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조선을 넘어다본 것은 하루 이틀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로 고구려를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역사조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남의 민족역사를 도적질함은 물론 결국 제 뿌리까지 잡아먹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삼키기 위해 ‘국내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전쟁이,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의 중심인물인 연개소문(603~657)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연개소문은 한민족 본연의 신교(神敎) 문화의 상무(尙武)정신을 크게 떨쳐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대영웅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는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에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연개소문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말려들어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참패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임이 명백함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그는 오히려 역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그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악평으로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에 대한 평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돌려놓았을까?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있는 그의 존재감을 느껴보기로 하자.
천자의 나라, 고구려
기원후 581년, 수나라는 한나라 멸망 이후 369년간의 분열의 남북조시대를 끝막고 광활한 중국 땅을 통일하였다. 한껏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그들은 대륙의 패자를 자임하는 고구려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열제(재위 391~413)가 만주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이래 안정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시는 개국초기부터 배달국, 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한 영토와 신교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다물(多勿)’이었는데, 광개토열제는 이러한 고구려의 꿈을 실현한 위대한 황제였다.
중국은 요순 이래로 중국의 사방에 위치한 민족을 오랑캐로 불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 한족이 부르듯이 자신을 동쪽 오랑캐, 동이(東夷)로 인식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천하의 주인으로 인식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는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들은 나라의 종통을 지키는 것을 하늘을 지키는 것, 즉 ‘수천(守天)’이라고 하였다. 삼신상제 신앙을 바탕으로 뭇 천지의 성신과 조상신명과 한마음 되어 역사를 펼쳐가는 신교 문화에서, ‘천(天)’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과 교감하며 앞길을 일러주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이다. 고구려 황제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서 만주벌판에 군림하고 있었다.
역사의 운명은 두 패자를 동시에 인정하지 못했다. 고수(高隋) 전쟁이 막 일어나려는 때 연개소문이 태어났다. 강화도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재선생은 「갓쉰동전」, 「규염객전」과 같은 중국 소설이 연개소문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청소년기에 중국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고 귀국했다고 한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스스로 ‘김해병서(金海兵書)’를 지어 후세에 남겼다. 고려 때까지도 병마절도사가 지방에 부임할 때 한 벌씩 하사받았으나 오늘날은 유실되었다. 당태종 때의 명장이며 24장 중 한 사람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에게서 병법을 배워 당나라의 제1명장이 되었다. 그가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중국에 이름 높은 7종(種)의 병법서의 하나로 손꼽힌다. 단재 선생이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전하기를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에게 연개소문에 대해 물었는데, 이정이 답하길 ‘연개소문의 병법은 수많은 장수 가운데서도 적수가 없고, 하늘의 위엄으로 임하더라도 이기기 어렵다’고 아뢰었다”고 한다.
대당 굴욕외교를 펼친 고성제
20대 장수제(재위 413∼491)의 평양 천도 이래로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26대 영양제(재위 590~618) 때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공격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27대 고성제(재위 618~642, 일명 영류제)는 당에 대해 우호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를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중국의 도교까지 수입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강성해가고 있는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가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할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은 모두 분개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여기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한다. 고성제에게 사사건건 반대의 의견을 내는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고성제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에 임하게 하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황제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올 때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를 미리 알게 된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참석한 180여 명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황궁에 있던 고성제도 찾아내어 살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이 사건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 사건이 단순한 쿠데타라기보다는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고성제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대당강경파의 ‘반정’,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풍전등화의 민족을 깨웠던 연개소문의 절규
민족사서인 『태백일사』는 연개소문의 면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 “연개소문이 또 동북·서남에 장성(長城) 쌓기를 주청하였다 하여 장성을 쌓는 것이 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단재선생은 ‘연개소문이 노자상과 도사(道士)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說)이니라’고 단호히 비판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철저한 반당(反唐)주의자였다. 그러한 그가 명백히 적국인 당의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은 나라를 위해서는 홀로 허망하게 죽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연개소문의 이 말은 민족의 주체성을 스스로 내주고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에 대한 절규였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하나 『태백일사』에서는 황제가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연개소문은 군사와 정치를 함께 통솔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제 상좌평(上佐平) 성충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으며, 또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자신의 사저에 머무르게 하고 삼국연합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고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보장제 3년(644년), 불과 3년 만에 당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이유로 침략해 들어왔다. 당은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훈련된 정병(正兵)을 차출했으며, 수나라가 대군으로 바로 평양으로 진격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을지문덕에 패배한 것을 반성하여 요동성부터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동시에 수군은 군사와 군량미를 실어 나르게 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전략을 눈치 채고 여러 성을 지는 듯 내주었다. 그러나 당군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는 3개월에 걸친 치열한 대접전 끝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다. 당군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에 연개소문이 말갈병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단행하자 당군은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퇴각한다. 퇴각하려는 와중에 하늘에 띄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당태종의 왼쪽 눈이 빠져버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때 당군이 얼마나 퇴각을 서둘렀는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수렁으로 변한 요수 하류에 길을 만들어 건너야할 정도였다. 당시 당태종 스스로도 말채찍 끈으로 나뭇단 묶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이처럼 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나라가 을지문덕의 전략에 참패했던 것처럼 전쟁을 총지휘하던 연개소문의 전략에 빠져 배후를 공격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하는 등 큰 위기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당태종은 원정실패에 깊이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태백일사』에는 이후 상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당군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요동성을 회복하고 당 장안 인근 용도성(桶道城)2)에 일군을 보내 당태종을 계속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당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그리고 649년 당태종이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파요동지역(罷遼東之役),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을 하였는데,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의 전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도 “고혜진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고 하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로 모두 숨겨놓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개소문이 657년에 사망3)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묘소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峯山)에 있다고 하였다.
단재 선생은 ‘연개소문이 혁명가의 기백과 재략은 갖췄으나, 조선 만대의 행복을 꾀할 수 있을 현재(賢才)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고 불초한 아들에게 넘긴 것을 보면 야심은 많으나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고 평하고 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연개소문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의선인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중국 경극(獨木關) 등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그 줄거리는 당태종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인공이고 당태종이 조연이다. 경극에 나온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이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화장하는데, 푸른빛의 얼굴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연개소문과 설인귀 ]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적이었던 당나라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김부식이 ‘묘청의 난’4)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쓴 역사서로서, 중국을 사모한 김부식이 사대주의 눈으로 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태백일사』는 전혀 다른 면에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여기서 ‘조의선인’이란 말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핵심이 깃들어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과 하나 되어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목숨을 던져 살신성도(殺身成道)하는 것을 삶의 이상과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연개소문은 한명의 조의선인으로서, 잊혀져가는 신교(神敎) 문화의 민족정신을 되살려 수천(守天)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일어나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뿌리문화와 단절되어 가는 역사의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 위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의 정신도 죽고 말았다. 또한 그의 이름도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역사는 항상 역사정신의 맥을 알고 있는 소수의 영웅에 의해서 흘러왔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진보와 발전의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하였다. 한민족 역사에도 항상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민족의 앞길을 연 인물들이 있었다.