명의 어린 여학생들을 이끌고 아슬아슬하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여학생들 중에는 순옥과 윤덕이도 끼여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당신의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순옥의 입을 통해 당신은 지금 비로소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셈이다. 마지막 기도를 바칠 때, 그분이 그러시더구나. 그날 이후 단 한순간도 마음이 평화로운 적이 없었노라고……. 불현듯 김 목사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은 모래밭에 얼굴을 처박으며 허깨비처럼 푹 고꾸라졌다.
‘아아, 그랬었구나. 도대체 네가, 네가 왜 터무니없는 죄책감을 가져야 한단 말이냐. 모두들 저리도 당당하게 등 돌리고 멀어져 가는데, 정작 위로 받아야 할 고귀한 정신들이 어째서, 거꾸로, 우리들 대신에,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냐…….’
목 안 깊은 곳으로부터 울음이 솟구쳐 오른다. 모래밭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래도록 흐느끼는 당신의 어깨를 순옥의 두 팔이 말없이 감싸 안았다. 달빛이 바다 위로 가득히 쏟아져 내렸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 마지막으로 작가가 직접 한 말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다. 당신이 말하는 해묵은 역사니 지나간 사건 따위를 나는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있는 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시간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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