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못한 축구영웅의 은퇴소식에 이런 글을 남기는 내 심경은 실로 참담하다. 세기의 플레이어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떠나 먼 곳으로 사라지려 한다. 그곳이 어디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이제 레알 마드리드 5번 유니폼을 입은 지네딘 지단의 플레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스포츠에는 ‘사이클(cycle)’이란 개념이 존재해왔다. 아무리 완벽한 선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축구 사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5연패를 이뤄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도, 브라질을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이끈 펠레도, 토털사커의 선봉으로 조국 네덜란드와 바르셀로나의 부흥을 이끈 요한 크라이프도,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불세출의 황제 마라도나도 역시 영원할 수는 없었다.
축구 선수 중, 근 10여 년간의 사이클에서 누가 가장 훌륭했는가를 따지는 건 자칫 소모적이고 감정대립 양상으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각종 메이저 대회에서의 타이틀과 개인 트로피를 기준으로 본다면 역시 지네딘 지단과 호나우두가 이 시대의 양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것도 이젠 과거가 되어 호나우딩요 쪽으로 패권이 반 이상 넘어온 느낌이지만)
깔끔함과 우아함으로 대표될 성 싶은 프랑스 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지네딘 지단의 플레이는 격렬하고 필사적인 한일전에만 길들여졌던 내게 축구란 스포츠에 관한 편견을 깨주기에 충분했다.
우아함이란 건 사실 축구선수에게 그리 필요치 않은 단어일지 모른다. 이는 분명 드리블링, 패싱, 슈팅 등의 능력을 측정할 때 정확성이나 파괴력 등에 우선하는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라운드의 발레리나는 피치 위에서 분명 격렬한 축구가 아닌 우아한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보여줬다. 더 놀라운 건, 이러한 느림의 미학을 바탕으로 동시대를 완벽히 지배했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뛰고 달리는 20여명의 선수 가운데 홀로 여유롭게 정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동료들을 조율하는 지단의 그라운드 위에서의 카리스마는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분출한다. 이건 단순히 말로 설명되기 힘든 아름다움이다.
마이클 조던의 페이더웨이와 더불어 지네딘 지단의 화려한 마르세이유 턴을 지켜보는 건 내 젊은날의 특권이었고 그들과 동시대를 함께한다는건 은근한 자랑이요 보람이 되었다.
아직도 지단은 레알마드리드의 중추적 선수이며 프리메라리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이다. 올 시즌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고, 프랑스와 레알 마드리드는 지단이 없이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하지만, 지단은 은퇴라는 강수를 두었다.
지단 본인은 체력적인 과부하에서 오는 경기력 저하와 소속팀 레알마드리드의 리 빌딩 때문이라 밝혔지만, 이 자존심강한 프랑스인에게 지난 3년 동안 우승 타이틀이 없다는 것은 꽤나 상처받는 일임에 분명했고, 아마도 은퇴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넘버원이 아니라는 건, 챔피언이 아니라는 건 어떤 이에겐 충분히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최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계약기간과 고액의 연봉이 남았음에도 자신의 명예와 팀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 지단의 용단은, 분명 시대를 풍미한 축구 영웅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결정이다.
그라운드에서 그의 경기를 더 이상 못본다는 건 비통하고 아쉬운 일이나, 진정 팬이라면, 응원했던 영웅의 결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더이상 팬들에게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할 거라며 은퇴를 결심했다는 지네딘 지단. 난 내 영웅의 결정을 최선이라 생각하며 존중한다. 그것 외엔 도리가 없다. 내 아쉬움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내 패기와 열정을 대변해줬던 90년대의 슈퍼스타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그들의 팬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내 자부와 성취도, 내 젊음의 나날도 함께 저물어간다.
새로운 비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들을 대체할 또 다른 스타를 찾아 나서는 게 현명할는지 모른다. 나는 앞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갈 것이고(그게 청춘이란 시기는 아닐지언정) 경기는 계속되어 질 테니깐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포스트-조던이 없듯 지단의 빈자리를 완벽히 대체해줄 누군가를 찾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첫사랑은 그래서 무서운 법이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의 자취를 찾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첫사랑과 같을 수는 없는 거다.
웨인 루니나 호빙요에게 심리적 가책 없이 열광할 수 있는 10대들이 그래서 부럽다. 그들의 팬덤은 현재의,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슈퍼스타들이고 십 수년간 정상에 서 있을 것이다. 그건 곧 그들의 젊은 팬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명제이다. 그들이 주역인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나의 이 같은 심리의 전개에 대해 감정의 과장이나 지나친 감상주의란 혐의가 씌워질는지 모르겠다.
일개 스포츠 스타일 뿐인 거라고. 그것도 머나먼 이국 땅의, 내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지지 않은 그네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이 느낌은 그냥 하룻밤 자면 잊혀질 상실감일 뿐일 수도 있다.
분명히 과거는, 특히나 찬란했던 과거는 과장되고 미화되는 법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건 조던의 페이드어웨이나, 지단의 마르세이유턴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낙관과 의지로 가득하던 꿈 많던 소년기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란 패기로 넘치던 그 시절 말이다.
하지만 후회란 없다. 내 삶의 침범할 수 없는 하나의 영역이 되었던 그를, 내 영웅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지단은 내가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최고라는 영광을 이뤄낸 내 삶의 대리인이었고, 그로 인해 열광할 수 있었던 내 젊은 날의 순간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자 내 삶의 자부로 남는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200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의 지단의 멋진 논스톱 발리슛은 분명 내가 지금껏 보아온 것들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골이었다.
그걸로 된 거다. 역사적인 경기에서의 역사적인 골을 나는 라이브로 지켜본 것이다. 적어도 내 다음세대의 축구팬들에게 자랑할만한 추억은 한가지 남긴 셈이다. 그거면 된 거라 생각한다.
그라운드의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의 은퇴.
바야흐로 내 인생 역시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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