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어느 주말 저녁, 기자는 오랜만에 교환학생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조촐한 자리는 어느새 커졌고 낯선 얼굴의 외국인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당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기자를 위해 유난히 또박또박 한 단어씩 천천히 말해주던 낯선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상당히 동양적인 마스크를 가지고 있던 미국인. 그것이 앤서니 길모어(Anthony Gilmore, 27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학교에서 가끔씩 만났고, 그때마다 “Hi!" "What's up?" 하며 헤어지곤 했다. 그렇게 서로 가볍게 안부나 물어보는 사이로 알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던 기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본군 위안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던, 화면 속의 한 외국인 때문이었다. 자신의 카메라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담고 있던 사람.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그렇다. 그는 바로 앤서니였다.
사실 앤서니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평범한 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2002년 가을,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있던 친구의 권유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꽤 많은 매력을 지닌 나라가 아니던가. 그는 곧 한국에 대해 좀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음 해 가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입학한다.
대학원 첫 수업시간에 ‘일본군 위안부’ 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아주 큰 계기가 됐다.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결심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앤서니의 결심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17살 때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했던 그였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날부터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충격적이고도 슬픈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의 모습을 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진심은 통하는 법. 할머니들은 곧 그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고 가슴 속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면 대학원에서 알게 된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할머니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돈이 생기는 대로 한국, 중국, 필리핀 등 다른 나라에서 만든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심히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던 작년 12월, 미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쓰나미가 발생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 미국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꽤 알아주는 다큐멘터리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실로 근사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2달가량 한국을 떠나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영화제작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가 한국에 남은 이유였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려야 해요.”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 조국의 어머니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모른 채 지내던 기자의 모습이. 그러나 그가 이어서 했던 말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제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들 중 많은 분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다들 바빠서 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럴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현재 그를 도와주고 있는 한국인은 4명. 그런데 미국인은 자그마치 30명이란다. 할말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혹 기자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냐고 물었다.
“내일이 광복절이잖아요. 그런데 영화 편집 때문에 서울에 없어요. 대신 태극기 사진 좀 찍어줄 수 있나요? 영화에 실을 자료로 필요해요.”
이렇게 말한 뒤 그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편집하러 갈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영어학원에 나가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영화를 만드는데 투자하는 열혈청년 앤서니. 그의 하루와 일주일과 한 달과 일 년은, 오로지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을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쓰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위해서라도 그 약속은 꼭 지켜줘야 했다. 8월 15일 광복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자는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며 태극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모두 모아 메일로 보내줬다.
며칠 후, 앤서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Thanks"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답장.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기자가 그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덧붙임) 앤서니는 지금 여러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도와주실 분들은 하나은행 391-910026-44007 로 작지만 큰 정성 보내주세요.
아울러 그가 만든 홈페이지
http://www.behindforgotteneyes.com 을 방문하거나
[email protected] 으로 메일 보내주세요.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아래 영화들을 구할 방법을 알고 계신 분들 역시 꼭 연락주셨으면 합니다.
①So Kwang-je's "Troop Train (Kunyong Yolcha)" (1938) ②An Chol-yong's "Fisherman's Fire (Ohwa)" (1939) ③Choi In-kyu's "Homeless Angel (Chipopnun Chonsa)" (1941) ④An Sok-yong's "A Volunteer (Chiwonbyong)" (1941) ⑤"Haebang News (Independence News)" (1945) and "Choson" (1938). ⑥“Gunyong-yeolcha” (1938, 66 min.) by Seo Gwang-jae ⑦“Jip-omneun cheonsa” (1941, 73 min.) by Choi In-gyu ⑧“Jiwonbyeong” (1941, 56 min.) by An Seok-young, ⑨“Eohwa” (1939, 52 min.) ⑩"Korea, land of the morning calm" ⑪“Korea's major cities and towns” ⑫“Emperor Sunjong's state funeral“ ⑬“Kyongsong”
-출처-
미디어다음 뉴스에서 퍼왔습니다~
-그의 하루와 일주일과 한 달과 일 년은, 오로지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을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쓰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